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분홍빛이 흩뿌려진 복도
“잠깐만 내려오실래요?"
함께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더니 갑자기 전화로 불러낸다.
숙취해소제를 몰래 먹고 마셔도 머리가 어지러워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간다.
어디로 갔던 사람들은 화장실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있다. 다들 어쩔 줄 몰라하는 기색이 역력하고, 어디선가 역한 냄새가 올라온다.
새벽 신촌 거리에는 비둘기가 좋아하는 분홍빛 전들이 종종 구워진다. 내가 보고 있는 게 그것과 완전히 같다고 말하긴 그렇지만 보자마자 시야와 속이 본능적으로 뒤틀린다.
한 남자의 흥건한 바지, 여자들의 당혹스러운 표정, 3차까지 이어진 술자리, 복도 바닥 여기저기에 뿌려진 분홍색들. 누군가는 마치 남자분이 사고를 쳤다는 듯 말했다. 상식 밖 상황에 눈알을 열심히 굴려본다. 알코올을 마시면 작동기간이 짧긴 해도 눈치가 상당히 빨라진다.
5분 컷 홈즈가 되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지만 다음의 선택은 스스로도 놀랐다.
"남자분 빼고 다 올라가세요. 빨리"
사람이 열받으면 한순간 두뇌회전이 빨라진다는 연구 결과라도 있는 건가? 그 선택은 술기운이라고 밖에 설명하지 못하겠다.
우물쭈물하며 손 놓고 있는 다수의 여자들을 술자리로 돌려보내고 화장실에 있는 두루마리 휴지를 왕창 집어 손에 돌돌 말았다.
그분도 나도 한동안 말없이 맨손으로 흩날려진 분홍빛들을 지워냈다.
그녀가 만든 작품은 고깃집, 가맥집, 편의점을 두루두루 거친 터라 속이 꽉 차있어서 짜증 난다는 둥, 손에 비릿한 냄새가 스며들자 다른 사람들은 뭐 하냐며 빡치는 것과는 별개로 슬프고도 아련하고도 허무했다.
사고를 치른 사람은 모른 척하고 치우는 사람은 따로 있어 상황이 억울할 법하지만 그와 난 그리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수레바퀴처럼 큰 휴지를 다 쓰고 나서야 현장은 증거하나 없이 깨끗해졌다.
지친 우리는 내려와 편의점으로 갔다. 그분은 물을 건네며 감사를 표했다. 내가 오기 전까지 그녀가 술을 많이 마셨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연정 품은 그를 남겨서 청소시킨 게 괜히 미안해진다. 고생의 범인은 2주 전에 헤어진 전 여자 친구이었으니깐.
그날 밤, 그녀가 속시원히 게워낸 음식들과 달리 내 심정은 복잡해져만 갔다. 당차고도 뻔뻔한 그녀가 진실의 밤을 아는지 모르는지 논외로 적어도 그녀와 관련된 모든 선택을 후회하진 않는다.
모름지기 으른이란 응당 헤쳐나가야 한다는 걸 배웠으니깐. 과거의 더러운 기억은 지워냈지만 여전히 손에서 비린내가 난다. 왠지 모르지만 그날 마음은 한 뼘 더 커져 이 정도면 성숙의 대가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