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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review

경남도립미술관 유감

by Om asatoma


경남도립미술관은 말하자면 이 도시에 있는 나의 방 같은 곳이다. 한동안의 생활을 정리하면서 들어가서 쉴 수 있는 곳, 숨어있기 좋은 곳, 누군가 남겨놓은 쪽지를 혼자 펼쳐보는 것처럼 작가의 작품을 몰래 읽는 곳. 그래서 매우 애정하는 장소임을 미리 밝힌다.


전시의 기획이나 구성, 작품의 수준도 꽤 괜찮았는데 어찌 된 연유인지 최근에 도립미술관에 조금 실망하는 일들이 생기고 있어 안타깝다. 우리 사이 잠시 쉬어가야 하는지.


지금하고 있는 전시가 10월 초부터는 다음전시를 위해 휴관한다 하여 서둘러 다녀왔다. 지난여름 비 오는 날에 갔다가 단체관람객들의 소란으로 중간에 감상을 포기하고 돌아 나왔던 전시이다.


개관 20주년 기념 소장품 기획전과 '추상과 관객'이라는 추상미술에 대한 기획전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


도상봉, 폐허

전시실에 들어서서 어느 작품을 멀리서 보았을 때, 4년 전 서울에서 보았던(덕수궁미술관인지 서울시립미술관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고희동의 작품이 떠올랐다. 색감 때문인지 어떤 이유에선지 작품을 보자마자 그가 생각났다. 마치 길 가다 옛사랑 비슷한 사람만 보아도 그 사람인 것처럼 여겨져 길을 멈추게 되는 것처럼. 가까이 다가가 작품 설명을 보니 작품은 도상봉의 '폐허'였으며, 고희동에게서 서양화를 배웠다는 설명이 있었다!


최승준, 멜랑콜리


이 작품을 보고는 거제 벨버디어 커피숍 블랙업 맞은편에 있던 작품이 생각났다. 프레임의 비율과 사이즈도 그러했지만 화면의 분할이나 색감의 흐름들, 풍경을 바라보는 인물의 뒷모습에서 풍기는 감상들이 그러했다. 벨버디어 갈 때마다 저 작품들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작가의 이름은 알지 못했는데, 작품 설명에 있는 작가의 이름과 벨버디어를 검색어로 검색하니 역시, 최승준 작가였다. 어떤 반가움.

최승준, 길 시리즈

문신의 작품이다. 작품설명에는 엄숙하고 생명의 본질을 함축하고 있다고 하는데, 지난번 이제하전에서 그의 소설에 여성 동성애자들에 대한 스토리를 읽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1920년대 초반에 태어난 남성작가들에게 또는 1970년대 초반에 여성동성애가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였나라는 정숙하지 못한 의문을 가졌다.


문신, 뒷산과 하늘

쾌청한 하늘이 눈에 띄어서 한 걸음 다가갔는데, 문신의 작품이었다. 동경 미술학교 수학 후 귀국해서 제작한 이 작품, 뒷산은 현재 문신미술관 뒷산인 추산동 뒷산으로 일제 강점기 때 벌목된 뒷산으로 일제의 만행이 드러난다는 설명이 있었다. 갸우뚱 한 부분은 그 뒤로 화면의 대부분을 하늘로 표현한 과감한 구도가 당시 여름날의 쾌청함을 보여준다는 설명이었다. 일제의 만행과 여름날의 쾌청함이라니.


나는 알지 못했지만, 저 언덕이 일제의 만행을 드러낸다면 시선을 위_하늘로 옮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러한 현실적 상황을 마주하는 것이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웠거나, 마음이 아팠거나, 앞으로 자신은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거나, 잠시 시간의 유예가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담배 연기 한 모금 내뿜으면서 바라보는 하늘 정도가 될 것이다.


화면의 대부분이 하늘인 과감한 구도가 여름날의 쾌청함을 보여준다는 설명에는 문자로 다 표현할 수 없었겠지만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는 화자의 심정과 더불어 그때 바라본 하늘은 참 시린 푸른색이었음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을까. 벌목으로 드러난 황토 부분은 강제로 벗겨져 드러난 맨살 같은 것일까. 먼 하늘을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작가는 그림으로 고발하려는 뜻이었을까.


여름날의 쾌청함이라니, 여름날의 쾌청함이라니!


강요배, 물비늘

강요배 화백의 작품을 보게 될 줄은. 물과 바다와 바람을 좋아하는 나는 강요배 화백의 작품 앞에 오래 서 있으면 몸살을 한다. 하지만 늘 반갑다.


작품은 반가웠지만, 작품의 배치가 의아했다. 개인적인 선호로 단독 벽면을 가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뒤로하고, 좌우에 배치된 작품들의 붉은색이 너무 강렬하여 작품 감상에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래야만 했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그래야만 했을까? 전문가들의 의도에 의한 배치였을까? 사실, 조금 화가 났다.


방정아, 급한 목욕

사실적인 묘사가 눈에 띄어 어쩐지 작품 설명을 보게 되었는데, 이 작품의 작품설명을 읽은 이후로 다른 작품들의 작품 설명도 눈여겨 읽게 되었다. 마음에는 어떤 삐딱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지점이다.


" 두 주인공 아줌마는 작가 주변에 실존하는 여성들로... 온탕의 타일을 닦는 목욕탕 아줌마와 몸에 시퍼런 멍이 들어도 세신을 받으려는 손님 아줌마는 서로 등을 마주하며 각자의 일에 몰두하고 있다..."


제목이 '급한 목욕'이라면, 주인공은 한 명이다. 화면의 중심으로부터 밀려나 있는 왼쪽의 멍이 든 아줌마.

대중목욕탕이라는 공간은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서 몸을 씻는 곳이다. 공간은 공유하되, 같은 시간에 함께 할 수 없는 소외된 여성이 등장한다. 온탕의 물이 비워진 상태라면 다른 손님들이 모두 빠져나간 영업 종료시점에 들어왔을 것이다. 다른 일 때문에 그 시간에 올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고, 몸의 멍이 남사스러워서 사람이 많은 시간을 피해 왔을 수도 있다.


몸에 든 멍의 위치를 볼 때, 어딘가에 부딪치거나 넘어져서 생기는 멍이 아니다. 아마도 폭력이 있었을 것이다. 가족 내의 폭력일 수도 있고, 그녀가 속해있을 다른 사회 속의 누군가로부터의 폭력일 수도 있다.


영업 마감 시간의 손님은 환영받지 못한다. 업장을 정리하고 마무리할 시간에 왔다면, 업장의 이용을 허락받았을지라도 눈치를 받게 되어있다. 입장료를 지불했어도 손님으로서 환대받지 못하고 조금은 불편한 환경 속에서 목욕을 서두를 수밖에 없다. 각자의 용무가 달라 등을 돌릴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겠지만, 등 돌리고 있는 여자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어도 전해지는 분위기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 여성의 삶에서 희망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온탕의 물은 모두 빠져있는 시간, 온탕의 수도꼭지는 잠겨있지만 멍든 여성의 작은 세숫대야는 채워져 있고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나오고 있다. 대중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삶에서는 밀려나있지만 그녀는 그녀의 삶을 소신껏 경영하고 있는 것이다.


목욕탕 여자가 사람들이 빠져나간 빈 탕을 닦는 동안, 멍든 여자는 자신의 몸을 닦고 있다. 오른쪽의 여자가 직업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고, 타인들이 사용한 탕의 타일을 닦는 것이라면 왼쪽의 여자는 자신을 위해 자신의 몸을 닦고 있다. 어떤 장식이나 더 아름다워 보이기 위한 꾸밈의 활동은 아니지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이다. 아마도 남루하고 고단한 삶이겠지만, 꾹 다문 입과 목욕타월을 움켜잡은 손아귀의 힘을 보았을 때, 아직은, 자신을 놓지 않고 단단히 붙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밀려나고, 상처 입고, 외면받고, 영업 마감 시간의 불청객 같은 삶일지라도 목욕의자만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을 돌보는 모습에서 삶에 대한 거대한 포부는 아닐지라도 아끼며 역할을 다해가겠다는 결연한 다짐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의 포인트는 세숫대야로 흐르고 있는 열린 수도꼭지의 물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설명에 있는 "세신을 받으려는" 표현에서 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하는 마음이 들어 이 작품 이후로 작품설명을 유심히 읽게 되었다.



최석운, 이발하는 사람

글쎄, 잘 모르겠다. '급한 목욕' 바로 옆에 전시된 작품이다.


"손님이 눈을 흘기며 이발사를 바라보고 있고, 이발사는 그런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깎고 있는 장면을 담았다. 인물의 과장된 형상은 웃음을 머금게 하지만, 어딘가 불편한 정서를 남긴다. 작가는 이렇듯 우리 삶의 다양한 파편들에 해학과 풍자를 그때의 분위기를 담아낸다."


작품설명을 읽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작성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작품설명이 작품감상의 주가 될 수는 없고, 감상자들에게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는 정도로 작성되어야 하는 건지 어떤 의도로, 어떤 역할로 작성되는지도 모르는 문외한이다. 그러나.


그러나, 저 작품에서 손님이 눈을 흘기며 이발사를 바라보고 있는가... 모르겠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렇게도 볼 수 있는 일인지 정말 모르겠다.


작품에서 손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이발기이다. 이미 저러한 상황에서는 이발사에 대한 신뢰-불신에 대한 판단은 뒤로 물러서기 마련이다. 이발기가 맨살과 닿으며 머리카락을 깎아나가는 그 긴장의 순간을 나타내는 것이기는 하나 눈을 흘기는 것도 아니고, 이발사를 바라보는 것도 아니다. 아닌 것 같다.


저 작품의 백미는 손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느껴지는 긴장감과 더불어 이발사의 코털이다. 이발 도구들, 면도의 도구들, 가위와 칼이 늘어져있고 이발사는 이발행위를 하고 있지만, 그의 코털이 길게 비죽이며 밖으로 나와있다. 해학과 풍자는 코털에 있다. 작품설명을 쓴 사람은 '어딘가 불편한 정서'를 어디에서 읽었는지 묻고 싶다.


원성원, 언론인의 바다

미묘한 어감의 차이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만, 이 작품 외에도 할 말이 많아 우선 패스.


"... 주체성을 잃은 여성의 현실을 암시한다...."


워낙 개인적인 감상이겠지만, 옷으로 몸을 가리고 얼굴만 내어 놓고 다니다가 이제 얼굴을 가리고 몸을 내어 놓는다는 점에서 주체성을 찾아가는 여성의 현재라고 말하고 싶다.



이진주, 기억의 방법

"... 두 여성 중 한 명은 눈이 가려져 있는 뒷모습이고, 다른 한 명은 먼 산을 보고 있다. 이는 인물의 눈을 통해 인격을 담는다는 전신사조의 개념을 뒤튼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왜곡되어 있으며, 불가피한 사각지대 때문에 '진짜'를 제대로 볼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


땅은 들린 채 벽이 되어 가는 길을 가로막고, 얼었던 눈은 녹아 흐르고 있으며, 여성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고, 벽이 된 땅에 박힌 못과 여성의 목과 여성의 손목과 또다시 여성의 목과 이동 선반의 고리와 개의 목에 이르기까지 연결되어 있는 붉은 실. 아래에 있는 여자와 위에 있는 여자의 손은 서로 깍지 끼고 있으나 바닥에는 잘려나간 손목들이 있고, 개는 그것을 핥고, 손의 역할을 대신한 듯한 드릴이 바닥에 놓여있고, 선반의 가장 위에는 스스로 박았을 법한 못들이 놓여 있고, 다 먹고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사과가 아직은 붉게 놓여있고, 뿌리째 뽑힌 식물은 아직 잎이 푸르지만 곧 말라갈 것이고, 눈이 녹아 흐르는 곳에는 구멍이 생겨 흙이 떨어져 나가고 있고, 길이 끝난 곳에 길이 벽이 되어 있고, 여자는 고개를 돌린 채 울고 있는데,


먼 산을 보고 있다는 표현이 마뜩잖다. 과연, 과연 이 작품이 왜곡된 시각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가. 정말 그러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갖고 싶은 작품들.(아래)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들.(아래)


전시의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작품.(아래)

전시되어야만 했는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지, 나는 알 수 없는 작품.

아름답지 않았으며, 어떤 감동도 없었다.

공간을 빼앗겨버린 불편함과 불쾌함.

K아트의 미래라 하니, 세계가 주목한다는 기사 타이틀을 보니 더 거부감이 드는.

전시의 기획을 의심하게 하는, 전체 전시의 완결성을 떨어뜨리는, 감히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작가의 작품경향을 참고하더라도

적절한 표현을 대강 조합하지말고

전시되는 작품에 해당하는 부분만 따올 것.



누구와 싸우고 싶은 날이었는지, 전혀 그럴 마음은 없었으나, 전투적으로 전시를 관람했던, 2410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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