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홍의 시간, 너를 만나 달라진 세상
“아이를 낳는 건 얼굴에 문신하는 것과 같아. 한번 하고 나면 되돌릴 수 없거든. 그러니 확신이 있을 때 해야 돼.”
넷플릭스를 통해 늦게나마 보게 된 영화 ‘먹고, 사랑하고, 기도하라’에서 주인공에게 친구가 하는 말이다. 아이를 낳을까 하던 주인공은 이혼하고 이탈리아, 인도, 발리를 여행하며 자신의 행복을 찾는다. 그런데 정말 확신이 있어서 엄마가 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라는 책에서 여성들은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는 것이 확신은 아니라고들 했다. 그보다는 정말 원한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 것. 그만큼 아이를 낳았을 때 벌어질 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알기에 결정한 선택들 같았다. 그와 반대로 나는 그저 정말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없었을 뿐이다.
나는 30대 중반에 결혼을 했고 40을 바라보고서야 아이를 낳았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때 주변 사람들이 신기해했다. 나는 독신주의자(요즘 용어로는 비혼주의자)에 아이를 원하지 않는 줄 알았다고. 혼자서도 잘 살 거 같았다고. 생각해보면 내가 간절히 결혼과 아이를 원한 적은 없었다. 그저 연애가 끊긴 적이 없으므로 언젠가는 결혼하게 될 거라 막연히 생각했고 결혼하면 자식도 있겠지 생각했다. 안 생기면? 입양할 정도는 아니겠다, 막연히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데 유전자라도 공유하지 않는다면 마음껏 사랑해 줄 자신은 없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연애가 끊기자 금단증상처럼 다음 연애 상대를 찾았고 남자 다 거기서 거기인데 다시 연애상대를 찾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했던 거 같기도 하다. 직장을 나왔으니 다시 직장을 구하는 것처럼. 프리랜서 하기엔 자기 관리가 너무 안되었기에 직장을 구했었는데 연애는 홀로 설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그저 어서 연애상대를 찾아서 더 이상 연애상대를 찾지 않고 안정감을 찾고 일에 몰두할 수 있기를 바랐다. 참으로 사무적으로. 지금 생각해보면 ‘사랑의 기술’에 나오는 말처럼 그렇게 상대가 빛나 보였던 건 그만큼 내가 외로웠다는 반증일 뿐이었나 싶다. 나는 생각이 많은 거 같으면서도 이럴 때 보면 참 아무 생각이 없다. 오히려 감정이나 행동을 먼저 하고 그 뒤에 내 감정과 행동에 관해 오래 생각하는 편인 거 같다. 일단 지르고 보자, 인생은 홈쇼핑과 같아서 일단 지르고 나중에 수습하면 된다고. 주말만 되어도 밤낮이 바뀌고 나 스스로도 제대로 돌보지 못했는데 조카를 예뻐할 줄도, 먼저 다가갈 줄도 몰랐는데 나는 어쩌자고 아이를 낳고 싶었을까. 아이를 낳는 게 내가 엄마가 된다는 말과 같다는 걸 깨닫지도 못하고 임신한 내내 산모님이라는 말조차도 어색해했으면서.
아이를 낳고 2년여의 시간을 지내면서 아이를 가지려고 했던 때의 마음을 가장 잘 가깝게 잘 설명해주는 문장을 두 개 찾았다. 하나는 임승유의 시집 제목.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남편과 부랴부랴 결혼을 하고 3년여를 아이 없이 지내면서 스멀스멀 조바심이 생겼다. 남편은 확실히 아이를 원했다. 조카들과 잘 놀아주는 편이었고,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면 같이 생활하기에 힘들지 않을까 라고 말했다. 정 안되면 입양도 생각해 보자고 할 정도로. 엄마아빠가 된 지금 생각해보면 남편조차 확신이나 마음의 준비를 했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이었겠다 싶다. 아이를 무척 예뻐하기는 하나 아빠로서의 책임이나 의무를 회피하고 외면하려는 때가 많으므로. (외면하고 싶은 마음은 나도 항상 가진다. 중요한 건 행동이다. 그리고 ‘아이를 낳으니 둘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하기에 ‘둘째는 너의 육아휴직이 조건이다’라고 하니 하나면 될 것 같단다...) 하지만 나는 그때 남편이 원하는 걸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인생은 언제나 의지의 문제이므로 가지나 안 가지나 하는 나의 의지보다는 갖자는 남편의 의지가 더 강했기에. 나는 그동안 외로웠던 것만큼 남편을 사랑했고 그저 같은 공간에 다른 사람의 숨소리와 체온이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아이를 만들면 나를 더 사랑해 줄 것 같아서, 아니면 이 가정이 더 지속될 것 같아서? 어쨌든 나 갖고는 부족한 거 같아서. 어쩌면 나 자체로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자연유산과 시험관 실패라는 수순을 밟으면서 못 가지는 것이 내 잘못, 무능력인 듯한 마음이 더해져서 진짜 갖고 싶은지 어떤 지보다 할 수 없는 걸 해내고 싶다, 여자로서의 내 생산성을 증명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졌는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생기면 아이가 남편보다 더 좋아질 거라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우습게도 코웃음을 쳤다. 나는 그래도 남편을 더 사랑할 거라고 그래서 아이를 갖고 싶은 거라고 말했다. 그래서 남편을 닮은 아이가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건 너무 낭만적이기만 한 생각이었다. 아이 낳으려 준비하는 기간 동안 아이를 낳은 이후의 인생에 대해서도 더 이야기했어야지 않았을까. 이혼 전문 변호사의 웹툰 ‘우리 이만 헤어져요’를 보면 젊은 부부 이혼사유의 대부분이 양육문제라고 한다. 부부는 시간, 노동력, 경제력이라는 자원을 서로 더 갖기 위해 경쟁하는 관계가 되는데 어린아이를 양육하면서 이런 이해관계가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지고 갈등이 첨예해진다는 것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애비규환’은 어린 주인공이 엄마가 되기로 결정하면서 같이 낳기로 해놓고 도망간 남자친구, 예전에 사라져 버린 아빠를 찾아 나서는 영화라고 한다. 거기서 나오는 친구가 아이 낳는 게 무섭지 않냐고 하자 주인공이 말한다. “무섭지. 근데 궁금한 게 무서움보다 큰 거야.” 나도 그랬다. 여기서 궁금한 건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 내가 고위험군 산모였으므로 아이는 그저 건강하기만 바랐기에 아이에 대해 상상하는 것은 궁금함보다는 무서움에 더 가까웠다. 그보다는 아이를 낳고 나서 변해갈 내 모습이 궁금했다. 나나 주위를 돌보지 못한다는 열등감이 항상 맘속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어떻게든 내가 바뀌지 않을까 라는 기대, 어떤 역할을 부여받았을 때 그 역할에 빠져드는 배우형인 내가 엄마라는 벗을 수 없는 배역을 받게 되면 나는 과연 어떻게 변해갈까 하는 궁금함. 다들 내가 이기적이라고 하는데, 나는 얼마나 타인을 내 중심에 놓을 수 있을까? 얼마나 나다움, 내 욕구를 많이 포기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함도 있었다. (지금도 아이가 어린 만큼 타인이라고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나의 연장선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까지 만들어 온 나라는 일관성에 가장 크게 내는 균열, 완전히 다른 상황에 빠진 나를 내가 보고 싶었다. 그것이 돌이킬 수 없다 하더라도. 돌이킬 수 없기에 변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막연한 궁금증의 결과는 실로 대단했다. 내가 궁금했던 것 이상의 변화였다. 처음에는 그 변화가 너무나 심하게 몰아쳐서 아이를 제외한 모든 존재(나를 포함)에게 연민하거나 화가 날 정도였다. 세상을 보는 기준이 너무나 달라져 버렸고 나는 내가 여자인 것을 이제야 인정하게 된 것 같다. 세상을 보는 내 센서에 돌기가 오소소 돋은 것처럼 여성들에 대한 공감의 진폭이 커졌다.
예전에 친구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넌 세상 사는 게 재밌어 보여. 근데 난 안 그래서 아이나 낳으려고.” 그 친구의 이유도 적절하다.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심심할까 봐. 누군가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 그리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같이 변화하는 것. 인생에 그것만큼 재미있는 건 없는 것 같다. 그것이 그가 아니라 아이가 되어서 아쉽지만. 아이로 인해 계속해서 새로운 문제를 맞이하고 그것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나와 그의 모습을 보게 되었더라도. 그렇게 해서 바뀐 내 모습과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내 모습을 알아가는 것이 좋다. 그래서 확신 없이 시작했지만 아이를 낳은 건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둘째는 갖지 않겠다는 분명한 확신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