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항해의 재개: 바다는 멈추지 않는다
[ 띄우지 않아도 닿는 마음 ]
도시의 수선집에도 겨울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창고의 철문은 밤새 식어 있었고, 아침마다 손잡이를 잡을 때면 쇳가루 같은 냉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바람은 골목의 모서리를 깎아내리듯 불어왔다. 콘크리트와 간판과 사람들의 숨 사이를 지나며, 무엇이든 거칠게 만들었다.
사내는 문을 열기 전 습관처럼 옥상에 올랐다. 난간 위로 서리가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장갑을 끼지 않은 손으로 그 서리를 한 번 쓸어보았다. 부서지는 소리도 없는데, 손끝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감각이 났다. 차갑고, 가늘고, 순간적이었다. 그 감각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가라앉혔다. 겨울은 늘 “여기서 다시 시작하라”는 말만 남기고 떠나는 것 같았다.
작업실 안은 따뜻했다.
난로 위의 물은 조용히 끓고 있었고, 대패질을 할 때마다 나무에서 미세한 열이 올라왔다. 나무는 깎일수록 더 진한 냄새를 내며 버텼다. 사내는 그 냄새를 좋아하게 되었다. 도시의 향수 같은 냄새가 아니라, 손으로 만지고 손으로 견뎌낸 것들의 냄새라서.
대패를 내려놓고, 그는 작업대 구석에 놓인 낡은 라디오를 켰다.
지지직거리는 소음이 먼저 나왔고, 그 뒤에 사람의 목소리가 길을 찾듯 들어왔다.
“먼바다 풍랑주의보… 파고 4미터… 등대 주변 시정 거리 악화…”
사내는 무심코 손을 멈추었다.
예전 같으면 남의 일처럼 흘려보냈을 문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숫자와 경고가 아니라, 안부처럼 들렸다. 바다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일종의 확인. ‘오늘도 거기 있느냐’라는 질문.
그는 눈을 감았다.
등대의 램프실이 떠올랐다. 회전축이 내는 미세한 기계음, 바람이 창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내는 얇은 울음, 그 모든 소리 위에서도 해언의 손이 멈추지 않던 장면. 그 장면은 기억이라기보다 몸에 남은 자세에 가까웠다. 누군가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할 때가 있다. 사내에게 해언은 이제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내는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었다.
편지는 너무 오래 미뤄둔 일이었다. 주소도 없고, 우체통도 없고, 받는 이의 정확한 위치조차 없는 편지. 그런데도 그는 펜 끝을 종이 위에 얹는 순간 이상하게 숨이 편해졌다. 종이가 생각보다 거칠었다. 어디선가 주워온 재생지였고, 손바닥의 굳은살이 종이결과 부딪힐 때마다 작게 걸렸다.
그때, 작업대 위에서 날리던 나무 가루가 종이 위로 아주 가볍게 내려앉았다.
사내는 그것을 털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로 두고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나무의 숨결이 편지에 섞여 들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잉크가 나무 가루 사이로 스며들며 조금 번졌고, 그 번짐이 사내에게는 이상하게도 ‘진짜’처럼 느껴졌다. 편지란 원래 매끈한 것이 아니라, 손의 흔적과 삶의 먼지가 섞여야 닿는 것 같았다.
노인장.
도시는 여전히 소란스럽습니다.
등대의 파도 소리보다 훨씬 날카롭고 무질서한 소음이 매일 제 귓속을 긁고 지나갑니다. 사람들은 늘 바쁘고, 표정은 굳어 있고, 모두가 어떤 목적지에 닿아야만 살 수 있을 것처럼 움직입니다.
이곳에서도 파도는 칩니다.
다만 물이 아니라 말과 시선으로, 숫자와 비교로 사람을 밀어냅니다. 가끔은 저도 그 물결에 휩쓸릴 뻔합니다. 어떤 날은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빚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매일 아침 당신이 가르쳐준 대로 제 마음의 렌즈를 닦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제가 해야 하는 것만.
이곳에서 저는 수선집을 열었습니다.
부서진 의자를 고치고, 휘어진 서랍장을 바로잡고, 사람들의 낡은 물건을 다시 쓰게 만듭니다. 처음에는 물건을 고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물건을 고치고 나면 사람들의 눈빛이 조금 바뀝니다. 그 눈빛을 볼 때마다 저는 생각합니다. 등대에서 배운 것은 결국 ‘고치기’가 아니라 ‘다시 살기’였다고.
솔직히 말하면—
가끔은 예전의 밀물이 그립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부르던 이름들, 이유 없이 열리던 문들, 쉽게 따라오던 시선들. 저는 그것들을 미워한다고 말해왔지만, 사실은… 완전히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때의 저는 분명히 화려했고, 저는 그 화려함 속에서 잠깐이나마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믿음을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끔, 아주 가끔은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스쳐 지나갑니다. 스쳐 지나가고, 저는 그것을 붙잡지 않으려 애씁니다. 그 애쓰는 일이, 지금의 저를 인간으로 붙잡아 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물이 빠져나간 뒤 드러난 이 단단한 바닥이야말로 제가 딛고 서야 할 땅이라는 것을요. 밀물은 저를 띄워 올렸지만, 썰물은 저를 ‘서 있게’ 했습니다.
당신이 준 멈춘 시계는 제 책상 위에 있습니다. 저는 그 시계를 보며 시간을 재지 않습니다. 대신 묻습니다.
제가 오늘 ‘지금’을 살았는지.
제가 오늘 ‘불을 껐다가도 다시 켤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
노인장, 오늘도 풍랑주의보가 떴습니다. 그곳은 더 거칠겠지요.
그래도… 렌즈는 닦이고 있겠지요.
이곳에서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도 제 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사내는 글을 멈추고 펜을 내려놓았다.
손목이 약간 뻐근했다. 도시에서 펜을 오래 쥐는 일은 드물었다. 예전에는 서명만 했고, 도장은 남에게 맡겼다. 지금은 자신이 직접 글씨를 눌러야 했다. 굳은살 때문에 펜이 손에 부딪히는 느낌이 달랐다. 그 낯선 통각이 오히려 그를 안심시켰다. 몸이 바뀌었다는 건, 마음도 바뀌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그는 편지를 접었다.
봉투는 없었다. 주소도 없었다. 우체국도 없었다. 사내는 그 편지를 들고 창문을 열었다. 겨울바람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종이는 바람에 흔들리며,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떨었다. 그는 편지를 바람 속에 가만히 흔들었다.
‘띄우지 않아도 닿는 마음’이라는 말이 스스로를 위로하는 문장이 아닐까 잠시 의심이 들었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어떤 말은 확인하기 전에 먼저 믿어야 한다. 등대에서 배운 것들이 대체로 그랬다.
바로 그때였다.
도시의 건물 사이로, 아주 짧은 찰나에 빛이 스쳤다. 자동차 전조등이 굴절된 것일 수도 있었다. 멀리 달리는 기차의 창이 반사한 빛일 수도 있었다. 고층 빌딩 유리창이 어딘가의 불빛을 잠깐 되돌려 준 것일지도 몰랐다. 도시에는 늘 그런 파편들이 있었다. 우연의 조각들. 설명 가능한 빛들.
그런데 그 빛은—
너무 정직했다.
짧았지만, 규칙처럼 느껴졌다.
세 번, 혹은 네 번. 정확히 셀 수 있을 만큼 길지 않았다. 다만 사내의 마음이 그 빛을 ‘읽어버렸다’. 읽는 순간, 그것은 이미 대답이 되어 있었다.
우연히 굴절된 도시의 파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내에게 그것은 분명한 답장이었다.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로 들어왔다. 그 공기가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맑았다. 사내는 창문을 닫았다. 바람을 막으면서도, 바람이 남긴 감각은 그대로 품었다.
그는 도구를 잡고 작업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대패가 나무를 밀 때마다 짧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등대에서 들리던 기계음과는 달랐지만, 어딘가 닮아 있었다. ‘살아가는 소리’라는 점에서.
작업대 구석에는 해언이 주었던 작은 나무 조각이 놓여 있었다.
사내는 일을 시작할 때마다 무심히 그 조각을 한 번 만지는 버릇이 있었다. 부적처럼. 증명처럼. ‘아직 내가 방향을 잃지 않았다’는 확인처럼. 손끝이 그 조각을 스치면, 마음이 아주 조금 정돈됐다. 말이 아니라 촉감이 그를 붙잡아 주었다.
문득 그는 생각했다.
해언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그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가 정말 등대에 있는지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삶의 어떤 관계는 위치가 아니라 방향으로 존재한다.
그 사람을 향해 마음이 돌아간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때가 있다.
밤이 깊어졌다.
도시는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누군가는 재촉했고, 누군가는 계산했고, 누군가는 남을 밟고 올라섰다. 도시의 바다는 오늘도 거칠었다.
하지만 사내는 조용했다.
그는 자기 리듬을 잃지 않았다.
하나를 고치고, 숨을 쉬고, 다음을 고쳤다. 창고의 작은 창문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왔다.
작고, 낮고, 눈에 띄지 않는 빛.
그 빛은 세상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잠시 멈춰 설만큼은 될지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내 자신이 길을 잃지 않게 해 줄 빛이었다. 그는 대패를 내려놓고 난로 위의 물을 다시 확인했다.
물은 조용히 끓고 있었다. 소리를 내지 않을 만큼 낮은 끓음.
사내는 그 끓음이 좋았다.
세상에는 늘 큰 소리만 진짜처럼 군다.
하지만 진짜는 대개, 조용하게 지속된다. 사내는 마음속으로 짧게 말했다.
노인장, 오늘도 잘 계십시오.
저도… 잘 살고 있습니다.
그 한 문장을 끝으로, 그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수평선 너머의 밤을 향해, 띄우지 않은 편지를 다시 한번 조용히 흔들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