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lin
스무 살이 된 1월에 운전면허를 따고 아버지에게 고향에 좀 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베를린에서 태어나 7살까지 살았다. 나는 독일에서의 삶을 너무나도 명확히 기억하고 있는데, 아버지의 지론에 따르면 내가 행복했기 때문이란다. 맞는 말 같다. 내 인생에 그때와 같이 모든 것이 처음이며 모든 것이 기억되는 시절은 또 없었다.
고향을 가고 싶다는 나의 요청에 아버지는 10분 만에 비행기표를 한 장 끊어 주셨다. 바로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하는 비행기였다. 암스테르담을 경유하는 조금 싼 비행기표였다... 직항 끊어주시지...
혼자서 비행기를 타는 건 일본 갈 때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스무 살이 된 나에게 혼자 장거리 비행기를 타고 경유를 하는 것은 아주 스릴 있고 설레는 일이었다. 그것도 나의 고향을 찾아간다니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나는 저녁에 있던 약속을 취소하고 집에 들어가 2주간의 베를린 여행을 위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을 싸고 있던 나에게 어머니가 오셔서 두장의 사진을 건네셨다.
베를린에서 다니던 유치원 사진들이다. 나는 작은 독일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을 다녔다. 유치원에서의 추억이 참 많다. 우선 선생님들이 아주아주 엄하고 무섭다.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구분해주는 선생님들이라 무서웠고, 그 덕에 아이들은 굉장히 공평한 사회를 누렸던 기억이 있다.
어린 나이에 한국에 들어와 친구들과 놀 때 나는 처음에 적응을 잘 못했다. 아이들이 선생님 말씀을 정말 더럽게 안 듣는 것을 보고 심한 충격과 문제의식을 느꼈다. 도대체가 선생님이 조용히 하라고 하면 조용히 하는 친구가 거의 없었다. 선생님이 시키대로 따르면 손해 보는 기분을 들게 했다. 점차 나 또한 선생님 말씀을 듣지 않게 되었다. 내가 무슨 병신도 아니고.
독일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선생님 말씀은 법이자 도덕이었다. 듣지 않으면 듣지 않는 만큼 면밀한 페널티가 주어졌다. 잘 들으면 잘 듣는 만큼 듣지 않는 행위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누가 길바닥에 침이라도 뱉으면 당시 독일 할머니들은 소리를 빽빽 지르며 규칙을 지키라고 했다. 독일 국민 모두가 길바닥에 침을 뱉어도 너는 괜찮냐는 식의 훈계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뭐 그리 오버할 정도인가 싶을 수 있지만 독일인들에게는 그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였고 나 또한 그러한 교육을 받았기에 불공평하거나 치사한 모든 것에 분노를 느낀다. 억울함은 있어서는 안 되는 감정이다.
나는 공평하고 정의로운 독일 유치원을 현재의 대한민국보다 존경하고 그리워한다. 억울함이 없고 모두가 정직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나에게는 굉장히 큰 그리움이자 돌아가지 못할 노스탤지어이다.
오른쪽 사진에서 가장 오른쪽에 있는 안경 쓴 꽃무늬 드레스 친구가 나의 당시 여자친구였다. 그녀의 이름은 알리나. 사진을 찍기 며칠 전 나와 알리나는 헤어지게 되었고 내 친구 제롬과 사귀게 되었다. 사진을 봐서 알겠지만 알리나는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있다. 그 친구가 제롬이다.
제롬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당시 독일 맥도널드에서는 해피밀에 배트맨 시리즈 장난감 자동차를 함께 제공했었다. 나는 로빈 자동차를 가지고 있었고, 제롬은 배트맨 자동차를 가지고 있었다.
독일 유치원에는 작은 규칙이 있는데, 그날그날 자기가 가지고 놀고 싶은 장난감 하나만 들고 올 수 있었다. 장난감이 자신의 호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을 크기의 것들만 허락되었다. 독일 유치원에는 어떠한 장난감도 없었기 때문에 매일매일 아이들이 직접 가지고 오는 장난감들이 모두의 장난감이 되기도 했다. 친구의 장난감을 가지고 너무 놀고 싶다면 친구에게 다가가 정중히 물어봐야 한다. 우선 얼마나 가지고 놀지 시간을 협의해야 했다. 시간 협의가 잘 마무리되면 내가 친구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동안 나의 장난감을 친구에게도 가지고 놀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장난감 트레이드는 무조건 1:1로만 가능했다. 상대방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워야 했다. 이것이 '거래'가 아닌 상호적인 약속임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1:1의 관계에서 알리나는 나와 헤어졌고 제롬을 만났다. 나와 한 약속을 그녀가 어긴 적은 없다. 그저 그녀의 남성편력에 좀 문제가 있어 보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를 잊지 못했다.
베를린에 도착했다.
베를린 살던 시절 나를 자주 돌봐주던 병규형이 아직 베를린에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13년 만에 병규형의 여동생에게 싸이월드로 연락을 취했다. 병규형의 독일 전화번호를 받고 병규형의 집에서 2주 동안 지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숙소 값을 아낄 수 있었다.
13년 만에 만난 병규형과 맥주 한잔을 하며 음모론에 관한 이야기를 밤새 했다. 뜬금없이 그 시절 둘의 공통 관심사가 음모론인 것을 확인하고는 아주 이상하고 괴상한 음모들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술과 담배를 이어갔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병규형 책상은 엉망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구글맵이 없었으니 베를린 시내지도를 들고 다녔다. 독일에 오기 전 어머니가 베를린에서 살던 우리 집 주소를 수첩에 적어주셨다. 베를린에 도착해 베를린 지도를 사자마자 내가 살던 집을 지도에서 찾았다. 정말 더럽게 안 찾아지다가 전철역 Hohenzollenstraße를 찾아내 표시하고 기억을 더듬어 길을 찾으니 드디어 내가 살던 집을 찾아냈다.
내가 살던 집이다. 가난한 사람들만 살던 이민자들의 동네. 내가 살던 때는 이 정도 까진 아니었는데,,, 낙서가 많아졌다.
집 뒤쪽에 있는 놀이터. 이곳에서 참 많이 놀았다.
스포츠 바로 바뀐 식당. 원래는 중국음식점이었다. 아버지가 누굴 접대해야 하는 날이 가끔 있었는데, 그 때면 저 식당에 가서 철판볶음을 먹었었다.
옛 집과 기억나는 몇몇 건물들을 보니 내가 다니던 유치원까지 지도를 보지 않고 찾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도전하기로 하고, 수많은 기억들을 더듬고 헤매며 유치원을 찾아 나섰다.
등원 길에 있는 강가 산책길. 나는 이곳에서 백조들에게 빵을 참 많이 줬다. 가끔 저녁을 먹고 난 뒤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유모차에 태우고 이 강가 산책을 많이 하셨다. 내가 처음 자전거를 배운 곳도 이곳이다.
그나저나 여기는 등원 길에서 샛길로 좀 빠진 건데~,,, 하며 돌아갔다.
내가 태어났다는 병원. 독일인들은 출산을 하면 바로 집에 귀가한다. 산후 조리고 뭐고 없다. 불쌍한 우리 어머니는 나를 낳고 독일인처럼 집에 귀가하다가 병원 복도에서 쓰러졌었다고 한다.
강아지들이 던져지는 원반을 물고 뛰어다니던 공터.
유치원 가는 길. 이쯤 어딘가에 아이스크림집이 있었는데~ 하고 두리번거리니 아이스크림집이 있었다. 혹시나 해서 들어가 보니 또 기억에서 소환되는 장면 그대로의 모습이 눈앞에 있다. 나는 이 아이스크림집에서 어머니와 여러 번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난 매번 초코맛을 먹었던 것 같다.
익숙한 골목들을 지나 드디어 찾게 되었다!!! 나의 유치원.
유치원 주차장에서 보이는 나무집. 내가 이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할 때 어떤 아저씨가 만들었던 나무집이다. 이 나무집이 아직도 있다니...
조용히 놀고 싶은 친구들이 색칠 놀이하고 그림 그리며 놀던 장소다. 이곳은 보통 점심을 먹고 낮잠 자기 직전에 잠깐 개방했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해적선에 탑승했다는 설정으로 아이들과 놀았던 기억이 있다. 밑에 바닥이 파란색이어서 바다로 표현이 되었었나. 바다에 빠진 나를 매번 제롬이 구출해줬었다.
아침마다 아이들이 인사 나누는 곳이다. 각자 자기 자리에 짐을 놓고 부모님과 오늘 하루 잘 보내겠다고 약속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는 묘한 긴장감과 우울감이 있었다. 어머니가 여기에 가방을 놓고는 곧 나갈 거니깐... 씩씩하게 오늘 하루도!
오른쪽 방이 7살 아이들의 교실이다. 왼쪽 방은 낮잠 방이다.
부모님과 헤어지고 나면 이 공간에서 친구들을 만난다. 친구들과 안녕~ 안녕~ 하면서 인사를 할 때면 저 창밖으로 엄마가 지나가곤 했다. 엄마가 이 공간을 들여다보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곤 하셨다. '오늘도 울지 말고 잘 있어~~'
낮잠 방은 아직도 낮잠 방으로 쓰이고 있나 보다. 저쪽 안쪽에 이불들이 차곡차곡 접혀있다. 저 이불 또한 아이들이 직접 갠다.
치카치카 시계. 밥을 먹고 단체로 이빨 닦을 때 저 시계가 돌아간다. 2분 동안 돌아가는 시계인데, 그림에 표시된 동작을 맞춰 구석구석 양치를 할 수 있다. 이 시계를 아직도 정말 그대로 쓴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아이들 개개인의 수건들이 놓여 있다. 자기 수건은 자기가 알아서 깨끗하게 써야 했다.
유치원에 무단 침입해서 사진을 찍고 있으니 어느 경비원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독일어로 뭐라고 하셨다. 당시에 나는 모든 독일어를 까먹었었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어설픈 독어로 여기를 다녔었다고 설명했다. 어머니가 준 두 장의 사진을 꺼내고는 '나 여기 다녔어!!!'라고 얘기했다. 경비원 아저씨는 내가 꺼내 든 사진을 유심히 보더니 선생님들을 가리키며 '히어 히어!!'라고 하셨다. 내가 못 알아듣고 있으니 'Moment!' 하고는 유치원 2층을 올라갔다. 그리고는 사진 속 두 선생님들과 내각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투실 투실한 원장 선생님이 내려오셨다.
세 분은 계단을 내려오며 내 이름을 불러주셨다. 이 유치원에 다녔던 한국인을 잊을 리 없다며 내 이름도 기억하고 계셨다. 세 분 모두 나를 격하게 반겨 주셨다. 내가 제롬과 친했고 제롬에게 알리나를 빼앗긴 사건까지 모두 알고 계셨다. 세 분은 나를 사무실로 데려갔다. 깊숙한 곳에 놓인 서류 몇 가지를 들고 나오시더니 제롬의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알리나가 지금 일하고 있는 식당을 알려주었다.
모든 게 다 그대로 보관되고 있었다. 내가 떠나온 이후로 바뀐 것이 없었다. 선생님들 모두 그대로 계셨다. 오버스럽지만 굉장히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어떻게 모든 게 그대로일까. 한국은 너무 빨리 모든 게 변하고 있는데..
물론 현재의 독일 또한 빠르게 변해가고 있는 것 같다.
우선 제롬의 집에 찾아갔다. 제롬은 집에 없었고 제롬의 어머니가 나를 반겨 주셨다. 제롬의 어머니가 수프를 한 그릇 먹으며 제롬을 기다리라고 하셔서 수프 한 접시를 얻어먹었다. 제롬에게 전화가 왔다. 어머니 왈, 제롬이 오늘 야근을 하느라 늦게 올 것 같다며 다음에 또 와줄 수 있냐고 한다. 알겠다고 하고 제롬의 집에서 나왔다.
알리나에게 찾아가는 길. TV는 사랑을 싣고를 혼자 찍는 기분이었다. 알리나는 노인들이 거주하는 빌딩의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경로당 같은 것인데 좀 더 민영화되어있는 형태라고 보면 된다. 나는 카페에 들어갔다. 모두가 노인이었고 젊은 여자가 하나 서 있었다. 어린 시절의 알리나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다가가 Bist du Alina?라고 물었다. 그녀는 Ja라고 대답했다.
그녀와 나는 대체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고 나는 독일어를 전혀 못했다. 그렇게 난항을 겪고 있는데,,, 독일 할머니 한 분이 어설픈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하신다. 내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독일 할머니가 고개 숙여 인사를 해주셨다. 그녀는 파독 간호사 한국인들과 젊은 시절 일했기 때문에 몇 가지 한국어를 안다고 하셨다. 그리고 영어를 굉장히 잘하셨다.
알리나는 내게 카푸치노 한 잔을 공짜로 내왔다. 그리고 영어를 잘하는 할머니 통역을 중간에 두고 나는 영어로, 알리나는 독일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시시콜콜한 대화였고 무슨 대화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 기억나는 대화가 있다면 나는 그녀와 사귀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 당시 나를 좋아했던 기억이 없다고 했다. 내가 절대 아니라고 우리 사랑은 쌍방이었다고 항변했지만 알리나는 고개를 저었고 통역가 할머니도 고개를 떨구었다.
아무쪼록 귀여운 대화를 둘이 나누곤 나는 다시 병규형 집으로 돌아갔다.
병규형의 독일인 친구가 같이 놀자며 나를 초대해 줬다. 그는 중세 갑옷 덕후이면서 뱀을 한 마리 키운다고 한다. 나는 그의 정신세계와 그의 공간이 궁금했다. 놀러 가 보고 싶다고 지난번에 이야기했더니 오늘 같이 가자고 한다. 독일인 친구의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대충 게오르그라고 해두자.
이 갑옷의 가격이 엄청 비싸다고 한다. 실제 중세 갑옷을 그대로 고증한 최상의 레플리카 갑옷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이 갑옷을 입어보는 것이 대단한 영광이라고 게오르그는 내게 생색을 냈다.
노란 뱀도 생각보다 귀여웠다. 성격도 순하고 부르면 쳐다보는 것도 신기했다. 아주 이상하고 지저분한 독일 청년의 방이었다. 고증된 갑옷은 정말 엄~청 무거웠다.
그리고는 병규형과 게오르그와 나는 펍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말 로컬 한 분위기의 작은 술집이었다. 거기서 저 축구게임을 정말 미친 듯이 열심히 했다. Berliner가 된 듯해서 행복했다.
다음날 오전에는 페르가몬 뮤지엄에 갔다.
그 때나 지금이나 관심사는 이 딴 거밖에 없나 보다.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찍은 사진이 이렇게 두 개뿐이라니...
저 사진 찍을 때가 기억난다. 아주 먼 옛날에도 어떻게든 저런 걸 표현했구나~ 싶었다.
그러고선 베를린 필하모니의 공연을 보러 갔다. 사이먼 래틀이 말러 심포니 2번을 하던 날이다.
꾸벅꾸벅 졸다가 마지막에 웅장한 끝마침에 덩달아 기립박수를 쳤다. 그때는 참 말러가 어려웠는데...
그다음 날에는 어린 시절 다니던 한인교회에 들러보았다.
그리고는 당시에 유행하던 VaPiano라는 독일식 이탈리안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에 갔다. 너무 내 스타일의 이탈리안 음식들이었다.
이 이후로 한국에서 VaPiano 앓이를 했었는데, 신도림 강남 역 삼등지에 잠시 들어왔다가 폭삭 망해서 없어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