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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 국어를 하면 생기는 일

흥미진진하고 새로움이 가득

by 고추장와플

저는 어릴 적부터 퇴마록의 광팬이었고, 그 책에서 어떤 언어라도 10시간 정도 공부하면 기본은 할 수 있는 통역사 연희라는 인물에 대해 크게 영감을 받았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미친 듯이 공부를 해서 똭 내렸더니 그 언어를 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물론 소설이기에 뻥이 크게 섞여있겠지만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죠. 하지만 저는 범인,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녀처럼 비행기에서 공부한다고 그 나라 말이 술술 나오면 그게 사람입니까?

공부는 안 하고 미친 듯이 읽었던 퇴마록, 최신 애니판까지 감상한 찐 팬입니다

저는 영어학을 전공했고, 그 이후에는 교육대학원에서 영어교육학을 전공한 뒤, 벨기에로 이민을 가서 울며 겨자 먹기로 네덜란드어를 공부하였고, 이 망할 놈의 나라가 프랑스어도 쓰는 나라이기 때문에 프랑스어도 대충 읽고 쓰고, 죽지 않을 정도로 배웠습니다. 이탈리아 여행을 갔다, 이탈리아에 빠져들어 이탈리아어도 2년간 배웠습니다.


모두가 동일한 레벨로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여차저차해서 도합 5개 국어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언어 간의 유사성으로 어떤 언어는 특별히 공부하지 않아도 콩고물처럼 떨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네덜란드어와 독일어의 유사성은 단어와 문법을 포함하여 70%의 유사성을 보입니다. 발음이 조금 다르긴 해도, 독일어로 된 문장을 읽으면 대충 뭔 소리인지 파악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도서관에서 일을 할 때도, 독일어로 된 책을 다루어야 할 일이 많이 있는데 이때에도 네덜란드어만 하여도 사실 제가 말을 하지 않고 단순히 읽고 이해만 해야 하면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나는 독일어를 하지 못한다를 네덜란드어와 독일어로 적어보겠습니다.


"Ik spreek geen Duits" 익 스프렉 더이츠

"Ich spreche kein Deutsch." 이히 슈프렉 카인 도이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어느 나라 말의 사투리와 표준어 정도로 비슷합니다. 물론 모든 단어와 모든 문장이 위와 같이 비슷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비슷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어는 스페인어, 프랑스어와 상당히 유사하여 스페인 여행을 가거나 텍스트를 읽어야 할 경우 완벽하게 다 이해를 할 수는 없지만 대략 요점정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의 유사성은 80% 이상입니다. 같은 라틴계열 언어라지만 포르투갈어부터는 좀 힘들어집니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유사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탈리아어-포르투갈어의 유사성으로 이득을 얻는 것은 원어민에게는 가능하겠지만 저에게는 어렵습니다.


언어 간의 유사성이 타 외국어 습득에 끼치는 영향은 유사성이 높은 언어들을 제가 실제로 공부했을 때, 기초지식이 없는 상태로 시작하는 것보다 70-80프로 빨리 습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네덜란드어를 배울 때도 영어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영어를 거치지 않고 네덜란드어를 바로 배웠더라면 죽도록 힘들었겠지요. 물론 네덜란드어를 배우는 과정 그 자체로도 충분히 힘들었습니다만, 같은 게르만어인 영어에서 습득된 문법지식을 네덜란드어에 응용하여 조금은 덜 힘들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언어와 언어 간 유사성으로 인해 이득을 볼 수 있는 언어까지 포함하여 결론적으로 영어, 네덜란드어, 이탈리아어, 한국어, 프랑스어 이외 아프리칸스어(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보어인들이 쓰는 언어), 독일어, 스페인어까지 포함하여 대략 8개 정도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다개국어를 하는 폴리글롯(polyglot)이 되고 나니 많은 장점들이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지금은 벨기에의 총리가 된 벨기에의 정치인이자 전 시장, Bart De Wever님을 포함한 벨기에의 정재계 인사들과 함께 경제사절단으로 한국에 가서 언론과의 인터뷰도 하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앤트워프의 다이아몬드 갈라행사에서 다이아몬드협회 회장의 연설을 통역할 기회도 얻게 되었습니다. 소천하신 전 서울시장 박원순 서울시장님도 뵙게 될 기회도 얻게 되었고요. 저는 벨기에를 대표하는 경제사절단 측에 앉아 벨기에 대표단의 일부로서 대표단 측의 귀와 입이 되었지요. 제가 한국어를 하고, 네덜란드어를 했기에 이런 기회가 저에게 찾아온 것이겠지요. 대단한 분들을 가까이서 뵐 수 있는 기회에 감사했습니다. 시장님의 수행통역을 하였는데, 그분은 우파정당 소속이기에 사실 제 정치적인 신념과는 맞지 않아 꺼려했던 분이었음에도, 가까이서 지켜보니 정치적인 신념과는 별개로 정말로 배울 점이 많은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벨기에에서 한국까지 먼 거리를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싼 이코노미 클래스를 타고 모두와 함께 낑겨서 아주 좁게 왔습니다. 저는 시장님 수행통역하면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는데 시장님도 좁아터진 이코노미좌석에 앉는데 어딜 제가 감히... 이런 분이기에 벨기에의 총리의 자리까지 오르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현 벨기에 총리 Bart De Wever과 고 박원순 시장의 대담
전 세계 일짱 앤트워프다이아몬드 협회 서울 갈라디너 통역


그리고 또 다른 장점은 인간관계의 폭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팽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어가 좋아서 시작한 이탈리아어 공부로 저는 이탈리아에 사는 진짜 이탈리아인들과 친구가 되어 한국도 여행하고 인생네컷 부스에서 유치한 사진도 찍어보고, 야심한 시각에 길에서 파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김치만두를 야식으로 먹는 백미도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 밀라노에 사는 친구네 집에 방문해서는 한국요리를 알려주겠다고 나서서 등갈비찜을 만들어 주었더니 동네사람들이 다 와서 구경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 로마에 사는 구독자분들에게도 낯설지 않으실 벨루치언니의 어머님댁에서 며칠 간 배가 터질 정도로 먹으며 지내는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에 사는 친구의 이탈리아어만 가능하신 어머님과도 영상통화로, "빨리 놀러 오렴, 내가 밥 또 해줄게. 다음에는 애들도 데리고 와."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제가 이탈리아어를 취미로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겠지요.

밀라노에 사는 이탈리아 친구네 집에 가서 등갈비찜을 해 주는 모습
그 소식을 듣고 한 걸음에 구경하러 달려온 동네 사람들
야식으로 낙산공원 근처에서 김치만두 사먹기, 나이는 잊고 찍은 인생네컷
갈 때마다 음식을 더 못 먹여서 안타까워하시는 로마 벨루치언니의 어머님과의 영상통화

또한 접할 수 있는 정보의 폭도 매우 넓어집니다. 전 세계의 모든 정보들을 수치로 환산해 보았을 때 한국어로 된 정보는 단 0.5%에 불과합니다. 영어로 된 정보는 세계 정보의 55-60% 정도로 추정됩니다. 깊은 학문을 다루는 학술논문도 90% 이상이 영어로 되어있습니다. 영어, 네덜란드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까지 포함을 시키면 해당지역과 해당 언어를 쓰는 구식민지지역 정보까지 포함한 70-72%를 커버가능합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정보들을 다 알아내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차이입니다. 정보를 선택하여 그 정보를 얻고자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키를 제가 쥐고 있다는 것은 정보의 액세스만 있다면 제 것이 될 수도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을 가진 것이니까요. 제가 매번 참석하는 문헌정보 컨퍼런스는 전 세계에서 발제자가 오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2개 국어로 진행됩니다. 어떠한 컨텐츠는 영어로 진행되고, 또 다른 컨텐츠는 네덜란드어로 진행이 되지요. 외국어를 여러 개 할 수 있다는 것 덕분에 제가 더 주체적이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네덜란드와 영어로 진행되는 컨퍼런스에서 동료들과, 여전히 나잇값 못하고 찍은 컨퍼런스 기념 벨기에판 인생 세컷


다른 언어들을 배워가면 배워갈수록 저는 그 속에서 자유로움을 얻었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것,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조금 더 쉽게 할 수 있었지요. 앞으로도 다른 언어를 배우는 저의 여정은 계속될 예정입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의 정보를 조금 더 쉽게 내 것으로 만드는 다개국어자의 삶은 매일매일 신기한 것들을 접하고,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는 흥미진진한 삶입니다. 앞으로도 흥미진진한 새로움으로 가득한 삶이 지속되길 바라며 지금까지 고추장와플이었습니다. 안녀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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