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_출국 전 많은 이별
육아휴직 후 중남미 생활을 위해 우리는 많은 이별을 했다.
이렇게 말하면 세속적이라고 흉 보는 이도 있겠지만, 이별을 생각하니 ‘사람’보다 ‘집’이 가장 먼저 연상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내집 마련이 평생 과업이었으니, 너무 자학할 필요도 없겠지. 우리는 신혼 살림을 5년간 내가 살았던 옥탑방에서 시작했다. 여름에는 더위를 피해,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에어컨 빵빵한 동네 어린이 도서관으로 단어 그대로 피서(더위를 피하다)를 다녔다. 구정에는 고향갔다가 상경했는데, 수도가 동파되서, 찜질방 갈 돈 아낀다며, 둘이 껴안고 냉방에서 긴긴 밤을 이겨냈다. 이 옥탑방에서 둘째가 생길 때까지 3년 가까이 있었다. 아내는 아직도 이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장인 나로서는 아내와 아이들을 쾌적하고 안전한 장소에서 생활하지 못하게 한 미안함이 아직까지도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 이런 마음 때문에 매번 떨어져던 청약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신청을 했고, 둘째가 뱃속에 자리잡았을 때, 결국 신혼부부 대상 청약에 당첨되서 지금의 집을 갖게 되었다. 컴퓨터 화면에 ‘축하합니다. 당첨되셨습니다.’라는 글을 봤을 때의 기분은 지금도 생생하다. 당첨 내용을 즉각 아내에게 알렸는데, 아내는 행복함으로 목 메어 했다.
당첨 후, 건물이 올라가는 걸 보는 건 우리 부부의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입주를 하였고, 조그만 집에서 생활하던 아이들은 30평대 아파트 거실의 넓이에 환호하며, 끝에서 끝까지 자주 뛰어다녔다. (물론 아래 층 이웃 분이 참다 못해 올라와서 항의를 하셨지.) 한비야 씨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벽에 세계지도는 물론 태양계까지 붙여, 다른 세상에 대해 도전적으로 자라도록 유도했다.
여름에도 창문을 열면 그리 덥지 않아서, 에어컨을 찾아 동네 도서관을 갈 필요가 없게 되었고, 겨울에는 동파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집에서 회사까지 자전거 도로가 있어서, 풀내음을 맡으며, 자전거로 출퇴근했고, 주말에는 아이들이 놀만한 공간이 집 주변에 넉넉해서, 놀이공원, 경마공원, 과학관, 캠핑장 등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좋은 이웃들과의 인연. 이렇게 좋은 추억으로 가득한 “우리 집”과 만 3년 생활하고 헤어지려 하니, 너무 아쉬웠다.
매 주말마다 전국 구석 구석 갔던 캠핑장과 캠핑 때마다 함께 한 우리 첫차도 그립다. (두번째도 그리움의 대상이 사람이 아니다. 다시 한번 난 세속적인 사람인가 반문하게 된다.) 매 해 그렇듯이, 구정 때 고향에서 가족이 모였다. 사촌동생이 해외지사 발령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된 경차를 내게 권했다. 여름휴가 때 빌린 적이 있었는데, 차가 없었던 우리 네 식구의 편리한 발이 되어 준 좋은 기억이 있어서 흔쾌히 구매했다. 이후 장롱면허를 가진 아내는 내게 운전연수를 받은 후, 뒷 유리창에 ‘초보’라고 청테이프를 크게 붙이고 다녔다. 아내는 조그만 마티즈를 아이들 어린이집, 마트 장보기에 유용하게 사용했다. 그 뿐인가. 전날 캠핑용품을 차에 구겨 넣어서, 금요일 퇴근하자 마자, 우리 마티즈는 캠핑장으로 향했다. 이를 본 직장 동료는 차만한 크기의 짐을 차 위에 매달고(루프백) 다닌다며 배꼽 잡고 웃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는 마티즈가 너무 불안하다고, 튼튼한 차로 바꿔 달라고, 울며 하소연했다. 우연히 둘째 어린이집 등원 길에, 앞에 가던 경차의 사고를 목격했는데, 그 사고가 아내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것이었다. 전에 접촉사고를 겪었을 때도 이러지 않았던 그녀였는데. 하지만 유튜브를 통해, 몇몇 사고를 목격하고 나서, 사안의 중대함을 깨닫고 차를 바꾸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새집을 구매한 다음 해, 새 차 ‘올란도’를 구매하게 되었다. 아내는 못생겼다고 구박했지만, 내게는 우리 가족을 지켜줄 만한 든든한 생애 첫 새 차 였다. 새 차인 만큼 우리는 정성을 쏟았다. 썬팅도 직접하고, 인터넷에서 구매한 안개등도, 후진 경보장치도, 블랙박스도 직접 달았다. 당연히 남자인 아빠가 했겠지 추측하겠지만, 이건 공대 출신인 아내 작품이다. 그렇게 우리는 전국 팔도를 안전하게 다니게 되었다. 처음 갔던 동강전망자연휴양림, 가까워서 자주 갔던 유명산 자연휴양림, 여름휴가 때 간 소백산 휴양림, 남해 편백휴양림. 부모님과 함께 간 장흥 천관산 자연휴양림, 산이 깊어서 아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청옥산 자연휴양림, 경쟁률이 세서 휴직 후 한가할 때 찾은 아세안 자연휴양림 등. 금요일 저녁 퇴근 후 휴양림으로 가서, 기분좋게 자연 속 주말을 만끽했던 추억은 아직까지도 많이 그립다.
중남미에는 아직 캠핑문화가 많이 발달되어 있지도 않고, 장비도 차량도 없어 시도 못하지만, 이 곳의 아름다운 자연을 볼 때마다 한국에서 했던 캠핑이 그리워진다. 다행히 캠핑과 함께 좋은 추억을 같이 한 첫 차의 다음 차주는 우리 부모님이다.
아내는 동네 아줌마들을 그리워 한다. 같은 어린이집에 아이를 등원시키고, 함께 마트에서 장을 보거나, 차를 마시며 수다 떨던 그녀들과의 추억. 주 5일을 만나도 헤어질 때면 항상 아쉬운 이별. 아내는 사회생활 할 때 득실을 계산하며 상대방을 만나는 자신의 모습에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겁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아내가 하는 말을 곡해하지 않고, 존중해줬다. 그런 분위기는 자신들의 이야기 보따리를 자연스럽게 풀도록 이끌었고, 음악처럼 박자가 잘 맞은 대화를 통해 아내는 혼자가 아니라는 안정감을 얻었다. 그 인연을 귀하고 감사하게 여기며, 귀국 후에도 계속 이어졌으면 하고 바란다.
사실 이별이라는 주제를 생각할 때, 대부분 부모님, 가족, 친지들을 가장 먼저 떠올리겠지만, 해외에 나와서도 곧잘 영상통화를 한 덕분인가, 아니면 혈연이여서, 언제든 다시 만날 거란 믿음 때문인가, 그렇게 애달프지 않다. 아빠, 엄마 혹시나 이글 보시고 서운하셨다면 죄송해요.
이 글을 쓰는 지금 2018년 8월. 이제 귀국까지 반년도 남지 않아서인지, 이별이라는 그림자가 많이 옅어졌다. 이제는 이별보다 만남에 다시 마음이 두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