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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씨네 Oct 15. 2019

<셔틀콕> 리뷰

강원, 영화학교 영화읽기 워크숍 3주차

영화소개

<셔틀콕>

감독 : 이유빈

러닝타임 : 100분

장르 : 미스터리, 멜로/로맨스

출연 : 이주승(민재 역), 김태용(은호 역), 공예지(은주 역) 등




언제 어른이 되는 걸까


   고등학교 3학년 때, 배드민턴을 참 좋아했다. 점심시간마다 전교에서 제일 빨리 급식을 먹어치우고 체육관에서 배드민턴을 쳤을 정도로. 숱하게 셔틀콕을 만졌지만, 거기서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공감하기 어려운 영화였다.

   이 영화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의존할 것 없이 세상에 내던져지듯 남은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아무도 모른다]가 문득 떠올랐다.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태반이 열일곱이고 아이돌 그룹의 주축 멤버는 열여덟이지만, 실제로 아이들은 매우 연약한 존재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이들의 행동에 책임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럼, 아이들은 언제 어른이 되는 걸까?

   내가 민재(이주승)에게 공감할 수 없었던 것은, 내 기준에 민재가 더 이상 어리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엔 외모 때문인가 생각해봤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민재는 돈이 무엇인지 안다. 민재는 충분히 세상과 소통하고, 친구도 있다. 민재는 심지어 운전까지 한다. 민재에게는 상당한 능력이 있다. 그래서 민재가 으깨진 고양이 시체처럼은 도통 보이지 않았다. 민재를 깃털 망가진 셔틀콕처럼 만든 원인의 상당수는 상황이 아니라 민재 그 자신이다. 민재를 떠나게 한 것은 오로지 의붓누나인 은주(공예지)때문이다. 민재는 보살핌이나 단지 돈을 위해 은주를 찾는 것이 아니다. 민재는 은주를 욕망한다. 그것은 매우 성적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은주를 떠나게 한 것은 ‘자고 싶다’는 민재의 발언이었다. 누군가를 의존하는 게 아니라 성적으로 욕망하는 것, 그리고 그만한 능력이 갖추어진 상태. 나는 그것이 어른의 증거 같다. 여정의 끝에서 민재는 무엇을 발견했나? 나는 민재가 성장한 것 같지 않다. 민재는 이미 그 정도로는 자라 있으니까. 거기엔 다만 이루어지지 않는 욕망과, 어쩌지 못해 거두게 되는 어린 동생 은호(김태용)가 있을 뿐이다. 성장이 아니라 체념이다.

   정말로 순수하게 무력한 것은 은호다. 은호는 소위 여성적인 행동을 하는 아이인데 그게 정체성의 문제인지, 불안한 정서로 누나에게 의존한 결과인지는 불명확하다. 아마 후자를 의도한 것 같지만, 조금 과한 설정으로 느껴진다. 어쨌건 은호는 몹시 어른스러운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존재다. 누나가 보고 싶어도 민재가 없으면 누나를 만날 수조차 없다. 마주 욕설을 날려도 정말로 민재가 화나면 겨우 저항하고 버려져야 한다. 민재가 은호를 선택하는 것은 호의와 연민이지만, 은호에게는 그런 선택권조차 없다. 은호야말로 타인의 의지에 생존이 결정되는 셔틀콕 같은 존재다. ‘표현은 거칠지만 사실은 착한 형’이란 것은 결국 포장된 폭력에 불과하며 그래서 이 영화는 여정의 끝에 발견한 형제의 우애 같은 이야기도 아니다.

   은주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영화의 대부분에서 은주는 대상화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심지어 은주를 향한 시선이 내내 너무 불안하고 섹슈얼해서, 불쾌하기까지 했다. 그 시선을 걷어낸 은주는, 동생들을 버리고(동생으로부터 도망치고), 1억을 탕진하고, 애인과 먼 지방으로 도피를 해, 임신을 한, 마트 노동자다. 은주는 라켓을 던지고 더 이상 셔틀콕을 치지 않기로 선언한 것 같다. 은주는 민재의 생각과 달리, 완연한 어른이 되어 있다.

   배우들의 연기, 장면들(핸드헬드!), 순간들, 여러 디테일(네비게이션이나 라디오 소리처럼)도 모두 좋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내가 민재(가 아이인 것)에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현실에는 분명 더한 일도 있겠지. 그러나 현실에는 개연성이 필요 없다. 그건 그저 일어나는 거니까. 하지만 영화는, 좀 더 설득력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 참, 수리비를 내지 않고 튀었던 정비소의 아저씨가 전주의 체육공원에서 기름을 훔쳐가는 노숙자와 같은 사람인 것은 의도한 것일까? 민재의 죄책감(?)과 두려움을 나타낸 장치였을까? 좀 궁금하다.


새보미야




분노하는 소년


   소년의 현실은 냉혹하다. 재혼한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특별한 감정을 느꼈던 누나는 부모님의 사망보험금을 챙겨 도망갔다. 소년에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누나의 어린 친 남동생 뿐이다.

   이런 현실의 상황에서 소년은 무지막지하게 분노를 표출한다.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했던 누나의 배신. 소년은 자신을 배신한 누나에게 발견하면 '죽여 버리겠다' 고 말한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자신에게 '넌 안돼' 라고 하며 계속해서 좌절만 주는 현실에서 소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누나를 쫓아가는 것 뿐 이었을 것이다. 뜻하지 않게 어린 남동생과 위험한 여행길에 오른 소년은, 겉으로는 센척 해 보인다. 하지만 속으로는 내심 이런 척박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치는 것으로 보였다. 나라면 과연 어땠을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반응했을까? 영화를 보며 자문해 보았지만 되돌아 오는 것은 '절대 저렇겐 못 할거야.' 성격이 완전히 다르기도 하고 저런 상황에 직접적으로 처해보지 못해서 상상만으로 끝나곤 하는 것이다. 분명 이 현실 어딘가 에서는 내가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사이 힘든 일을 겪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 사람들의 삶 하나하나를 가늠해볼 수는 없지만 영화를 보며 현실은 너무나 냉혹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느낀다.

   영화나 다른 컨텐츠를 향유하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다른 이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서일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간접적으로라도 살아보는 것. 그렇게라도 소년의 삶을 한번 살아보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저렇게 세상이 날 절망스럽게 만들던 때 나도 저렇게 화를 냈다면 좋았을까?' 하고 옛 일을 생각하게 된다.


솔마




   탄생 그 자체는 모두에게 평등하다. 아무 잘못도 부채도 없이 순수한 존재로 삶을 시작하는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만큼 모두가 동등하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태어남을 사과해야하는 존재로 커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영화 속 은호를 보면서 존재 자체가 은폐되어야 하거나(미혼모의 아이), 그냥 존재만으로 화가 나게 만들거나(아동학대 부모의 아이), 의도치 않게 환영받지 못할 존재로 남아버린 아이들이 자꾸 떠올랐다.      


   사과 자체가 삶의 한 방편이 되어버린 학대받는 아이들은 자신의 삶이 벼랑으로 내몰릴 때마다 잘못하지 않은 잘못을 사과하고 또 사과한다. “잘못 했어요” 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혹은 강요받으면서. 아이들은 사죄하거나 혹은 사죄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는 같은 맥락에서 은호가 자신을 버린 민재가 다시 돌아왔을 때 했던 사과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뭐가 미안하냐는 민재의 물음에 은호는 모른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 민재를 보면서 은호가 느꼈을 ‘당연히 미안해야 할 것 같은’ 그 감정은 단지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형을 재회해서 느꼈을 안도감이나 그동안의 무례함을 사과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또다시 유기당할 순간을 막기 위해 지금 자신에게 유일한 절대자인 민재를 향한 절박한 방어이자 부탁이었을지도 모른다. 재회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천진하게 배드민턴을 치는 은호와 민재. 떨어진 셔틀콕을 줏으러 방파제를 오른 민재는 은호의 눈높이를 지나친 훨씬 더 높은 위치에서 은호를 놀리듯 따돌리고 은호는 아등거리며 민재를 쫓는다. 짧은 여정 내내 투닥 거리던 형제의 즐거운 한때처럼 연출된 이 장면에서 오히려 나는 둘의 명확한 존재의 위치가 이들이 앞으로 함께 살아갈 삶을 느꼈다.


장주희




셔틀콕, 은호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궁금했던 것. <셔틀콕>이라는 제목. 제목은 결국 감독이 뭘 말하고자 하는 지, 가장 대놓고 알 수 있는 재료이죠. 그래서 제목 지으려고 엄청 고민할 거고, 해석하고자 고민하는 거고.

   저는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 1994)이란 영화를 참 좋아해요. 일화가 유명해서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사실 원제는 ‘쇼생크 탈출’이 아니라, ‘쇼생크의 구원’이지요. 탈출이라 하면 앤디가 ‘쇼생크’를 벗어나 ‘지와네타호’로 갈 수 있었던 사건이 큰 해방감을 주겠지만, 실은 ‘쇼생크에서의 삶’이 앤디를 구원하는 거죠. 앤디가 감옥을 나가고, 레드가 앤디를 생각하면서, 그 긴 세월동안 쇼생크가 왜 앤디에게 구원인지를 자세히 설명해주는, 아주 친절한 영화라 이 영화를 좋아해요.

    딴소리를 길게 했는데, 영화 셔틀콕은 영어로 된 제목도 <Shuttlecock>이더라고요. 확실히 제목에서 주는 감독의 목소리가 있을 건데. 저에게는 역시 은호를 은유한 것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은호’에 집중해서 다시 영화를 돌아보면, 화가 나더라고요.

   ‘은호’가 말할 기회를, 영화에서는 충분히 주지 않아요. 그래서 계속 예상하게만 돼요. 내 머릿속에 있는 방식으로. 김태용(은호 역)의 연기는 걸출하지요. 쌍뽀큐를 날리는 그 천연덕스러움. 찰진 “개새끼”. 심지어 계속 해사해요. 그런데 은호는 차에서 실례를 하는 아이잖아요.

   나는 은호를 가늠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은호 얘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어요. 은호는 셔틀콕에 비유해서 자기처지를 이야기해요. (공이 이상해, 지 마음대로야. 바람 조금만 불어도 아무데나 막 날아가고 조금만 쳐도 털 다 빠지고, 생긴 것도 이상하게 생겨가지고..- 은호) 그걸로 은호생각을 엿보기는 하는데, 그걸 들으면 더욱 더 좀 들어 봐야할 거 같죠.  

   민재는, 정말 강렬하죠. 어떤 영화는 보고 나서 한참이 지나고 나서 좋기도 하고, 어떤 영화는 볼 땐 좋은데 나중 가서 별로기도 한데. 어떤 장면이 생생하면, 저는 대체로 그 영화는 영화로서 좋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주승(민재 역)의 연기가 그래요. 눈빛이랑 표정. 그런 게 한참이나 생각나요.

   민재는 보드 타는 걸 꽤 좋아하는 것 같던데, 전 뭔가에 푹 빠져서 연습하는 사람을 대체로 믿는 편이예요. 근데 그런 민재가 덜컥 덜컥 돈 쓰면서, 은호를 위해 뭔가를 하지 않았을 거 같지 않아요. 플레이스테이션이라던 지. 방방이라던 지. 레고라던 지. 뭐 그런 게 집안에 잔뜩 있었으면 저에게 좀 설득력이 있었을까요. 뭐 여하간, 그건 생각하기 나름인 연출방식이라. 그리고 5000만원에 제작한 장편영화는 그것만으로도 엄청 대단한 거라고 하니까. 여하간 그런 것은 다 좋은데. 민재는 은호한테 너무 함부로 하잖아요. 은호가 온몸에 낙서가 돼서 학교에 남겨져 있었을 때, 은호를 두고 그 새끼들 찾으러 가는 게, 어떤 시원함 같은 걸 느끼게는 해 주는데. 미안하단 말이 쪽팔릴 때가 많지만, 어쩔 땐 그냥 쏟아져 나오기도 하잖아요, 왠지 정말 그래야할 것 같을 때는.

   은호 친아빠를 찾아갔다 전화통화하고서는 은호 다시 데려온 거. 저에게 민재가 아플 때는 이 순간이었어요. 은호한테 그런 얘기 안하면서, 혼자 생각이 많았을 거니까.


   여기저기로 던져지는 은호얘기를 조금 더 정성들여 들어주고 싶었어요. 은호가 그렇게 사각지대에 있으면 안돼요. 대체로 차안에서 머무르지만, 차 공장가서도 그렇고, 보리사 가서도 그렇고, 어디서 뭘 먹기도 했을 거고. 은호의 말이나 행동을 보면 뭔가가 직감적으로 느껴지잖아요. 그러니까 오지랖인 줄 알아도 물어봐야 해요. 뭘 먹었냐고. 옷이 더러워졌다고. 서울말을 쓰는데, 어디서 왔냐고. 누구랑 왔냐고. 뭐가 좋았냐고. 계속 물어봐야 해요, 감은 떨어져도 물어보다보면 좀 더 쉬워질 수 있잖아요. 우리는 더 이상 아무데에나 실례를 하지 않는 어른이니까,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은호가 자라서 “아름다운 길, 남해대교”를 건널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은호가 어떻게 살게 될지, 벌써 정해졌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감독이 남해대교를 건너면서 네비게이션 소리를 크게 들려준 건, 나와 같은 생각에서일거라고 생각해버리려고요.      


고래




누구나 초보의 때가 있다  


   영화 셔틀콕은 불안과 공포를 조성한다. 부모님의 죽음, 남겨진 아이들, 재정적 궁핍, 사회적 시선. 불안함을 야기하는 장치들은 감독의 의도가 분명한데, 이러한 공포들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영화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공포는 죽음이다. 하지만 죽음이 아이들에게 마냥 슬픈 일은 아니었다. 죽음 다음으로는 돈이 그들에게 두려움을 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는 죽음도 돈도 아닌 다른 것을 통해 인간이 불안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부모님의 죽음으로 세 명의 아이들을 보호해주던 울타리가 사라졌다. 대신 부모님이 남겨주신 돈이 그들의 새로운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램프의 요정이 세 개의 소원만 들어주었던 것처럼 1억의 돈도 무한한 것은 아니었다. 돈이 없어진 그들은 금세 불안정해졌다.      


   민재는 돈을 가지고 사라진 은주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은주를 찾아 나선 것은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까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민재는 은주와의 사랑이라는 관계를 통해서 채움 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민재의 사랑은 일방적이었고, 가족으로써 관계도 깨버리고 말았다.   

 

   민재가 은주와의 잘못된 관계에 대해 깨닫고 원망과 후회를 풀어낸 후, 민재는 은호를 바라본다. 은호는 민재에게 아직 깨어지지 않은 관계이자 이어나가야 할 존재이다. 여전히 서툴지만 민재는 은호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나는 영화가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가 불안과 공포를 조성한 것은 민재의 불안한 관계들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죽음 이후, 민재는 은주에게 의지했다. 하지만 적절하지 못한 소통으로 멀어졌고, 다른 어른들과의 모습도 불안정했으며, 친구들과의 관계도 온전하지는 못해 보였다. 간간히 동생과 장난을 치던 장면들만이 즐거운 민재의 모습이었다고 기억에 남는다.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은 실패한 관계가 있기 마련이다. 실수하고 실패하는 과정을 통해서 소통하는 방법과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을 배워나간다. 나도 여전히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민재의 바보같은 모습에도 조금이나마 공감을 했던 것 같다.


아침밥




이 영화가 친남매를 활용하는 방법


   셔틀콕은 ‘민재-은주’ 그리고 ‘민재-은호’라는 각각의 관계를 통해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보여준다. 먼저 ‘민재-은주’와의 관점으로 간단히 요약해보면, 비록 남이었지만 이제 가족으로 살아가야하기 때문에 누나로서 다가갔던 은주에게 호감을 느껴 고백해 버리고만 남동생의 치기어린 첫사랑의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관객으로 하여금 민재가 은주를 찾는 이유가 사망보험금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지만, 둘의 만남 이후 민재가 스스로를 창피하게 여기는 모습에서 단지 돈 때문만이 아니라 아직도 누나를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에 찾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 다 부모님의 사망보험금을 흥청망청 써버리는 모습이나, 은근히 민재를 유혹하는 듯 하는 은주의 비언어적 표현 등 철없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캐릭터가 가진 미성숙함과, 그로 인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예정된 고통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반면에 ‘민재-은호’의 관계를 통해서 영화를 들여다보면, 아직도 친누나의 품이 그리운 어린 남동생과, 그런 누나에게 배신감과 사랑이라는 복잡한 애증의 감정을 느끼는 형이 뜻하지 않게 ‘함께’ 누나를 찾아 떠나는 내용이며, 앞서 얘기한 ‘민재-은주’의 관계와는 별개의 감정 묘사와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둘이 티격태격하거나 배드민턴을 치는 등 좀 더 일상적이고 소박한 장면들이 나오기도 하고, 사회적 약자들이 겪어야 하는 일방적인 폭력에 분노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점점 둘의 존재를 서로에게 각인시켜 나가는 과정을 천천히 풀어낸다. 또한 영화 내내 이러저러한 이유로 분노에 가득 찬 민재가 피식 웃는 모습이 종종 등장하여 관객의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은호를 안고 떠나는 민재의 모습에서는 더 이상 은주의 그림자가 느껴지지 않았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의붓형제가 서로를 가족으로 이해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로드무비이자 성장영화라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구조의 이야기를 하나의 매개체로 묶어서 표현하는 방식이 사실 새롭지는 않지만 배우와 각본의 조합이 만들어 내는 시너지가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되고, 각각의 이야기 자체는 약간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느낌이지만, 끝내는 하나의 종착지로 이어져 이제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민재가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성장해 나가기를 바라는 어떤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마냥 불편하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가람




마음 속에 날아든 쓰린 기억의 셔틀콕


   떠올랐다. 아이의 눈빛.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OO이의 눈빛은 그저 약간 어색함이 감도는 정도였지만 나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내가 무어라고 그 아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슬퍼할 수 있을까, 동정어린 감정 따위 OO이에게 아무 도움이 안될거다 치부했지만 그래도 자꾸 아버지를 잃은 현장에 서 있었을 OO이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얼마나 난감했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무기력했을까. 그리고 나의 무기력했던 어린 시절 한 장면이 떠올랐다. 엄마, 아빠가 심하게 다투었던 날 심장이 쿵쾅거려서 울지도 못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상황이 잠잠해진 뒤에야 침대 밑에서 터져나왔던 눈물이 떠올랐다.


   OO이 뿐만 아니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 갇힌 어린 친구들이 보육시설에 보내진다. 때론 폭력적인 방법으로 버려지고, 때론 이용당하기 위해 다시 수거되었다가 또 다시 폐기된다. 어른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어른들이 보호해주는 곳이 내가 수업을 해온 '아동복지시설'이라는 곳이다. 아이들이 떠안은 상황을 나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 아이들과 같은 상황에 놓인 적이 없다. 그저 짐작한다.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던 어린 시절 몇 컷의 쓰린 체험으로 아이들을 짐작한다. 가냘프고 얕은 동정으로만 남지 않기 위해 최대한 아이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나는 시선은 늘 부족한 위치에 있을 것이다. (어설픈 시선으로 너를 떠올려서 미안하다 OO아.)


   영화 속 민재가 감당해야했던 부모님의 죽음, 그나마 살아있지만 자신들을 양육할 생각이 없는 어른들의 외면, 자신 곁에 남아 있는 어린 동생, 점점 바닥을 향해 내려가는 통장 잔고, 누나를 향한 애증이 뒤섞인 미묘한 감정. 이 모든 불안한 감정들을 시설의 아이들도 피부 깊숙이 쥐고 살아간다. 퇴학 당하기를 기다리며 등교를 거부하고, 어른들의 만류에도 결국은 시설에서 퇴소당하고, 그렇게 자신을 망가뜨리던 OO이도 그 불안함에 자신을 정신적으로 고립시킨 것이라 함부로 판단해본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단 한 명의 믿음직스런 어른이 남아있으면 아이들은 돌아온다. 그것이 부모건, 친척이건, 선생님이건 상관없이 단 한 명이라도 기다리는 존재가 있다면 아이들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온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민재에게 은호는 어쩜 그런 존재가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영화 내내 민재에 대한 연민으로 은호와 은주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던 나의 편협한 시각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저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OO이에게 미안함을 전한다. 지금의 OO이가 자신을 더이상 고립시키지 않고 살아가주었으면 하는 마음 쓰린 기적을 바래본다.


기억의존자




구덩이에서 탈출하기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한다. 물에 희석되어버린 피도 진할까. 이유빈 감독의 영화 <셔틀콕>을 보고 궁금해졌다. 부모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재혼 가정의 아이들에게 우리는 가족의 정의를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 가족이라는 연에 닿기 위해서는 혈연만이 전부일까.

   아직은 독립보다는 보호가 조금 더 어울릴법한 주인공들에게 남은 거라곤 살던 집, 그리고 1억의 보험금이다. 보험금 일부를 들고 잠수를 타버린 은주, 그녀에 대한 애증에 시달리는 민재, 사랑이 고픈 어린 동생 은호, 공통적으로 결핍이 있는 아이들이다. 결핍의 반응 양상은 저마다 다르다. 은주는 회피하고 민재는 분노하고 은호는 대리만족할 거리를 찾는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집’을 이야기했다. 민재와 은호가 사는 서울 집은 더는 예전 같지 않다. 민재가 은주를 다시 만난 곳은 작은 마트, 이름마저 홈마트다. 은주는 남해에서 그녀만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그녀를 두고 민재는 은호와 함께 다시 서울 집으로 되돌아간다. 알다시피 집은 물리적인 공간 그 이상이다. 가족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민재가 가족을 대하는 결은 보편성에서 조금 벗어났다.

   관객은 민재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따라간다. 사랑부터 증오에 이르는 누나 은주를 향한 민재의 복잡한 감정이 지금의 현실과 과거의 회상으로 끊임없이 교차한다. 영화 내내 민재의 모습이 짠하면서도 답답했다. 그의 마음에 온전히 공감하기 힘들었다. 최근에 영화 <메기>를 봤는데 구덩이에 빠지면 구덩이를 더 파지 말고 빠져나와야 한다는 대사가 있었는데 민재야말로 구덩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형상이었다.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특별한 것처럼 그녀에게 자신 역시 특별하리라 생각하던 민재에게 은주는 뼈아픈 직면을 안겨주었다.


“니 착각일 거라는 생각은 안해봤냐?”


   행복을 결정짓는 정답은 모르겠지만 권장하는 기준은 있다. 내 힘(의지)으로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전자는 받아들이고, 내 힘이 닿을 수 있는 후자에 더 에너지를 쏟을수록 우리는 덜 불행해진다.

   민재는 바꿀 수 없는 것 혹은 바꾸기 어려운 것에 더 혈안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이길 바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의 힘이 닿기 어려우며 바랄수록 더 피폐해진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민재는 이 구분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은호를 본다. 어찌할 수 없는 은주와 달리 은호는 민재가 어찌할 수 있는 대상이다. 피보다 더 진한 관계로 나아갈 힘, 가능성이 민재에게 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셔틀콕을 함께 주고받을 수 있다.               


airbag




날아간 셔틀콕     


   셔틀콕. 왜 셔틀콕일까?

“공이 이상해. 지 마음대로야. 바람 조금만 불어도 아무데나 막 날아가고. 조금만 쳐도 털 다 빠지고. 생긴 것도 이상하게 생겨가지고.”
 -은호 대사 중-


   나는 크게 볼 때는 각자의 마음의 모양을 빗대어 표현한 것 같고, 좀 더 깊게 들어가본다면 모두의 첫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좀 더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면 꼭 이성간의 사랑이라기보단 그냥 한 인간으로서의 처음 사랑, 사랑이란 감정의 처음을 보여준 것 같다는 생각이다. 친남매가 아닌 세 남매(누나은주와 막내은호는 친남매)의 처절한 인생 속에서 각자가 깨우쳐가는 사랑을 보았다. 막내 은호의 대사 속에서 셔틀콕을 표현한 부분과 더불어 혼자는 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통해 세 아이가 맞닥뜨린 인생의 첫 사랑이라는 감정을 그린 것 같아 이미 마음이 아팠다. 어른이 되기전에는 누구에게나 각기 다른 모습일지라도 어른이라는 울타리는 꼭 필요하다. 영화속에서 세 남매가 재혼가정이어서, 부모님이 갑작스런 사고로 돌아가셔서, 친남매가 아니라서 등의 상황을 물론 전부 부정할 순 없지만, 다른 울타리가 있었더라면 아이들이 세상에 내딛는 발걸음이 그렇게나 무겁고 위험하지는 않았을거라는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영화가 끝나고도 그러했고 혼자 생각을 할 때에도 상황을 그리 만든 두 부모님과 보이지 않는 주변의 어른들 모두에게 분노했다. 동생들은 나몰라라 하며 돈을 갖고 도망가서 남자친구와 임신까지 하고 무거운 몸으로 마트일까지 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은주, 정리 안 된 집만큼 복잡한 일상과 함께 커온 누나에게 말도 안되는 이성적인 사랑을 느끼는 민재, 어린아이 같지 않은 언행과 성정체성이 의심되는 은호. 대강 나열만 해봐도 문제가 많은 것 같고 이 아이들만의 잘못 같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세 아이에게 세상을 알려주고 옳고 그름을 나누어주고 마음의 소리를 들어줄 사람이 있었다면 상황이 조금은 나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보고 싶었던 영화였는데 보고 나서 굉장한 마음의 압박감과 분노, 그리고 허탈함을 느꼈다. 더 속상한건 주위를 둘러보면 생각보다 많이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고 현실은 더 녹록치 않다는 것이다.

   셔틀콕.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는 바람같은 삶 속에서 이리저리 날아다니다 현실의 벽과 같은 네트를 넘어야 할 아이들이 곧 셔틀콕이었을까? 주고 받는 셔틀콕이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을(관계) 보여주는 거라면 그들이 보여준 마지막처럼(민재와 은호의 배드민턴) 민재와 은호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고, 아무런 주고 받음이 없던 은주와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걸까? 정말 장르처럼 영화는 내가 의문을 가득 안겨주고 미스터리하게 떠나갔다. 은호가 바다에서 형 민재와 배드민턴을 칠 때 셔틀콕이 결국 바다로 떨어져버렸다. 어쩌면 치는 사람이 보내는 방향대로 날아가버리는 셔틀콕처럼 일방적인 감정교류가 비로소 끝이난 것을 말해주는게 아닐까.


우리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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