제4부. 파도의 리듬: 시련을 리듬으로 바꾸는 기술
[ 홀로 서는 자만이 빛을 낼 수 있다 ]
등대에서의 마지막 밤은 기이할 만큼 고요했다.
폭풍도 없었고, 바람도 멈춰 있었다. 바다는 숨을 고른 짐승처럼 검은 등줄기를 드러낸 채 누워 있었고, 하늘에는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마치 이별을 위해 일부러 소리를 접어둔 것 같았다.
등대 안에는 오직 하나의 소리만 남아 있었다. 거대한 렌즈가 회전하며 내는 둔탁한 기계음.
웅—
웅—
그 소리는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이었다. 사내는 그 리듬에 맞춰 배낭을 정리했다. 노인이 내어준 낡은 배낭은 놀랄 만큼 가벼웠다. 들어올 때는 욕망과 분노, 수치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던 가방이었다. 지금 안에 남아 있는 것은 금이 간 회중시계 하나와, 직접 수선했던 작은 나무 조각뿐이었다.
사내는 시계를 손바닥에 올려두었다.
초침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멈춤은 더 이상 불안이 아니었다. 멈춘 시간 위에서도 삶은 앞으로 갈 수 있다는 걸 그는 배웠다.
그때, 램프실 쪽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갈 준비는 끝났나.”
해언은 창가에 서서 밤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빛이 사라진 등대 안에서 그의 등은 더 작아 보였고, 어깨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한결 가벼워 보였다.
사내는 노인의 뒤에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인사는 매달림이 아니었다. 빚진 마음도, 붙잡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살아남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끝이 살짝 갈라졌다.
“여기 오지 않았다면 저는, 그날 밤 이미 끝났을 겁니다.”
해언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자네를 살린 건 내가 아니네.”
잠시 침묵.
“끝까지 남아 있던 자네 안의 성질머리지. 그래도 살겠다는 고집 말이야. 나는 그냥 그 옆에서 바람 조금 불어준 것뿐이고.”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자네, 마지막으로 하나만 해보게.”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이 등대 불을, 자네 손으로 꺼.”
사내의 숨이 잠시 멎었다.
“제가요?”
“그래.”
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이 오면 불은 꺼야 하네. 계속 켜두면 그건 빛이 아니라 집착이지. 누군가의 불빛에 기대 살려면, 영영 이곳을 못 떠나.”
사내는 연료 밸브를 바라보았다.
밤새 바다를 가르던 빛의 시작과 끝이, 저 작은 장치 하나에 달려 있었다.
그는 손을 뻗었다. 밸브는 차가웠다.
렌즈를 닦던 새벽들, 폭풍 속에서 몸을 웅크리던 밤들, 무덤 앞에서 흙을 움켜쥐던 순간들이 손끝을 스쳤다.
사내는 숨을 고르고, 천천히 밸브를 돌렸다.
웅—
기계음이 낮아지며, 빛의 줄기가 가늘어졌다.
마침내 등대 안이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그러나 공포는 오지 않았다.
어둠은 빈자리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이미 길이 있었다.
“노인장.”
사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둠 속에서 해언이 낮게 웃었다.
“뭘 어떻게 하긴.”
잠시 후, 툭 던지듯 말했다.
“여기서 내 할 일 하는 거지. 가서 잘 살게. 배라도 한 척 사면, 지나가다 경적이나 한 번 울리고.”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면 충분했다.
그는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한 계단.
무릎 안쪽이 뻐근하게 울렸다. 도시에서 밤새 버티던 실패가, 묵직한 통증이 되어 발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또 한 계단.
차가운 벽면의 습기가 손바닥을 스쳤다. 그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물에 씻긴 듯 희미해졌다.
또 한 계단.
숨이 조금 가빠졌다. “왜 나였나”라는 질문이, 숨소리와 함께 벽 틈으로 빠져나갔다.
계단은 길었고, 몸은 무거웠다.
깨달음은 언제나 이렇게 늦게, 육체를 통과해 도착했다.
등대 문을 열자 새벽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의 냄새였다.
사내는 절벽 아래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갔다. 자갈이 발밑에서 미끄러지며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이제 그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
해안가에 다다르자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불 꺼진 등대는 거대한 생물처럼 서 있었다. 꼭대기에는 노인의 형상이 희미하게 보였다. 손을 흔들지 않았다. 보내는 쪽과 떠나는 쪽은, 각자의 침묵을 지켜야 했다.
사내는 갯벌 위에 발을 내디뎠다.
발이 푹 빠졌다.
생각보다 깊었다. 진득한 진흙이 발목을 붙잡았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힘을 주어 발을 빼냈다. 한 발을 떼는 데에 온 힘이 필요했다.
다시 한 발.
또 빠졌다.
현실은 이렇게 무거웠다.
한 번 나아갈 때마다, 몸을 써야 했다.
사내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등대의 보호는 이제 없었다. 대신, 넘어지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었다.
멀리 수평선 너머로 붉은 해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등대의 불은 꺼졌지만, 세상은 다시 밝아오고 있었다.
사내는 배낭끈을 고쳐 매고, 육지를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그의 등 뒤에서, 태양빛을 받은 등대의 하얀 벽면이 잠시 빛났다.
그것은 작별 인사라기보다, 확인에 가까웠다.
사내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바다는 여전히 넓었고, 파도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제 알고 있었다.
빛은 남아 있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떠나는 사람의 뒤에서
조용히 길을 만들어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