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영은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방 안의 책장과 장롱 서랍들이 전부 열려 있었다. 이윽고 그는 구석에서 잡동사니가 담긴 바구니 하나를 찾아냈다. 슬레이트와 가면, 손 모형과 가짜 머리카락 따위가 들어있었다. 영화 촬영 소품으로 보이는 물건들이었다. 찬영은 바구니 속 물건들을 뒤적거렸다.
"아, 여기 있네."
그는 작은 플라스틱 통 하나를 찾아내 집어 들었다. 물병 모양의 용기 안에는 검붉은 색 액체가 반쯤 담겨있었다. 대학 시절 단편영화를 촬영할 때 쓰다 남은 가짜 피였다. 찬영은 손가락으로 용기를 꾹꾹 눌러보며 점도를 확인했다. 너무 오래돼서 딱딱한 상태였다.
찬영은 뚜껑을 열고 물을 부었다. 굳어 있던 액체가 풀어지며 조금 묽어졌다. 그는 병을 누르고 흔들어 가짜 피를 부드럽게 용해시키려 했다. 아무래도 쉽지 않았다. 나무젓가락을 넣어 세게 뒤섞자 그제야 실제 피와 비슷한 상태로 돌아왔다.
찬영은 거실로 나왔다. 이번엔 빨래바구니를 뒤질 차례였다. 얼마 되지 않는 빨랫감들을 휘저어 봐도 찾는 옷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빨아 버렸나? 찬영은 불안해졌다.
"엄마, 오늘 빨래 돌렸어?"
찬영은 안방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방에서 나오며 대답했다.
"안 돌렸는데, 왜? 너 뭐 해?"
"어제 벗어놓은 옷 어디 있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 시키야. 빨려고 내놓은 옷은 왜 찾어?"
주머니에 돈 넣어 놨어. 찬영은 순간적으로 핑계를 대려다 멈칫했다. 매번 거짓말로 둘러대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뱉으려던 말을 도로 삼키고 씁쓸한 발걸음으로 베란다로 향했다.
세탁기 뚜껑을 열어 안을 살펴본 찬영이 그제야 안심했다. 그는 세탁기에서 티셔츠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전날 귀가 후 벗어놓은 옷이었다. 군데군데 묻은 핏자국이 까맣게 변색돼 굳어 있었다. 찬영은 킁킁 냄새를 맡아보더니 입고 있던 상의를 벗고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냄새나게 그걸 왜 도로 입어? 옷 없어?"
"아니야. 신경 좀 쓰지 마, 엄마는."
찬영은 뒤도 안 돌아보고 쌩하니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아들의 뒷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술 퍼먹고 어디서 자빠져 오더니 머리가 해까닥 해버렸나? 그녀는 찬영이 헤집어놓은 빨래바구니를 정리했다. 피 묻은 베갯잇이 보였다.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쓰러운 것도 잠시였다. 그녀는 아들의 방을 보고 치미는 짜증을 억눌렀다. 물건을 찾느라 내팽개쳐놓은 잡동사니들이며 가짜 피가 묻은 나무젓가락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아까 전보다 한층 더 난장판이 된 상태였다.
"이런 빌어먹을 놈에 시키… 어휴, 앓느니 죽지."
어머니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찬영의 방을 직접 정리하기 시작했다.
찬영은 핸드폰 손전등으로 바닥을 비춰보고 있었다. 전날 밤 미끄러져 넘어진 곳을 찾고 있었다. 분명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중얼대던 그는 잠시 후 조그맣게 남아있는 검붉은 흔적을 발견했다. 행인들이 밟고 지나다닌 탓에 흐릿해져 있었지만 분명 핏자국이었다. 찬영이 머리를 부딪힌 자리가 분명했다.
찬영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바로 뒤쪽 골목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방범용 CCTV가 하나 달려있었다. 하지만 사고 자리는 육교 계단 아래 그늘진 곳이었다. 카메라 화각이 닿지 않을 듯했다. 찬영의 감으론 사각지대일 가능성이 높았다. 설마 찍혔을까? 찬영은 불안한 마음에 반경 수 미터를 서성이며 꼼꼼히 살펴봤다. 넘어진 자리를 찍었을 만한 카메라는 보이지 않았다.
"운이 좋은 건지 뭔지…."
찬영은 품에서 조심조심 가짜 피가 든 플라스틱 통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좌우를 살펴보며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지 재차 확인했다. 아무도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찬영은 뚜껑을 연 뒤 핏자국 주변에 조심조심 가짜 피를 부었다.
"살다 살다 진짜…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찬영은 검붉은 액체로 물든 자리르 발로 밟고 비벼서 번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주변에 점점이 튄 것처럼 보이도록 남은 내용물을 흩뿌렸다. 그는 뒤로 조금 물러선 뒤 가짜 사건 현장을 살펴봤다. 진짜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찬영은 고개를 들어 망연히 하늘을 바라봤다. 차라리 비라도 와서 다 씻겨 없어졌으면 좋으련만. 그러더니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로 범행 현장을 촬영했다. 사진으로 보니 오히려 조금 더 사실감 있어 보였다. 이 정도면 경찰에게 보여줄 자료로는 충분했다. 그는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열어 가까운 경찰서를 검색했다.
그때 화면에 수신 알림이 울렸다. '유세라 PD님'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오빠, 결정했어?"
여전히 반말이었다. 그녀는 아직 술도 깨지 않은 상태였다.
두 시간도 안 됐는데 대뜸 결정했냐니. 찬영은 이 거머리 같은 방송꾼 무리가 지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연교네 국장님이랑도 얘기했는데 엄청 긍정적이래! 인터뷰만 오케이 하면 보도팀 꾸려준다고."
찬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싫다는데 왜 자꾸 이러니, 대체. 그들은 찬영의 의사 따위에는 단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 그 와중에 허락은 왜 자꾸 구하는 건가. 어차피 멋대로 진행할 거면서. 깨진 뒤통수 보다 스트레스로 인한 편두통이 더 죽을 맛이었다. 찬영은 지끈대는 머리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일 크게 만들기 싫어서요. 혹시 엄마라도 아시게 되면…"
"엄마 아직 모르셔? 얘기 안 했어?"
그녀가 또 득달 같이 말을 끊어 먹었다. 얘기는 무슨. 술 취해서 길바닥에 자빠진 거 엄마가 뻔히 다 아는데. 찬영은 고민하다가 또 거짓말을 추가했다.
"충격받으실까 봐 말 못 했어요. 엄마 요즘 몸도 안 좋으셔서…"
"신상은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할 테니까 모르실 거야! 좀만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고 인터뷰 시간 정해서 연락 줘!"
전화가 끊겼다. 결국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찬영의 의사와 상관없이 보도는 독단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찬영은 울적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0분 뒤, 찬영은 가파른 주택가 골목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핸드폰 지도로 틈틈이 방향을 확인했다.
"아니, 무슨 경찰서를 숨겨놨나… 어디야, 도대체."
언덕을 한참 더 걸어 오르자 마침내 칙칙한 회색 건물이 나타났다. 파란색 간판에는 '경기수원 중부경찰서 인계파출소'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찬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유리문을 밀고 쭈뼛대며 파출소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