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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가희 Jul 05. 2019

나도 작가나 할걸 그랬어

'작가' 아닌 '잡가'로 살아가기


[글/구성] 그리고 [연출]    


본편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예고해 프로그램에 대한 궁금증을 더하는 방송의 도입부, 즉 프롤로그. 다양한 이야기와 다양한 볼거리, 그리고 다양한 형식으로 구성되는 프로그램의 본편. 이 모든 내용을 압축해 결말을 도출하거나 전체적인 의미를 되새기며 프로그램을 마무리하는 에필로그.


프롤로그-본편-에필로그. 크게 봤을 때 보통의 방송 프로그램은 이렇게 구성된다.     


하지만 프로그램의 진짜 '마무리'는 바로, 에필로그가 아닌 '스크롤 화면'이다. 에필로그 바로 뒤에 붙는 '번외'와도 같은 그것은, 방송의 하이라이트나 촬영 뒷이야기 등이 그림으로 깔리고 거기에 참여한 스태프들과 협조처의 이름을 자막으로 흘리는 것을 통상적으로 그렇게 부른다.    


하지만 보통의 시청자들은 이 스크롤 화면까지 보지 않고 프로그램의 본편이 끝나면 채널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 장면처럼, 한 편의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려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 스크롤 화면에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감독하는 CP부터 시작해 세트 제작, 촬영, 조명, 오디오, 종합편집, 출연자들을 방송 화면에 맞게 꾸며주는 스타일리스트 등의 다양한 사람들의 이름이 흘러가는데, 어느 방송이든 그 스크롤 자막의 마지막 줄을 차지하는 이름은 바로  [연출]이다.      


프로그램의 연출을 담당하는 사람. 즉, PD라 불리는 그들은 프로그램의 실질적인 제작을 총괄하고 책임지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PD의 영원한 조력자이자 함께 프로그램의 전체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글/구성]을 담당하는 사람, 바로 '작가'다.     


말 그대로 PD의 주 업무는 연출이고 작가의 주 업무는 글과 구성이다. 하지만 때에 따라 그 업무를 조금씩 나누기도 하고 또 같이 하기도 하며, 팀의 분위기나 각자의 성향에 따라 PD가 팀의 리더가 되기도 하고 작가가 리더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작가가 PD보다 낮은 직급이라 인식되는 경우가 많고, PD가 작가를 고용하는 '갑'의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그간 이어온 인맥 안에서 PD의 제안을 받고 일했던 경우가 많기는 했지만, 한 번도 그들에게 고용되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어쩌면 그건 작가로서의 자존심과 같았다.



작가나 할 걸 그랬다고요?


얼마 전, 나는 내 작가 인생을 통틀어 가장 경솔한 말실수를 목격했다.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다름 아닌 동료 PD였고, 그 말은 나에게 비수가 되어 꽂혔다.     


그간 연락이 뜸하다가 오랜만에 연락이 닿아 같이 짧은 영상을 하나 제작하게 되었는데, 오랜만의 만남인 만큼 서로 그간 어떻게 일해왔고, 지금은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당시 나는 새 프로그램 기획과 론칭, 사내방송 등 네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바쁜 상황이었기에 있는 그대로 얘기를 했고, 그러던 중 상대가 무심코 던진 우스갯소리.    


"종종 저희 피디들끼리 그런 얘기를 해요. 나도 작가나 할 걸 그랬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표정관리에 실패했고, 순식간에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작가 앞에서 '작가나 할 걸 그랬다'니. 내가 대체 뭘 들은 건지 두 귀를 의심하면서, 그 말의 정확한 뜻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갑자기 표정이 굳어진 나를 보며 아차 싶었던 건지, 눈치를 살피던 상대가 분위기를 풀어보겠다고 늘어놓은 말들은 더욱 가관이었다.    


"피디는 작가보다 잡일이 많고 몸이 힘들잖아요. 작가가 글로 써주면 피디가 실질적으로 그걸 만들어야 하고. 게다가 실력만 인정받으면 작가님처럼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으니까 돈도 훨씬 많이 벌 수 있는데 피디는 고생만 많이 하고. “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던 순간, 아주 오래전 그가 나에게 저질렀던 또 하나의 실수가 생각났다.    


9년 전쯤, 조연출이었던 그는 취재작가인 나에게 충격적인 말을 했었다. 아주 오래된 일이라 정확한 표현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에 남는 말들만 요약해보자면, 'PD는 전체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며 모든 일은 PD가 한다. 그러나 글을 쓰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인 작가를 고용하는 것이다.'였다.    


나도 아직 작가가 아니었고, 그도 아직 PD가 아니었던 시절. 대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방송 일을 시작했기에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걸까.



작가 아닌 잡가라도, 하시겠어요?   


보통 방송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렇다. 가장 먼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그에 맞는 출연자를 선정한 후에 회차 별 아이템을 찾는다. 그러면서 프로그램의 컨셉이나 장치 등을 끊임없이 개선해나가고, 방송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아이템이 찾아지면 거기에 맞게 섭외(사례, 장소 등)를 하는 동시에 회차의 전체 구성을 짠다. 그다음, 그 구성에 맞게 촬영을 할 수 있도록 세팅을 하고, 촬영구성안 또는 대본을 작성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촬영 준비가 완료되면 거기에 맞게 촬영을 하고, 현장 상황에 따라 내용이 바뀌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 촬영본을 보며 분석하고, 또다시 편집 구성을 해야 한다. 그 구성에 맞게 편집이 완료되면 PD와 작가가 함께 보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 모두가 만족하는 '가 편집본'이 나오면 그 영상을 가지고 후반작업을 한다.

 

작가는 가편본에 맞는 내레이션이나 자막을 쓰는 작업을 하고, PD는 그 대본을 가지고 더빙을 하고, 오디오 믹싱을 하고, 화면에 자막을 넣고 효과를 입히는 종합편집을 하게 되는데, 이 모든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시청자들에게 송출될 수가 있는 것이다.     


방송작가로 일해 오면서, “방송작가는 대체 어떤 일을 하나요?”라는 질문을 수없이 많이 받았다.     


방송이 완성되기까지의 수많은 과정 중에서, 작가가 고상하게 앉아 '글만 쓴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큰 오산이다. 간혹 그렇게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나는 늘 웃으며, “방송작가는 글 쓰는 직업이 아니에요”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프로그램의 기획부터 섭외, 구성, 소품과 장소 등의 촬영 세팅, 본 촬영, 편집, 수정, 내레이션, 자막 등. 작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단언컨대, 단 한 군데도 없다.    


팀원이 모두 머리를 모아 프로그램에 컨셉을 입히고 작가의 주도 아래 구성이 잡히고 나면, 바로 촬영을 나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촬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진가는 발휘된다. 밤을 지새우며 내용에 맞는 사례를 찾고, 굽신거리며 출연자를 섭외하고, 촬영이 완벽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동동거리며 모든 상황을 세팅한다.


촬영은 주로 PD의 주도 하에 이뤄지지만, 그렇다고 작가가 쉴 수 있는 건 아니다. 촬영에 동행하거나, 혹시 모를 긴급 상황에 대비해 항상 대기를 타고 있어야 하며, 촬영이 끝난 후에는 촬영본을 보며 다시 편집 구성을 한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을 때엔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하는 게 우리의 삶이다.    


이렇듯 전체적인 업무량을 봤을 때에, '작가(writer)'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글을 쓰는 일은 아주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스스로를 작가가 아닌 잡가, 라고 말하기도 한다.



매너가 '좋은 방송'을 만든다    


알고 보면 3D 업종. 월화수목금금금 근무. 박봉 중에 박봉. 허울만 좋은 방송작가. 아마 이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일 거다.


하지만 아직도 누군가에게 내 직업을 소개할 때면 “정말 멋져요!”라는 리액션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왔고, 단 한 번도 방송작가가 된 걸 후회하지 않았다. 작가로서의 삶도, 잡가로서의 삶도. 그렇게 사랑해왔다.


이렇듯 10년 동안 고군분투하며 지켜온 내 직업을, '작가나 할 걸 그랬다'며 쉽게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에, 심지어 그 상대가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조력자여야 할 PD일 때. 아무리 스스로를 잡가라고 희화화하는 우리라도 너무 큰 상처를 받고 만다.


'나도 PD나 할 걸 그랬어', '카감(카메라감독)이나 할 걸 그랬네.'라고 말하는 방송작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방송의 말미 스크롤 자막에 기재된 이름들 중 단 한 명도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군가는 카메라 앞에서, 누군가는 편집실에서, 누군가는 노트북 앞에서. 저마다의 위치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같은 목적을 가지고 만났다. '좋은 방송을 만들어야 한다'는 그 목적 말이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모인 각 분야의 전문가들. 누구도 누구를 무시하거나 자존심을 다치게 할 자격은 없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물론이고, '팀'이라는 이름 안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할 때, 비로소 좋은 작가가 되고, 좋은 PD가 되고, 좋은 방송을 만들 수 있는 것 아닐까.


나는 늘 그렇게, 좋은 방송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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