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귀인들
어제와는 다른 세상이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눈 부신 해가 땅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캄캄한 절망 속에서, 나는 단 하나의 약속을 붙들고 새벽을 기다렸다.
사춘기의 무기력증을 앓던 아이.
오늘, 다시 돌아오기로 약속한 아이.
나는 그 아이를 위해, 이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마지막 촛불이고 싶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맞은편 동에 사는 학부모였다.
두려운 마음으로 전화기를 들었지만, 수
화기 너머에서는 “괜찮으시냐”는 안부를 묻는 따뜻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억지로 참아왔던 설움,
누구에게도 말 못 했던 억울함,
홀로 감당해야 했던 그 밤의 공포.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녹아내렸다.
그토록 기다리던 귀인은, 대단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돌아오겠다 약속한 아이의 발걸음으로,
그리고 나의 아픔을 알아주는 이웃의 따뜻한 목소리로,
새로운 세상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난 고통스러운 밤을 통과하며 과거의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고
낡은 인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 아침의 울음은 과거의 세상에 보내는 마지막
작별인사였고, 새로운 인연들을 맞이하는 거룩한 세례였다.
그날의 사건을 공부방 전체에 알려야 될지 고민하며 몇 명 엄마들에게
전했지만,
“굳이 얘기 안 하셔도 된다.”라고 위로를 전하는 사람들을 보며 살 희망을 품었다.
나의 처절했던 질문,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 겁니까?”요 대한 하늘의 첫 번째 답장이 들리는 듯했다.
“너의 과거는 그 밤으로 모두 정화되었다. 더 이상 그 끔찍한 기억을 짊어지고
설명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 너의 죄가 아니니, 죄인처럼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 이제 너의 자리에서, 소명을 다하면 된다.”
그 사건은 인생에 덧씌워진 굴레가 아니라,
과거의 모든 악업을 태워버린 불꽃이었다.
평생을 기다려도 만나기 힘든 것이 나를 알아주는 ‘귀인’이라 했건만.
그 가장 깊은 절망의 아침에 여러 명의 ‘귀인’을 만났다.
다시 돌아오기로 한 아이.
나의 안부를 먼저 물어준 학부모.
과거를 묻지 않아도 된다고 면죄부를 준 사람들.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지인들.
문 앞에 몰래 놓여 있던 따뜻한 음식들.
그리고 눌러쓴 손편지들….
끔찍했던 밤.
절망의 아침, 그리고 위로를 건네는 사람들.
그들은 내 안에서 재가 되어 시들어가던 희망의 불씨를,
자신들의 따뜻한 입김으로 되살려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깨달았다.
그토록 찾아 헤맨 마지막 귀인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내가 나를 살려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