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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독일기 Sep 06. 2022

홍대와 공덕 사이 그 어딘가

에세이 | 빛바랜 당신을 여전히 추앙합니다

 경의선 숲길에 발을 내딛으면 머리가 상쾌해집니다. 거리 3km, 지하철 두정거장 사이를 거의 매일 걷지만 갈 때마다 매번 낯설고 분위기가 신비합니다. 출근길 아침에는 도심 속 나만의 산책길을 걷는 것처럼 고요해서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게 하고, 빛이 잠든 밤에는 어지러운 마움을 어루만져주듯 차분한 공기에 생각을 정리합니다.


 화려한 홍대 버스킹 거리와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나오는 연트럴 파크가 나오는 길을 가로질러 뛰어다니면서 사람들이 줄을 선 가게 간판과 지나가는 사람의 옷과 얼굴을 곁눈질로 유행과 계절이 흘러가는 걸 봐요. 코로나 시국에 한산했던 거리가 이젠 일요일 밤에도 떠들썩해지는 게 마냥 신기합니다. 흙과 돌로 뒤덮였다던 철길이 초록빛 나무와 풋풋한 잔디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숲길로 바뀌었다는 역사를 듣고는 세상은 살만하다고 느낍니다.





 할아버지, 당신의 집은 철길 바로 옆에 있었죠. 어릴 적 당신에게 잠시 맡겨졌을 때 같이 놀 친구가 없어 심심해서 철길로 나와 돌을 만지작 거리거나 철길 사이를 이리저리 깡충깡충 뛰어다녔죠. 기찻길 신호등이 띵똥띵똥 울리고 안전바가 내려오면 저 멀리 기차가 경적을 지르며 제게 다가옵니다. 철길 위에서 가만히 쳐다보다가 오기 전에 살포시 옆을 비켰어요. 운동신경이 좋아 달리기에 자신 있었던 전 느릿한 검은 쇳덩이를 그렇게 친구 삼아 장난치며 놀았습니다.


 침묵하는 기차는 요즘 시대 자동차 운전자처럼 창문을 열고 민식이법에 부들거리며 욕을 내뱉지도 않고, 그저 중저음의 목소리로 철길 사이에 깔린 나무를 피아노 건반 삼아 균일한 박자로 노래를 부르며 지나갑니다. 쿵쿵 쿵쿵 쿵쿵 쿵쿵. 귀를 먹먹하게 한 행진곡을 듣고 난 후 온몸으로 느껴지는 무중력 진공상태를 좋아했습니다. '남자가 됐다. 어른이 됐다' 같은 치기 어린 마음에 무언가 해냈다는 성취감이 들었거든요. 철이 없었죠. 주님 곁에 올리가는 어린양 중 하나가 제가 될 뻔했으니깐요.





 기차는 꼭 당신을 닮았습니다. 고통스러운 짐을 짊어지고 견뎌낸 묵직함과 말수는 적어도 한결 같이 지루한 일상을 보낸 꾸준함, 안전한 시골에서 낯선 타지로 가족들을 데리고 와 다른 선택지가 없는 길을 달릴 수밖에 없었던 책임감, 뜨거운 햇살을 받는 철길에 깔린 돌처럼 거친 손을 만져도 전해지는 다정함을 스멀스멀 떠오르게 하죠. 어린 시절 내가 본 아름다운 세계는 나를 지키기 위해 젊은 날 당신이 희생해서 빚어낸 세상이란 걸 지금에서야 깨닫습니다.


 당신은 참 나를 좋아했습니다. 친자식과 달리 고사리 같은 내 손을 쓰다듬길 좋아했고, 공을 놓고 펜을 잡아 대학에 가기로 결심하고 나서는 학사모를 쓸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수줍게 부모님께 조용히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운명은 야속하게도 수능을 2년 앞두고 척추에 핀 고작 몇 cm 안 되는 검은 세포에 살아야 할 이유이자 삶의 빛을 빼앗겨버렸습니다. 1년을 버텼지만 굳건한 탑 같던 생의 의지도 퍼져가는 고통에 서서히 뼈와 함께 녹아 흘러내렸습니다. 당신을 떠나보내는 불꽃을 끝내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시간은 흔하지 않다는 걸 알려준 진공 같은 3일의 시간을 보내고 허해진 마음에도 일상으로 돌아가 빈자리가 익숙해질 때까지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누구보다 당신에게 인정받길 원했기에 약속이 담긴 바톤을 이어받았습니다.



 20대는 젊음에 취해, 30대는 해야 할 일에 떠밀어낸 기억이 요즘 다시 떠오릅니다. 저 잘하고 있는 게 맞나요? 당신이 바라던 모습이 이걸까요? 당신은 내게 은은한 품위와 잔잔한 품격을 알려준 유일한 어른입니다. 멈추고 있는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당신과 다르게 전 약하고 여립니다. 파도에 깨지는 모래성을 그저 바라보고 나서 잔재가 된 가루를 다시 끌어 모읍니다. 닮은 게 하나 없는 우리지만 태산 같은 당신처럼 현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생과 사를 초월한 정신적 체급 차에 열등감을 느끼며 당신을 지워야 할 장애물이자 넘어야 할 라이벌로 의식하면서 살아왔을지도 모릅니다.


 생각에 잠기다 보니 어느새 숲길이 끝나는 공덕에 도착했습니다. 홍대에서 공덕까지 예전에 철길이었던 공간을 걸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감정에 솔직해지는 건 분명 여기에 당신이란 기차가 지나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겠죠. 기억이 뜨문뜨문 사라지는 요즘 더 늦지 않게 진짜 어른을 사랑하는 글을 남겨 다행입니다. 마음속 어딘가 잊힌 깊고 캄캄한 당신의 탄광을 비춰볼 여백이 있어 감사합니다. 시계의 초침은 오른쪽으로 돌지만 당신과의 만남은 왼쪽으로 돌아야 이루어집니다. 과거를 거슬러 현실을 달려야 할 시간이 다시 왔습니다. 오늘도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당신이 정말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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