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육시설, 그리고 사회복지사로서의 단상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직업적 특성이라는 게 있다.
사회복지 현장에 있다 보면, 그 현장에 맞춰 나도 점점 변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때로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특히 오늘은 ‘양육시설’이라는 공간을 다시 보게 됐다.
삼교대로 돌아가는 시스템. 주주-야야-휴휴.
근로자를 위해 만든 제도이고, 현장에선 가장 익숙한 형태다.
그런데 이 시스템 안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삶은, 과연 건강할까?
한 공간, 서로 다른 스타일의 양육자.
아이들은 하루에 세 명의 ‘엄마’를 만난다.
어떤 선생님은 칭찬 위주의 지도를 하고,
어떤 선생님은 “이런 건 왜 해?”라며 무심히 넘긴다.
또 어떤 날엔 선생님이 바뀌기도 하고, 아이는 또 처음부터 적응해야 한다.
이건 단순한 양육의 차이가 아니다.
‘양육 철학’이 뒤섞여 있는 현장이다.
나는 아이가 잘하면 칭찬 스티커를 주고, 웃으며 말해주고 싶다.
그런데 옆에 있는 동료가 그걸 “쓸데없다”라고 생각하면,
그건 혼자만의 철학일 뿐, 아이에겐 혼란이 된다.
어떤 선생님을 따라야 하지?
어떤 행동이 칭찬받는 걸까?
그리고 아이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살아간다.
조금이라도 규칙에서 벗어나면, ‘관리상 문제’가 되니까.
나는 예전에 일탈도 해봤고, 밤늦게 친구랑 놀기도 했고,
엄마 아빠한테 혼나도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다르다.
‘일탈’은 바로 ‘사건’이 된다.
결정권자는 어른이고, 아이는 따라야 한다.
수동적으로. 피상적으로.
그건 교육이 아니라, ‘감시’에 가깝기도 하다.
나는 아이들 중 누군가가 일탈을 했다고 해도,
“이 아이가 잘못됐다”고 무조건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어른은 선택할 수 있고, 훈육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다.
그 전제는 “내가 정답이다”는 확신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나는 가끔 그런 확신을 내려놓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나도 모른다.
지금 이 선택이, 이 훈육이
아이에게 좋은 건지 아닌지.
사회복지 현장, 그중에서도 양육시설.
여전히 우리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