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제 더 이상 소년/소녀가 아니에요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보곤 했다. 남태평양, 아프리카의 원시부족의 성인식이야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어두운 밀림 안의 폐가에서 혼자 하룻밤을 지낸다거나, 달려오는 소를 뛰어넘어야 한다거나, 할례를 한다거나 하는 성인식의식은 저 먼 땅의 시청자들을 채널고정하게 만든다.
성인식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시기에 그 사회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여지는 의식이다.
이러한 성인식은 비단 아프리카와 남태평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2025년의 유럽에도 성인식은 존재한다.
유럽 대다수의 가톨릭국가, 이탈리아, 벨기에, 프랑스,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 폴란드, 오스트리아와 같은 나라들에는 이러한 성인식이 있다. 가톨릭 전통에 입각해,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 사회와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의식은 네덜란드어로는 Tweede Communie (혹은 vormsel), 라틴어로는 Conformatio라고 한다. 보통은 12살에서 15살경에 이루어진다.
이러한 가톨릭중심의 성인식은 세례를 받은 아이들만이 할 수 있고 교리공부도 병행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다. 종교는 인생을 살아가는 신념과 원칙으로 생각해, 아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유아의 나이에 세례를 주고 싶지 않았고, 현재까지도 세례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도 다 하는 성인식을 안 하기엔, 그것이 쪼끔 걸린다. 유럽 가톨릭국가의 아이들에게 이것은 매우 큰 행사이자,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날이다. 해서, 우리는 종교색을 빼고, 우리만의 방식으로 아이의 성인식을 열어주기로 했다. 의식의 이름은 가톨릭식이 아닌, Groeifeest, 성장파티로 말이다. 성장파티의 주인공은 첫째뿐만 아니라, 둘째도 함께였다.
성인식 행사는 마냥 먹고 놀고 케이크를 잘라먹고 땡이 아니다. 일가친척, 친구와 이웃을 포함한 아이가 이 만큼 크는데 도움을 준 수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덕분에 우리 아이가 이 만큼 컸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그날 하루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참석자들은 아이들이 버킷리스트로 꿈꾸고 있는 것을 이루거나, 무언가 꼭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쓰라고 돈을 주거나, 선물을 준비한다.
우리나라의 돌잔치와 비슷한 느낌이다. 다만 아이가 아장아장 걷는 나이가 아니라 코밑의 솜털이 진해지는 시기인 것이 다를 뿐.
지난주, 아들들의 성장파티를 치렀다.
대략 40명 정도의 일가친척과 아이의 친구들, 그 친구들의 엄마들, 내 친구와 베짱이의 친구들, 그리고 이웃집까지 초대를 했다.
샴페인과, 와인, 안주거리와 케이크로 간단히 대접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한국여자다. 손님이 오는데 밥도 대접 안 하고 그냥 집에 가라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그런데 장소를 섭외해 케이터링까지 외부에 신청하기엔 엄청난 돈이 든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잘하는 것으로 승부를 보기로 했다.
그것이 무엇이냐,
소처럼 일하는 것이다.
돈을 체력과 맞바꾸는 것이다.
40명을 초대했는데, 입맛도 각기 다 다르다. 어떤 이는 채식주의자, 어떤 이는 매운 것을 못 먹고, 어떤 이는 마늘을 안 먹고 가지가지다. 그래서, 나는 허리가 끊어지도록 일을 하여, 40인분의 토마토스파게티소스 두 종류- 한국식 고추장을 넣은 퓨전 고추장파스타소스와 클래식 스파게티 소스를 만들고, 토마토 미트볼과 채식주의자를 위한 밀고기볶음을 만들었다.
파티전날 그 많은 소스와 음식을 만들고, 파티 당일아침에는 와플을 구웠다. 한국사람은 손님이 배고파서 집에 가는 꼴을 못 본다. 한국인이 하는 잔치에 가면 토할 때까지 먹고 오는 것이 원칙이오.

파티장소는 집 근처의 스카우트 모임장소를 빌렸다. 아이가 아기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라 온 과정을 담은 사진들을 벽에 쭉 붙였다. 책상과 의자도 다 닦고, 그 위에 종이를 깔았다. 테이블 세팅도 직접 한다. 케이터링을 불렀으면 쉬웠겠으나, 내 한 달 월급을 케이터링에 갔다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돈을 아끼려면 체력을 갈아 넣어야 한다.
손님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샴페인을 한잔씩 들고 오순도순 이야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도 알아가고 화기애애하다.
하지만 이렇게 끝나면 싱겁지 않겠는가. 그냥 먹고 수다만 떠는 것은 오늘이 아니어도 할 수 있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 주었다. 둘째는 역시 베짱이 주니어라 그런지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당부하는 말들을 들려주는 엄마 아빠를 보며, 감동을 받아 격해진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다.
행복해서 우는 거면 얼마든지 울어도 된다, 아들!
그리고 오늘 본인들을 위해 특별히 시간을 내 이곳까지 와 준 초대손님들을 위해, 1호와 2호가 베짱이와 빡세게 함께 연습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Love Me Tender"를 연주했다. 손님들을 위한 작은 콘서트였다.
1호 호른
2호 드럼
베짱이 키보드
엄마는 40인분 밥 했으니 됐지 않니?
손님들을 위해 열심히 연습해 멋지게 공연을 마친 아들들과 베짱이를 보며 뿌듯했다.
이제 공연도 했고, 술도 좀 들어갔으니 출출할 것 같아 스파게티도 끓이고, 해 온 음식을 데워 테이블에 놓는다. 맛 좀 보시라고 직접 담근 김치도 옆에 두었다.
역시 요즘은 한국이 대세다.
K만 들어가면 좋아 죽는다.
고추장과 간장, 토마토소스를 넣고 만든 한국식 토마토소스가 클래식 토마토소스보다 인기가 더 좋았고, 김치도 듬뿍듬뿍 퍼다 먹는 손님들을 보며 허리가 끊어져라 일한 것이 다 잊히며 뿌듯했다.
이걸 과연 다 먹을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만들어 온 엄청난 양의 미트볼도 완판 되었다.
역시 한국인은 복스럽게 먹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잘 먹으니 내 기분도 좋다.
이제 지옥의 40인분 설거지만 남았다.

스카우트가 사용하는 장소라 식기세척기가 없다. 임대료가 매우 저렴했으니 불평은 하지 않겠다.
오늘 허리 한번 다시 끊어져 봅시다! 이걸 어쩌면 좋나, 한숨이 나오려는데 의리로 똘똘 뭉친 아들 반 친구들의 엄마들이 설거지를 자처한다. 감동이다. 그냥 갈 수도 있었는데, 끝까지 남아 손님인데도 함께 치우는 것을 도와주어 정리정돈도 빛의 속도로 끝났다.
오늘 내 아이들의 성장파티, 성인식은 비단 아이들에게만 중요한 행사가 아니었다. 내가 17년간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며 만들어 온 수많은 인연, 시댁식구들, 친구들, 이웃과 원래는 아들친구의 엄마였지만 이제는 내 친구도 되어버린 좋은 사람들이 함께 해 주어서 아이들 뿐만 아니라 나 또한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고 너무나도 감사하고 행복한 하루였다.
아이들도 오늘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둘째가 속삭인다.
"엄마, 나 오늘 정말 행복했어."라고...
17년 전의 아무것도 모르던 24살의 갓 결혼한 새색시가 지구 반대편의 나라에서 지금은 아이 둘의 엄마가 되었고, 누군가의 좋은 이웃, 좋은 친구가 되었고 여전히 사랑받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만약 17년 전으로 돌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해 울고 있던 나에게 가서 말해 줄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말도 안 통하는 이 낯선 나라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니 막막하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너는 잘할 수 있어. 너는 이곳에서도 사랑받는 행복한 사람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