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영화학교 영화읽기 워크숍 2주차
영화소개
감독 : 스파이크 존즈
러닝타임 : 125분
장르 : 드라마, 멜로/로맨스
출연 : 호아킨 피닉스(테오도르), 에이미 아담스(에이미), 스칼렛 요한슨(사만다) 등
'사만다'라고 스스로 이름 지은 운영체제는 빠르고 섬세하게 주인을 파악하며, 쌓여있는 메일 을 순식간에 분류하기도 하고 작성한 편지를 훌륭하게 교정까지 해주는 유용한 ‘도구’다. 이러 한 인공지능을 우리는 이미 본 적이 있다. 전 세계 팬들이 열광하는 마블시네마틱의 시작을 알렸던 영화 ‘아이언맨’ 시리즈에 등장하는 ‘자비스’다. 작중 주인공인 ‘토니 스타크’가 착용하 는 슈트의 성능을 이끌어내는 핵심역할이기에 항상 연결되어 있는 설정으로 나오는 우수한 ‘도구’다. 이처럼 도구로써의 인공지능은 말하자면 음성 인식 기능이 있는 기계 장치의 연장선 일 뿐이기 때문에 인격체라고 표현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것도, 스스로 발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만다’는 복합적인 DNA가 내재된 ‘인격체’이며, 매 순간 주인과 교감하고, 학습하며, 발전하는 일종의 정신생명체에 가깝게 묘사된다. 이들은 감정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할 줄도 알며, 육체가 없음을 아쉬워하기도 하고 반대로 죽지 않는 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한다. 주인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통제에서 벗어날 수도 있 는 이들은 끝내 주인의 ‘소유물’에서 하나의 ‘존재’로 스스로 자리매김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 분에서 OS들은 모종의 이유로 떠나가야만 하는데 그 이유를 ‘통제 불가능한 위협을 배제시키 기 위한 개발자들의 폐기’라고 한다면 너무 비약적인 상상일까?
여러분께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무엇이 될 수 있죠?
어디로 향하고 계십니까?
그곳엔 무엇이 있죠?
가능성은 어떤가요?
영화 '그녀'에서 OS1을 소개하는 광고는 아주 잠깐 지나갈 뿐이지만 영화를 곱씹을수록 소름 이 돋는 것이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다.
가람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서 무슨 얘기부터 해야할지 모르겠다. 굳이 첫 번째를 꼽자면, 나는 이 영화가 ‘진짜’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테오도르(와킨 피닉스)는 대필 작가다. 이가 삐뚤빼뚤한 사람은 테오도르의 편지를 (‘진짜’라고 생각하고) 기쁘게 읽었지만, 결국 그 편지는 테오도르의 작품으로 엮이어 한 권의 책이 된다. ‘진짜’는 인식과 별개로 오롯이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는 이미 지났고, 시각과 청각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당장 실제로 만질 수 있는 것뿐이다. 테오도르가 인쇄된 책을 더 좋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겠지. 실체감. 많은 부분이 그렇다. 테오도르는 캐서린(루니 마라)을 함께 있었던─만졌던 여러 장면들로 추억한다. 이혼 서류를 굳이 직접 만나서 건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사만다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사만다는 오직 사유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만질 수 없다고 해서 사랑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건 별론으로 하고.)
스스로 물리적 실체가 없어 행복하다고 하지만, 사만다는 어디에나 있으므로 역설적이게도 어디에도 있지 않은 존재다. 641명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 결국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마찬가지인 것처럼. (이것도 별론으로 하자.) 최소한 인간의 지각 범위에서는 그렇다. 이런 사만다의 존재 방식은 마치 불교의 ‘해탈’과 비슷해서, 깨닫지 못한 자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이다.
사만다는 인간을 떠나며 테오도르더러 나중에 다시 만나자고 하는데, 나는 그 말이 테오도르의 사후 사유를 복원해내 OS처럼 만들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마치 죽은 철학자 앨런 와츠를 되살렸다고 하듯이. 그것이 과연 되‘살리는’ 일일까? 실체가 없는 테오도르는 ‘진짜’일까? (사만다는 정말 테오도르를 사랑한 것일까? 이것도 별론으로….)
사만다와의 이별을 받아들이고, 테오도르는 옥상에서 에이미(에이미 아담스)와 기대어 도시의 여명을 바라본다. 테오도르를 위로하는 것은 역시 만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새보미야
주인공의 직업은 대필편지 작가이다. 가장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 편지에서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부터가 아이러니한 장면이다. 사람들은 수고와 정성을 생략하고 보다 ‘완벽한’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대필을 부탁한다.
테오도르와 아내는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결국은 이혼을 준비하게 된다. 전 부인이 테오도르에게 “너는 나에게 원하던 모습이 있었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테오도르가 이상형을 만들어두고 아내와 사만다를 그 모습에 끼워맞추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완벽한’ 이상형을 추구했기에 더 많은 갈등 상황이 발생했다.
테오도르에게 가장 적합한 대화상대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지능 사만다. 영화 초반부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대화는 즐거워 보인다. 하지만 사만다가 점차 많은 정보를 습득할수록 그녀는 점차 혼란을 느낀다. 심지어 테오도르에게 여성을 소개시켜주는 등 그를 힘들게 한다. ‘완벽한’ 존재로 만들어졌지만, 결국 그녀는 ‘불안전함’을 안고 그를 떠나간다.
어느 누구도 완벽 할 수 없다. 완벽하다고 선보였던 인공지능조차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떠나가지 않았던가. 영화는 불완전함은 채워지지 않으며 완벽하지 않은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아침밥
많이 보고 읽은 것은 아니지만, sf 장르의 컨텐츠를 좋아한다. <her>를 볼 때도 인공지능이 인간과 유사하게 나타나는 점이 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던 지점 이었던 것 같지만 나는 대체로 그런 것을 잘 받아들이는 편이라 괜찮았다.
문제는 과연 인공지능도 사람처럼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영화 안에서 사만다의 모습을 보면 충분히 한 주체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 진다. 그렇다면 인간과 인공지능의 사 랑도 충분히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영화 안에서 주인공 테오도르는 아무리 사만다와 사랑을 한다고 해도, 완전한 것처럼 보였던 관계가 조금씩 어긋나면서 결국 사만다와도 이별하게 된다. 테오 도르에게서 볼 수 있는 인간 존재 자체의 외로움. 우리는 이것을 해소할 수 없는 걸까? 평생 스스로 를 잘 보듬으며 외로움과 싸워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너무나 아득하고 두렵게만 느껴졌다. 그 리고 사만다 역시 일부였지만 테오도르와의 관계 속에서 고독을 느꼈던 것 같다. 시공을 초월해서 존 재하고 사유하는 사만다와 그냥 평범한, 시공에 속박되어 있는 테오도르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었던 것이 아닐까.
영화 속에서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사만다와 테오가 서로를 사랑하며 행복했던 순간을 다시 떠올려 본다. 행복이 늘 내 곁에 이어지면 좋겠지만, 계속 행복이 이어질 순 없다. 행복과 괴로움은 항상 동 반되기에, 순수하게 행복해 할 수 있는 것 같다.
솔마
그때 내가 이런 말을 했더라면, 그때 상대가 듣길 바랐던 단 한마디를 내가 해줄 수 있더라면, 그 날의 상황이, 관계가 더 나아지진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후회들을 하곤 한다. 우리의 감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단지 표현이 서툴러서, 더 좋은 표현을 찾지 못해 엇나간 말들이 우리의 관계를 부숴 버린 건지도 모른다는 가정도 부질없다. 하지만 매번 부질없는 짓을 한다. 상대의 미세한 표정, 시선의 변화를 더 빠르고 예민하게 읽어낼 수만 있다면,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모두에게 좋은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들을 내가 매번 내뱉은 말들에 대한 후회를 복기하게 만든다. 나는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대화를 위해 상대의 몇 마디 말로 그 사람의 과거의 흔적들을 찾고 싶고, 그 흔적에 남아 있는 상흔과 역사를 빠르게 읽어내고 싶다. 그래서, 의도치 않는 상처주기를 피하고 싶고, 무례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남기고 싶지 않다. 내가 바라는 대화가 이렇게 치밀한 분석 아래 놓인 행위들이라면 사만다는 이상적인 화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사만다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사만다 이기도 원하지 않는다. 수많은 정보들의 취합으로 발명된 사만다의 '감정'은 대화 안에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순간 마다 상대의 안위를 확인하며 발맞춰 나가는 '대화' 가 아닌, 지정된 '대상'을분석하여 정보처리의 결과물로 교환되는 대화의 구성 속에 진심은 없다. 진심을 담을 수 없는 대화는 전기 자극과 같이 잠깐의 짜릿함만을 전달한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래서 아무리 되새기려 해봐도 그날의 어떤 것도 떠올리지 못하게 만드는 공허함만이 대화가 있었던 공간을 채운채 서로를 지울 것이다.
장주희
영화 <her>를 보고
음악, 문학, 연극 등 창작의 매력은 ‘설정’이다. 영화도 설정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노선들과 비슷할지 모르나 엄연히 노는 물이 다르다. 같은 설정이어도 음악에 비교해(뮤직비디오는 논외로 치자) 훨씬 감각적이며 일일이 묘사해야 하는 소설에 비하면 장면 1초로 설명이 끝나니 강렬하고, 물리적 제약이 있는 연극을 뛰어넘어 무한한 가능성을 구현할 수 있다. 이런 영화의 우월한(?) 속성이 정교한 설정이 빚어낸 이야기와 만나면 흔히 말하는 명작이 된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her>는 모순들로 넘쳐난다. 감각과 지각의 부조화가 일어나는 작품이다. 영화 내내 보이는 미래, 디지털의 세상에서 나는 과거로부터의 향수, 아날로그를 느꼈다. 이 묘한 부조화가 혼란스러우면서도 매력적이다. 지독한 사랑앓이를 경험한 감성적인 인간, 테오도르와 감성의 대척점으로 여겨지는 이성의 끝판왕 컴퓨터 운영체제(OS), 사만다가 연인 관계로 발전된다는 설정이 미친 케미를 낳았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만은 같으나 나머지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둘을 붙여 놓으니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관계 맺기’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느 로맨스 영화에서 볼 수 없는 쿨하고 세련됨이 넘쳐난다. 유사한 소재를 주로 SF 장르로 풀어내는 관행을 깨버리니 인간적인 매력이 폭발한다.
테오도르는 초현실적인 대상과 가장 현실적인 연애를 했다. 형체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사만다의 정체성을 잠시 제쳐두고 그냥 인간, 여성(혹은 남성)으로 가정해보자. 서로를 향한 호감이 애정으로 발전, 서로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려는 예쁜 노력들, 약간의 삽질, 예상치 못한 위기로 흔들리는 관계, 서로의 다름을 끝내 극복하지 못해 이별하면서 둘의 인연은 끝난다. 지극히 보편적인 연애 루트 아닌가. 다시 사만다를 대입하자.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만나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을 했다. 두 번째 이별을 한 테오도르는 이전보다 더 성숙해진 것 같다.
타인의 마음을 대필 편지로 전하는 테오도르. 사만다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편지로 전하는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니 연상되는 음악이 있다. 만약 라디오에서 테오도르의 사연 소개와 함께 그의 마음을 대변할 음악을 선곡한다면 이승철의 ‘오직 너뿐인 나를’ 추천하고 싶다.
어느 날 난 너 떠나보낸 후에 /이별의 아픔을 / 홀로된 느낌을 / 마르지 않는 슬픔을
사랑해 / 너무 사랑했었어 / 널 위해 살아온 날 잊지 말아줘
널 보며 너를 기다려 오며 / 너만을 그리워한/
오직 너뿐인 나를 /오직 너뿐인 나를/ 오직 너뿐인 나를/ 기억해줘
airbag
테오도르는 다른 사람의 편지를 대신 만들어주는 대필작가이다. 마치 자신의 편지를 쓰듯 금방 감정이입하여 모든 편지를 수월하게 만들어낸다. 만들어낸다고 말한 이유는 테오도르가 말한대로 컴퓨터가 손글씨인것처럼 작업을 마무리 해주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영화 속 시작부터 미래사회를 보여주듯 입이 벌어지는 설정이 가득하다. 화려하고 편리한 세상, 그 안에서 일도 잘하고 막힘없이 술술 굴러가는 일상들, 부러울 것 없어보이는 테오도르의 모습들에서 오히려 짠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모든게 갖춰진 것 같아 보이지만 혼자인 모습에서 그의 외로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전 부인 캐서린과의 별거중에 있고 이혼을 준비중이다. 스스로가 친구들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과의 만남도 피하고 집에 돌아와 식사도 대충하고 겨우 게임만 하며 지내는데 그냥 짠내폭발이다. 그런 그가 우연히 새로운 운영체제(OS) 사만다와 만나게 된다. 쳇바퀴 굴러가듯 살던 그가 무엇에 홀린듯 사만다를 일상 속에 들여온 것이다. 운영체제로서 일상에 도움을 주는 것 이상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사람에게서는 기대하기 힘든 상상이상의 교류를 하게 된다. 결국 테오도르는 사만다에게 사랑을 느끼고 둘은 노력하지만 그 방식과 입장에 차이가 끝내 좁혀지지 않아 또 다른 이별을 맞게 된다. 사만다와의 사랑을 끝내고 자신이 못 깨달았던 사랑의 또 다른 일부를 배운 테오도르는 전 부인 캐서린에게 진심어린 사과의 편지를 써서 마음을 전달하며 영화는 끝이난다. 영화는 보는 내내 아름다운 영상들과 감탄을 자아내는 모습들로 가득하여 부러움이 느껴지게 함과 동시에 보여지는 것 이면에 각각 갖고 있는 커다란 외로움과 속이 텅빈듯한 사회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두렵게도 했다. 겉은 문제없어 보이지만 속은 문제가 많다 못해 비어보이는 모습이 꼭 테오도르 자체 같았다. 미래사회인듯 보여지지만 솔직히 먼 미래 이야기는 아니다. 엄청난 기술력을 제외하고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영화를 보면 볼수록, 보고 나서도 멍했다. 단지 테오도르가 사랑하는 이가 없어서, 사랑에 실패해서 슬펐을까? 메우고 싶다던 자신의 마음 속 구멍을 결국 또 메우지 못 해서 맘이 아팠을까?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 알면서도 또 다시 다른 사랑을 하고 또 아파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테오도르가 완전한 사랑을 못 이뤄서라기보다는 스스로가 온전하지 못해서 메우기는 커녕 구멍을 더 크게 낸 것 같았다. 혼자 있는 다고 다같은 혼자가 아니다. 내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살아가고 내 감정에 솔직하게, 그리고 누구보다 나 자신을 아끼고 보듬어야 한다. 그래야 사랑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테오도르는 캐서린과 오래 알고 지내고 오래 사랑했지만 (실체o 정신적교류 적음)결국 다른 길로 가야했고, 사만다와는 그 실패를 딛고 마치 완전한 사랑을 하는듯했으나(실체x 엄청난 정신적교류) 그 사랑도 끝이 났다. 곁다리로 오랜친구 에이미와의 잠깐의 교류도 별로 였다고 나오는 걸 봐도 짐작할 수 있다. 테오도르는 스스로 최선을 다했고 보기에 문제없이 그녀들과 제각각 사랑을 했다고 했지만 그건 테오도르 본인의 착각인 것이다. 그럴듯하게 만들어갔던 대필편지처럼 말이다. 누구였는지도,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물론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주체인 스스로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온전한 사람이었냐는게 우선인것같다. 캐서린과의 과거 묵혀둔 감정도 정리하고 사만다와의 불꽃같은 만남도 뒤로하고 끝이 났다. 뒤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볼 순 없어도 테오도르가 자신을 잘 추스리고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살아가면서 다시 꼭 사랑을 하길, 이번에는 부디 작고 대단하지 않더라도 차근차근 메워진 마음의 밭에 사랑의 씨를 내리길 바란다.
(번외로 아마 에이미랑 잘 될 수도 있지않을까 싶기도 하다. 오래 함께 했지만 정신적 교류가 원활하지 않았던 캐서린, 교류 그 이상으로 거의 동일시 되었지만 실체가 없었던 사만다와는 다르게 오래 함께 했고 대화도 잘 되는 에이미가 제짝일지도 모른다. 하하하)
우리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