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항해의 재개: 바다는 멈추지 않는다
[ 끝나지 않는 항해를 위하여 ]
사내가 떠난 뒤로 다시 한번의 계절이 바뀌었다. 하얀 등대는 여전히 그 고립된 절벽 끝에 서 있었고, 바다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 얼굴로 그 아래를 지나갔다. 파도는 같은 소리로 바위를 때렸고, 바람은 늘 그렇듯 이름 없는 항해사들의 사연을 실어 날랐다. 어떤 날은 기쁨을, 어떤 날은 후회를, 또 어떤 날은 끝내 전하지 못한 말들을.
노인 해언은 등대 꼭대기 난간에 서서 막 떠오른 초승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은 아직 온전한 원이 되지 못한 채, 한쪽이 비어 있는 얼굴로 하늘에 걸려 있었다. 해언은 그 비어 있는 부분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무의식적으로 숨을 한 번 고르며 난간에 몸을 기댔다. 예전보다 조금 더 깊어진 숨소리가 밤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그의 손에는 사내가 두고 간 낡은 수첩이 들려 있었다. 바닷바람에 종이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고, 모서리는 수없이 접혔다 펴진 흔적으로 부드러워져 있었다. 해언은 수첩의 첫 장을 다시 펼쳤다. 사내가 등대를 떠나던 날, 떨리는 손으로 적어 내려간 문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의 등대는 더 이상 저 멀리 있지 않고,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에서 타오르고 있습니다.
해언은 잠시 글자 위에 시선을 멈췄다. 그는 무심코 눈가를 찡그리며 손등으로 눈을 한 번 비볐다. 밤이 깊어질수록 글자가 예전처럼 또렷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이제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미소 지었다. 자신이 고쳐온 수많은 시간들 중 하나가, 이렇게 제 발로 걸어 나갔다는 사실이 충분히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 사내는 폭풍이 몰려와도 더 이상 “왜 나인가”를 묻지 않을 것이다. 썰물이 오면 그것을 재앙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바닥을 묵묵히 닦으며 밀물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음을. 누군가의 빛에 매달리는 대신, 스스로의 불을 관리할 줄 아는 항해사가 되었음을.
노인은 수첩을 덮고 난간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램프실로 오르는 계단은 여전히 가팔랐고, 그는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잠시 숨을 골랐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무게가 무릎과 허리에 남아 있었지만, 해언은 서두르지 않았다. 불은 늘 기다려주었고, 밤은 아직 충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램프실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냄새가 그를 맞았다. 오래된 기름과 금속, 그리고 수없이 닦아온 유리의 냄새. 해언은 거대한 프리즘 렌즈 앞에 서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바닥이 차가운 유리에 닿는 순간, 그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수많은 밤들이 그 촉감 속에 겹쳐 있었다.
그는 램프에 불을 붙였다.
치익— 하는 짧은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 불꽃은 렌즈를 통과하며 곧장 하나의 방향을 가졌다. 빛은 수 킬로미터 밖의 어둠을 가르며 뻗어 나갔다. 그것은 길을 비추는 빛이자, 누군가에게는 “아직 끝이 아니다”라는 말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여기까지 와도 괜찮다”는 허락이었다.
등대지기라는 사명은 끝나는 법이 없었다. 세상에는 매일 새로운 조난자가 생겨났고, 매 순간 누군가는 인생의 가장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었다. 어떤 이는 돈을 잃었고, 어떤 이는 관계를 잃었으며, 어떤 이는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표류하고 있었다. 해언은 그 모든 얼굴을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내뱉던 마지막 숨의 무게만큼은 몸으로 알고 있었다.
노인은 등대 벽면을 따라 손을 옮겼다.
그곳에는 수많은 낙서와 기록들이 겹겹이 남아 있었다. 날짜도, 이름도 제대로 적히지 않은 문장들.
‘살고 싶다.’
‘길을 잃었다.’
‘다시 시작해도 될까.’
1912년의 그 차가운 바다에서 살아남은 이후, 해언은 그렇게 수많은 이들의 시간을 수선해 왔다. 때로는 서점의 주인이 되어 과거를 읽게 했고, 때로는 등대지기가 되어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비추어주었다. 그가 머무는 장소는 달랐지만, 전하는 말은 언제나 같았다.
당신의 삶은 침몰한 것이 아니라,
잠시 방향을 잃었을 뿐이다.
밤바람이 등대 안으로 스며들어 노인의 흰 수염을 흔들었다. 해언은 다시 바다를 향해 섰다. 그 순간, 그는 문득 바람의 냄새가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어딘가에서 삶의 리듬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는 감각. 그는 그것이 사내의 안부라고 생각했다. 편지가 도착하지 않아도, 바다는 늘 먼저 소식을 전해주었다.
저 멀리 도시의 불빛들이 가물거렸다. 그 불빛들 사이 어딘가에서,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가 오늘도 작은 등불을 켜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누군가 또한,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밤을 견디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다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언제나 모든 답이 들어 있었다. 파도는 지웠다가, 다시 그리고, 또다시 지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삶이 우리에게 하는 방식 그대로였다. 등대의 불빛 역시 같은 리듬으로 어둠을 가르며 반복되었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속 돌아오기 위해서.
이제 등대의 문이 조용히 닫힌다.
그러나 빛은 남는다.
당신의 밤이 아무리 깊어도,
당신 안의 렌즈를 닦는 일을 멈추지 말라. 어둠이 깊을수록, 당신의 불빛은 더 멀리 간다.
그리고 이제,
당신이 당신만의 렌즈를 닦을 차례다.
어느덧 해언과 사내의 긴 항해를 함께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시간의 수선공』 제2권, 그 긴 여정의 마침표를 찍습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