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대륙을 대 횡단 후 내 손에 들어오다
최근에 필명 미친 PD로 브런치에서 활동하시는 이석재 PD님께서 출간 소식을 전했다.
영화로 만나는 우리들의 슈퍼스타, 이석재 지음, 북오션(2025)
브런치에 올라온 표지를 선택 투표에도 참여했던 터라 궁금했다. 브런치에서 많은 작가님들이 서점에 놓여있는 책을 사진으로 올렸고, 서평을 남겼다. 부러웠다. '나도 서점에 가서 책을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라고 생각하며 언제가 될지 모르는 한국방문을 기약하며 기다리고 있던 차, 한국에 간다는 친구이야기를 듣고 이 때가 기회다 싶었다. 그래서 옆 나라인 네덜란드에 사는 친구의 본가로 배송을 시켰고 그 친구가 돌아와 다시 벨기에의 겐트(Gent)에 사는 다른 친구에게 전해 주었다. 그렇게 서울-네덜란드-벨기에 겐트- 내가 사는 도시인 벨기에 앤트워프(Antwerp)의 긴 여정을 거친 책을 받아보게 되었다.
개인적인 사연으로 남편 가족의 집에서 얹혀살며 남의 집 세탁기 쓰기 싫어 간 벨기에의 빙굴빙굴 빨래방에 가서도 책을 읽고, 눈치 보여 탈출한 카페에서도 책을 읽으며 남의 집 살이의 설움을 달래 준 기억에 남는 책이다. (남의 집 살이에 질려 그 집에서 나와 창문도 안 닫히고 총천연색 갈색 물 샌 자국이 하모니를 이루어 현대미술작품처럼 펼쳐졌던 말도 안 되는 아파트에서 보낸 시간들을 그린 '건물관리인 라시드 이야기'를 새로 연재 중이다)
https://brunch.co.kr/brunchbook/rachidstory
이 책은 1부는 '야구, 영화를 만나다', 2부는 '영화, 스포츠를 담다'로 총 12편의 스포츠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꼭지 몇 개를 소개한다.
언더독 효과 <The underdog effect>
경쟁 상황에서 이길 확률이 적은 팀을 응원하며 지지하는 현상.
스포츠의 가장 큰 묘미는 무엇보다도 어느 모로 보나 불리한 팀이 이기는 경우이다.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팀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얻게 된다. 한 치의 의심 없이 이길 팀이 이기면 임팩트가 없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팀이 이기면 짜릿하고 힘이 난다.
불공정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 (영화 머니볼, 2011)
뉴욕 양키스와 연봉이 거의 세 배 차이가 나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단장 빌리 빈은 어려운 재정상태로 매년 힘겹게 구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팀 내 최고선수들은 구단을 떠나게 되고, 구단주는 더 이상의 지원은 불가능하다 말한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폴 디포데스타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고 그를 부 단장으로 임명하며 함께 적은 예산으로 최고의 효율을 얻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들은 출루율과 장타율의 합을 선수 영입의 새로운 평가기준으로 제시했는데 기존의 타율, 타점, 홈런이 연봉 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던 요소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수학과 통계학을 야구에 접목하여 사생활 문제나 잦은 부상등의 이유로 다른 구단에서 외면받던 선수들과 전통적인 기록이 낮아 승리 기여도에 비해 과소평가된 저 연봉 선수들을 끌어모았다. 이러한 선수들로 이루어진 애슬레틱스는 2002년 시즌 초반 극심한 부진에 빠졌지만 차츰 전략이 효과를 발휘하며 20연승을 달성한다. 애슬래틱스가 양키스와 똑같은 103승을 올리며 메이저리그 최고 승률을 기록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돈 많은 부자 구단과 가장 가난한 구단의 성적이 같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메이저리그에 준 충격은 엄청났다. 언더독의 대반란이었으며 머니볼의 '대성공'이었다.
영화 속에서 "우리 같은 가난한 구단이 승리하면 변화를 일으킬 수 있어.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야"라고 빌리 빈은 말한다. 이 세상에는 1등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1등은 되지 못하더라도 우리에게 처한 최악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과정들이 아무 쓸모없는 것이 아니며 그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불공평한 세상'에서도 작은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벨기에에 와서 유치원생처럼 말하던 외국인이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건만 17년 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다. 나에게도 외국인이라는 것이 마치 장애처럼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유독 약팀이 이기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단지 모두의 예상을 깬 짜릿함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투영해 약팀에게서 나를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설움을 달래주다
내가 눈칫밥 먹는 설움에 처한 상황이 되니 스포츠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 준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왔다. 스포츠는 단순히 경기가 아니라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알리와 포먼의 복싱경기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다. 비록 내가 노예였던 흑인은 아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자이레 국민들이 왜 그렇게 알리를 응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대결 (영화 우리가 왕이었을 때, 1996)
1974년 10월 30일 복싱 역사를 통틀어 단 한 경기를 꼽으라면 어떤 경기를 꼽겠는가 라는 질문에 지금까지도 압도적인 1위로 꼽히는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면의 세기의 대결이 아프리카 자이레의 수도 킨샤사에서 열렸다. 가장 위대한 두 명의 흑인 챔피언이 노예로 끌려가기 전 자유롭게 살았던 흑인들의 본고장에서 최고의 명승부를 펼치는 것, 그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7세나 많은 알리와 경기 전까지 40승 무패 37KO라는 승률을 기록한 포먼의 대결에 경기 전 전문가들은 포먼의 승리를 예상했다.
자이레 국민들을 비롯한 아프리카 흑인들은 일방적으로 알리를 응원했다. 혈통적으로만 보면 사실 알리는 1/8은 아일랜드계통이었지만 사람들은 알리의 승리를 염원했다. 본명은 캐시어스 클레이었던 알리는 인종차별이 심했던 켄터키 루이빌에서 태어났다. 백인들로부터 온갖 차별을 당하면서 그는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 차별받았던 시간을 보상받고자 하지만, 현실은 그의 생각과 달랐다. 금메달을 따고도 변한 것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백인 전용 레스토랑에 들어갈 수 없었고 버스에서도 백인들과 따로 앉아야 했다. 그는 흑인 인권운동가 말콤 엑스가 소속된 '네이션 오브 이슬람' 운동에 감화되어 이슬람교로 개종 뒤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그가 걸어온 길은 핍박받고 설움으로 가득 찬 흑인들을 대변했다. 흑인들의 인권운동이 한창일 그 당시, 1968년 금메달을 딴 뒤, 성조기를 들고 링 위에 오르고, 이번 경기를 위해 자이레에 입국할 당시 애견인 셰퍼트를 데리고 트랩을 내려오면서 많은 흑인들의 지탄을 받았다. 셰퍼트는 식민시절 당시 벨기에 경찰의 경찰견이었기 때문이다.
우연하게도 내가 살고 있는 벨기에의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다.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식민지였던 콩고에서 벨기에인 관리자들은 고무나무 수확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사람들의 손을 무자비로 잘라 버렸다. 이때의 사건으로 지금까지도 벨기에가 인종차별국의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알리는 '로프 어 도프', 로프의 반동을 이용하여 펀치의 대미지를 줄이고 로프에 기대어 체력을 비축하며, 풀 가드를 한 채 포먼의 공격을 유도한 후 포먼의 주먹은 로프의 반동을 이용하여 흘려버리고 카운터펀치로 반격을 꾀하는 작전을 사용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알리의 8라운드 KO승에 세계는 열광했다.
"Me, We"(나 자신은 우리다)라고 알리는 말했다. 자이레 국민들과 아프리카 흑인들은 그의 승리를 통해 설움을 달랬고, 그들 모두가 승리했다. 단지 복싱경기의 승리가 아닌, 연대와 아픈 역사와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경기가 아니었을까.
스포츠를 잘 알지 못하는 1인이지만,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대부분의 영화는 나의 시청리스트에 올라있다. MBC Sports PD가 손에 꼽는 영화라는데 스포츠 영화 중 가장 볼 만한 영화일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시대상황과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두면 좋을 정보들이 잘 정리되어 있어 그냥 보는 것보다 책을 읽고 보면 영화를 백배는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포츠는 삶이고, 각각의 경기에는 숨겨진 스토리가 있다. 또한 그 스토리는 나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것이 우리가 스포츠에 울고 웃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언제가 될 지 몰랐던 한국 방문일정이 잡혔다. 3일 후에 떠난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직접 서점에 가서 살 걸 그랬다. 하지만 3개국을 돌아 내 손에 들어와 더 반갑다. (그레타 툰베리님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