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 계절에 그 아이들은

명희진 장편소설

by 고추장와플

마지막 책장을 덮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묵직한 소설이다. 묵직해서 오랫동안 곱씹게 된다.

아이러니하다.
가장 높은 곳에 살지만, 세상의 가장 밑에 속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

산동네다.

그곳은 토성이다. 토성은 요강파수꾼인 주인공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그곳을 누군가는 그래봤자 먼저덩어리라고 말한다. 암석과, 얼음덩이리와 먼지라고.
수현과 나에게 산동네는 경멸의 눈빛을 받는 학교 보다, 놀 친구가 있고,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그녀들의 동네에는 선녀, 선애 씨, 철식 씨, 철학자, 미녀, 영옥 씨, 영수, 철학자, 선미, 영철, 대수, 목포댁, 남할아버지와 그의 미친 아들이 산다.
세상의 멸시와 천대를 받아가며 견뎌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이들이 바라는 건 다만 일을 하고, 가족을 위해 벌어먹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오늘을 살고 있지만, 과거의 그림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한 때는 뻐꾸기시계 말고도 비싼 것들이 있었고,
한 때는 멀쩡한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한 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던 사람들.

장애인들, 건장한 남자들, 백골단이 와서 마을을 부셨다.
멸시받는 사람들이 또 다른 멸시받는 사람들의 집을 파괴했다.
누군가의 보금자리였던 곳은 누군가 말한 암석과 먼지처럼 변해 버렸다.
돌덩이가 굴러다니고 벽이 무너진 암석덩어리의 가스도 없고 전기도 없는 춥고 외딴곳.

요강 파수꾼이 지키던 변소마저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단지 인간이고 싶었을 뿐인데, 부자든 가난뱅이든 모두 다 하는 배설의 공간조차 이들에게는 없다. 똥이라면 지긋지긋하다던 수현은 똥을 싸는 공간을 지키는 요강파수꾼마저도 그녀의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둘로 갈라져 싸웠다. 그들이 부드러운 고기를 얻기 위해 자루 안에 넣어 두들겨 패던 개처럼 서로를 두들겨 팼다.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은 사람이 될 권리를 잃어버렸다. 그들과 고기는 다를 바 없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도 보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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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사람들이 기억할 수는 없다는 거야. 기록되는 역사는 중요한 것들이야. 그래서 지금 우리의 대화처럼, 내가 찍는 사진처럼 , 사소한 것들은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지 않거든. 어떤 건 개인의 기억에만 기록되거든. 그런 걸 개인의 역사라고 하지. "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지 누가 결정하는데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비루한 삶을 사는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기록되지 못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선택되지 않았기에. 누군가의 생존의 문제는 누군가에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기도 하니까.
치워 버려야 하는 존재들로서의 구실만 할 뿐.

당장 먹고살기 힘든 자들에게 이념은 엿 바꿔 먹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민주고 사회고 내 몸 뉠 방 한 칸 없는데, 고거시 다 무슨 소용이여, 그넘이 공산주의를 하든, 공상주의를 하든 고건 또 당신 하고 무슨 상관이고?"... 그런 이념보다 더 중요한 게 방 한 칸을 마련하는 거였고 식구들을 굶기지 않게 아프지 않고 일을 계속하는 거였다. 숟가락을 만들다 기계에 껴서 얼굴의 반을 잃고도 가족들 숟가락을 제일 먼저 걱정해다는 넝마주이의 동료처럼.

성경구절을 외워오면 월세를 깎아준다던 주인에게 가려고 전도서를 달달 외운 당골의 기저귀를 갈던 선애 씨에게도 이념이고 나발이고, 그런 것들은 쓸데없이 많이 배운 잡일도 못할 잡놈에게나 필요한 것이었다.
당장 먹고사는 것 앞에서 선애 씨는 전도서를 어디까지 외워야 하는지가 고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껴안고 가장 높은 마을을 떠나면서도 서로가 있어 살아간, 도시에서 가장 험한 산에 살아갔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잊혀진 역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들의 눈을 통해 그려진 세상이 더 잔혹하고 생살을 에이는 느낌이다.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본 가난은 더 냉혹했다.
안전한 곳과 위험한 곳, 편안한 곳과 불편한 곳은 아이가 살아가는 곳에 모두 혼재해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아이의 눈과 발로 함께 산동네를 누비고 기록되지 못한 과거가 활자로, 기록으로 생명을 얻어 지금 내 앞에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가슴과 머리에 오래도록 남을 책이다.

발로 뛰고 취재를 하며 이런 책을 쓴 명희진 작가님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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