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아이의 가을(2022.09-2022.11)
다시금 깨닫다
벽보고 말을 하는 느낌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말은 하지 못해도 이름은 알아들을 수 있는 무렵에도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엄마를 보지 않았다. 한 대여섯 번은 불러야 내 얼굴을 바라봐 주었다. OO야, 엄마 봐봐. 엄마 여기 있어. 동영상 속 내가 아이를 애타게 부른다. 엄마가 어떤 기분인지 아이가 내 얼굴을 확인하는 일 따위, 나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다. 가끔은 다정다감한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아이를 키우면 어떤 기분일까? 그랬으면 아이를 더 사랑했을까?
가끔은 아이가 하나라 다행이라 믿었다. 형제든 남매든 내 아이가 누군가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을 테니. 나는 있지도 않은 아이를 두고 상념에 젖는다. 내가 만약 아이가 하나 더 있었다면, 우리가 좀 다른 생활을 했을까? 나는 더 행복했을까 아니면 더 불행했을까?
나는 여덟 살 아이를 여전히 쫓아다닌다. 킥보드를 타고 저 멀리 간 아이는 나를 보지 않는다. OO야, 거기 잠깐 기다려봐. 내 말은 아이에게 닿지 않는다. 대신 아이와 함께 놀던 친구가 나와 보폭을 맞춘다. 나는 그 친구와 얘기를 나눈다. 내 아이는 이미 저만치 멀어져 가는데, 아이의 친구는 내 옆에서 함께 걷고 있다. 내가 아이와 하는 일상적인 대화보다 더 긴 대화를 한다. 이런 거구나. 이 나이 또래 아이들과 얘기를 한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내 말이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아직 여덟 살 아이니까 자기 생각만 할 때도 있고 동문서답을 할 때도 많지만 나는 안다. 이런 대화는 내 아이와 하기 힘들다는 것. 나는 내 아이와 얘기할 때 가끔 진이 빠진다.
여러 명의 친구와 놀이터에 함께 있더라도 아이는 자꾸 무리에서 겉돈다. 친구들이 공놀이를 하면 공놀이가 하기 싫다며 다른 곳으로 나온다. 그러면서 친구들은 왜 저기 있냐며 내게 볼멘소리를 한다.
"네가 친구들과 놀고 싶으면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아이는 그곳으로 가려다 제자리로 돌아온다. 친구들은 몇 분 더 놀기 위해 엄마와 애타게 협상 중인데, 내 아이는 이미 내 옆에 서성거리며 서 있다.
"집에 가자."
놀이터에서 가장 먼저 나서는 것은 대부분 나와 아이다. 이런 아이를 보며 속상함을 느끼는 건 여전히 현실 인식을 제대로 못하는 엄마의 욕심이겠지.
나는 눈치를 많이 살피던 아이었다.
이건 내 기준이고 가족들은 나를 공주병 걸린, 지 잘난 맛에 사는 아이로 여겼다. 며칠 전 세 살 터울 오빠가 이런 말을 했다. 너도 오래도록 만난 친구가 있어? 어느 정도 농담이 섞인 발언이었지만 오빠가 갖고 있는 내 이미지다.
"쟤는 지보다 못난 애들하고만 친하다니까."
이건 학창 시절 엄마가 누군가와 얘기하며 남긴 말이다. 누가 잘났고 누가 못났는지 판단하기 힘들지만, 솔직히 엄마 말이 맞았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나는 나보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과 잘 어울렸다. 성적이 비슷한 아이들과는 늘 경쟁하듯 다녔고 혹시 친구의 성적이 급상승하면 그 아이를 시샘했다. 자연히 우리는 서로 멀어졌다.
조금 더 자랄수록 성적 외에 다른 것들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외모와 인기와 집안 사정을 보았다. 그중에도 재능을 꽃피우는 아이들을 미워했다. 한때 작가가 되고 싶은, 문학소녀였던 나는 글 잘 쓰는 아이를 질투했다. 글 쓰는 재주는 노력한다고 바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서 학창 시절 내내 글 잘 쓰는 아이에 대한 부러움을 안고 살았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나만의 콤플렉스. 단 하나 내가 가장 잘하는 건 그런 감정을 누구보다 잘 감춘다는 거였다. 어느 누구도 내 속의 붉은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눈에 띄지 않는, 얌전한 아이었다.
어떤 점에서는 내 아이도 나와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아이는 자신이 넘볼 수 없을 만큼 강한 리더십을 가진 아이와 놀거나 정반대로 만만하다 싶은 상대와 잘 어울린다. 전자는 체념이고 후자는 오만일까? 당연하게도 전자보다 후자의 경우 잡음이 더 잘 생긴다. 아이는 만만한 상대를 자꾸 제압하려고 한다. 이건 내가 더 잘해. 넌 이거 못하지? 자신의 우월함을 상대에게 드러내고 싶은 거겠지.
나는 아이에게 서로 다른 거라며,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 비교하는 게 아니라고 가르쳐 주지만 나도 잘 알고 있다. 지금도 내 마음속에는 내 아이와 또래 아이들을 저울질 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내 아이가 잘난 아이가 되길 바라는 경쟁심 강한 엄마다.
너를 탓하지 않겠다.
너는 나를 참 많이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