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乙巳勒約)

雲谷의 월요 칼럼

by 운곡

feat. 도둑이 그어 놓은 금 앞에서

雲谷


재개그 하나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부부가 사는 집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자고 있던 부부를 깨우더니 방바닥에 금을 쓱 그어놓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금을 넘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 말만 남기고는 집안 귀중품을 모조리 쓸어 담아 유유히 사라졌다.


둑이 떠나자 아내는 남편을 다그쳤다.

“당신은 도둑이 들었는데 왜 꼼짝도 안 했어?”

남편은 억울하다는 듯 변명했다.

“내가 그 금 밖으로 다리를 몇 번이나 내밀었다가 넣었는지 알아? 위험하게 얼마나 노력했는지!”

웃음으로 끝낼 이야기지만, 씁쓸하기 그지없다.


늘은 1905년,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강제로 박탈한 을사보호조약, 아니 을사늑약(乙巳勒約) 이 체결된 날이다.

‘늑약’이라 부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억지로 맺은 약속, 부당하게 강제된 조약이라는 뜻이다.

고종의 재가도 없었고 대신들 모두의 찬성도 없었다. 궁궐 주변에는 일본군이 포위해 있었고, 항의하려는 대신들은 힘으로 눌러버렸다. 형식만 ‘조약’이었지, 실상은 ‘도둑의 협박’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역사적 장면을 떠올리면, 자꾸만 아재개그가 떠오른다.


둑이 그어놓은 금 앞에서 “내 다리가 몇 번이나 금을 넘나들었다”라고 변명하던 남편.

그 남편이 황제였다면, 방관하던 아내는 대신들이었고, 도둑에게 탈탈 털린 재물은 백성이었으며, 그 도둑은 일본이었다.


작 대의와 명분을 걸고 도둑의 칼 끝 앞에서 몸을 던진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만약 황제든 대신이든 누구 하나라도 그 자리에서 부당함을 저지하려다 죽었다면, 일본은 최소한 국제사회에서 난처함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도둑질을 그만두진 않더라도, ‘그렇게 쉽게’ 집안을 털어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러나 집안은 모조리 털렸고, 남편은 말한다.

“그래도 우리는 무사했지 않느냐.”

맞다. 전면전으로 갔다면 백성들의 희생은 참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도자의 무능과 방관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일제는 총 한 번 쏘지 않고 나라를 삼켰고, 그 대신 거액을 황실과 대신들에게 뿌렸다. 전쟁 비용보다는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한 나라를 손에 넣은 셈이다.


원군의 쇄국정책, 궁중 권력 다툼,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정쟁 같은 사사로운 분열 속에서 국가는 기둥부터 썩어갔다. 내부가 흔들리니 외세는 손쉽게 침입했다.

세계사의 수많은 약소국이 멸망한 원인을 보라.

침략보다 무서운 것은 언제나 내부 부패와 분열이다.


약 일본이 조선과 전면전을 벌였다면 어땠을까. 조선은 결코 약한 민족이 아니었고, 일본 역시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힘의 상당 부분을 소모했다면 진주만 같은 오만한 도발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을지 모른다.

1주일을 못 넘길 거라는 예상을 비웃듯이 우크라이나는 초 강대국 러시아와 전쟁을 3년째 이어가고 있는 상황을 보면, ‘저항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늘 우리는 ‘늑약이냐 조약이냐’ 같은 이름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늑약이면 어떻고 늑골인들 어떠하랴?

다시는 도둑에게 집안을 털리지 않을 힘을 갖추는 것, 그것이 훨씬 본질적인 것이다.

그 힘은 경제력이고, 군사력이자, 무엇보다 깨어 있는 국민의 안보 의식이다.


제부터라도 냉정하고 집요하게, 국가의 기반을 단단히 다지는 일이 중요하다.

1300만 명의 백성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도둑 앞에서 재물로 전락했던 그날을,

또다시 반복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해는 을사늑약 120주년이다.

120년이 지났건만, 그날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답답해진다.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기에, 잊을 수도 없기에,

오늘도 긴 한숨으로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러나 한숨 만으로는 부족하다.


120년 전의 도둑질을 다시 허용하지 않기 위해,

오늘의 우리는 위정자가 좌고우면 하지 않고 안보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지하고

국민들은 더 단단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깨어있어야 한다...


雲谷


"늑약 [勒約]

억지로 맺은 약속"(다음 단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