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너머 있을 비단옷

내가 옷을 만들면서 하는 생각들.

by 고백

오늘은 뭘 만들까? 드르륵 내 원단을 모아둔 서랍을 열어서 원단들을 매만져본다. 면원단이 손에 걸린다. 능직의 사선이 보이면서 가볍고 부드러운 원단이다. 약간의 광택도 있어서 은은하게 색이 반짝인다. 원단을 펼쳐 양손에 쥐고 만세를 하며 원단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침 바람이 불어온다. 원단이 바람에 흔들린다. 내 머릿속에서 발목길이의 플레어스커트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바람이 마치 나에게 스커트를 만들라 말을 건네는 듯하다.


마네킹을 바르게 세워두고, 기다란 직사각형 원단으로 부드럽게 마네킹을 감싼다. 원단이 바르게 섰는지 한 발짝 떨어져 확인해 보자. 마네킹의 중심과 원단의 사선이 조화를 이루는지 확인해 보면 된다. 사선이 바르게 내려온다면 앞중심 선을 먼저 핀으로 고정한다. 이름 그대로 중심선이니깐 단단히 고정해야 한다. 그러면 이제 허리선을 만들 차례이다. 원단을 부드럽게 허리에 감싸도록 하자. 탕. 가위가 맞물린다. 앞중심에서 5센티 떨어진 지점에 가위밥을 자른다. 그리고 가위밥 끝을 핀으로 고정하면 원단이 허리를 따라서 부드럽게 붙는다. 원단이 입체로 변하는 순간이다. 허리선이 물꼬를 텄겠다. 이제 플레어를 만들자. 원단을 옆선으로부터 핀이 꽂힌 지점까지 끌고 온다. 그러면 첫 번째 플레어가 생긴다. 두 번째 플레어도 5센티가 떨어진 곳에 만들어준다. 플레어가 같은 양으로 허리 전반의 같은 비율에 고르게 위치하도록 해준다.


얼추 스커트의 형태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재밌는 시간이다. 불필요한 천 잘라내기. 마치 붕어빵 부스러기를 야금야금 떼어먹는 것처럼 불필요한 천들을 야금야금 잘라내야 한다. 가위로 원단을 조각해 형태를 더 구체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잘려나간 천들이 툭툭 바닥으로 떨어진다. 두근두근. 떨어진 천 조각들이 바닥에 쌓여갈수록 스커트는 내 머릿속 이미지와 닮아간다. 하지만 아무리 신이나도 가위질은 조심히 해야 한다. 잘못 자른 원단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스커트가 나왔다. 완성되어 마네킹에 걸린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바람이 다시 불어온다. 바람은 스커트 주변을 머물면서 계속 스커트를 흔들어 놓는다. 고작 천이 흔들리는 것인데, 옷자락이 일렁이는 모습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방 안은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작게 퍼진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바람이 들어온 창 너머 하늘에는 구름이 종종 떠있다. 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더 큰 하늘을 내다본다. 근데 어째 내 작업실의 바닥과 하늘의 모습이 닮아 있다. 하얗게 흩어진 구름들이 마치 내 작업실 바닥에 흩어진 원단 조각 같다. 눈을 내려주던 선녀님이 오늘은 옷을 만들었나 보다. 흩어진 조각들을 맞춰보니 하얀 비단옷인 것 같다. 비단 조각들이 모이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하늘 끝이 붉게 물들어 있다.


저 노을을 쫓아가면 무엇이 있을까? 아마 밤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쫓아가보고 싶다. 어쩌면 운이 좋아서 귀한 비단옷을 볼지도 모르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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