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폭풍의 눈에서

귀인을 만나다.

by 고백맘

명절이라 큰아이가 내려왔다.

몇 년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졸업 논문 제출로 심신이 피폐해진 얼굴이었다.

씩씩한 목소리만 믿고 늘 대견하다 여겼는데,

홀로 모든 것을 버텨내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아들의 아픈 이별이 나의 이별처럼 다가와, 마음이 쓰라렸다.


피폐해진 아들의 모습 위로, 10년 전 폭풍우 한가운데를 헤매던 모습이 겹쳐왔다.


큰아이의 지독했던 사춘기, 갑자기 직장을 잃은 남편, 암 수술,

그리고 갓 태어난 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덮쳐왔던 그 막막했던 현실.


그리고 지금.

친정아버지의 치매 간병, 뿌리째 흔들리는 공부방, 작은아이의 힘든 성장통.

어쩌면 이리도 닮았을까.

10년의 세월을 두고 데칼코마니처럼 찍어낸 듯한 두 개의 폭풍우 앞에서,

다시 한번 절망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파도는 같았지만, 선장은 달라져 있었다.


10년 전, 갑작스러운 폭풍우 앞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싸우던

‘병사(兵士)’였다. 하지만 지금은 수많은 전쟁을 치러내고,

폭풍의 길을 미리 읽을 줄 아는 지혜를 갖춘 ‘선장(船長)’이 되어 있었다.



10년 전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던 평범한 엄마였고,

치열한 희생을 통해 가정을 지키는 ‘수호자’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안에서부터 질문이 바뀌어 있었다.

과거처럼 “어떻게 버텨야 하나?”가 아닌,

“이 마지막 폭풍의 한가운데서, 무엇을 기록해야 하는가?”

“이 경험을 통해, 세상의 수많은 ‘10년 전의 나’에게 어떤 등불을 비춰줄 수 있을까?”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날 밤의 끔찍했던 사고는 주저앉히기 위함이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거대한 ‘운명의 문’이었다.


그 문을 통해 하늘이 속삭이고 있었다.

깊은 상처를 진솔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이겨낸 지혜를 글로 풀어내어,

상처 입은 다른 영혼들의 길을 비추라고.

그동안 운영했던 공부방은 기나긴 ‘겨울’ 시절, 모진 비바람을 피하고자

급히 지은 집이었다. 그 집의 기둥은 ‘희생’이었고, 벽은 ‘상처’였으며,

지붕은 ‘억울함’이었다.

그 차가운 집에서 지난 10여 년을 버텨왔다.

그래도, 그곳에서 서로의 온기로 시린 계절을 함께 보낸 아이들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이제 운명의 봄이 오려나 보다.

따스한 봄볕이 드니, 낡고 추웠던 겨울의 집이 허물어져 내리고 있다.

아이들이 떠나가고 오해와 구설에 시달리는 것은,

낡은 집을 허무는 ‘인연의 바람’이었다.



서랍 몇 개를 정리하는 것이 아닌, 집 자체를 허무는 거대한 정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낡은 것이 완전히 무너져야, 그 자리에 비로소 새로운 것을 지을 수 있음을.

이 운명의 철거를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껏 하늘은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그 혹독한 외로움 속에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로 인해 누구보다 강인해졌다.

매일 애타게 찾았던

“나의 귀인은 언제 오나요?”라는 물음의 답을,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귀인이란 어둠 속에서 건져주는 동아줄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평생 그 동아줄에 매달려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 헤맸을 것이다.

그런 동아줄은 내 인생에 없었다.



귀인이란, 내 안의 태양이 떠올랐을 때 그 빛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거울과 같은 존재.

“나를 발견해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

그것은 겨울의 마음이었다.



이제는 봄의 마음을 내어야 할 때다.

“내가 피어나면, 나비는 저절로 찾아온다.”


자신의 상처를 보듬고 귀하게 여기기 시작할 때,

남의 평가가 아닌 자신의 가치를 믿기 시작할 때,

더 이상 구걸하지 않고 당당하게 몫을 이야기할 때.



세상은 그 변화된 기운을 먼저 알아차리고 함께 길을 갈 동반자를 보내줄 것이다.

그들은 구원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혹독한 겨울을 홀로 견뎌내고

마침내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와 함께하기 위해 찾아오는 것이다.


이제야, 나 자신을 가장 귀한 손님으로 대하고 맞이해야 할 때임을 깨닫는다.

무너져 내린 운명의 폐허 속에서,

마침내 나의 귀인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