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2번출구로 가는날

일상의 결(사는 이야기)

by 신은정


충무로 가온한정식으로 가는 길. 늦은 출발, 빈손, 복잡한 시내 운전. 불완전한 것투성이었던 그날 저녁이 내게 가르쳐준 건, 완벽함보다 중요한 것이다.

어제 소영언니와 빨간뻘낙지에서 식사하며 약속을 잡았다. 언니가 미술전시회를 다녀오는 길에 만나기엔 시간이 애매하니 조금 일찍 보자고 했다. 안전신문사 사장이 된 Lee오빠가 오랜만에 베푸는 자리. 아프리카에서 온 M오빠가 Lee오빠의 초대를 받았으니 우리도 함께 가자고 했다.


그런데 5시 보컬 약속을 깜빡 잊고 있었다. 언니에게 못 갈 것 같다고 했더니 "약속이니까 보컬을 미루는 게 맞다"고 했다. 시간 조절을 하느라 정신없던 탓인지 여러모로 일이 풀리지 않는 하루 같았다.


하은언니 만나는 모임에 잠깐 합류했다가 가려던 참이었는데, 오랜만에 수다를 떠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시계를 보니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미 늦었다. 백화점 주차장에서 패밀리스포츠센터로 차를 옮겨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엔 30분 전에 일어섰어야 했는데. 알람을 맞춰두지 않은 걸 혼자 탓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서울 시내는 주차비도 비싸고 교통도 복잡하다. 하지만 약속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을까. 차를 가지고 갈 수밖에 없었다.


한남대로를 지나 남산1호터널 통행료 2,000원을 결제하며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라섹수술 직후 저녁이면 불빛이 번져 이정표를 읽을 수 없었던 그날. 조카들을 뒤에 가득 태우고 우회로를 찾지 못해 차를 세우고 남편에게 울며 전화했다. "시댁은 찾아갈 수 있겠냐"던 남편은 회사 차를 몰고 와 집까지 나를 에스코트했다. 딸들이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한다. 내가 약하고 서툴렀던 순간을 누군가 받아준 기억. 지금도 그날의 남편은 고마움으로 남아 있다.

거의 도착할 무렵 언니에게 전화했다. "언니, 2번 출구로 나와."


충무로 2번 출구에서 언니를 태우고 내비게이션을 찍으려 잠시 멈췄다. 2분도 안 됐을 텐데 차들이 경적을 울렸다. 조급한 도시의 속도 속에서도 오늘 하루는 지나가고 있었다.

"책방에서 책 읽고 있으면 되는데 굳이 차를 왜 가지고 나왔어." 언니가 말했다.

"약속이라."

"다음부터는 굳이 그러지 마. 나는 편하게 책 읽고 있었어."


언니의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배려가 몸에 밴 사람. 누군가를 위해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

주차장이 없는 가온식당 대신 대한극장 유료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5시 약속은 6시로, 4명은 6명으로 바뀌어 있었다. 늘어난 사람, 밀린 시간. 그래도 괜찮았다.


Lee오빠가 옆 건물 안전신문사 사무실로 가자고 했다. 그때야 알았다. 사장실을 보여주려는 거였구나. 빈손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60년을 살며 배운 예의가 그랬다. 무언가 들고 가야 한다고. 미리 알았더라면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사무실엔 Lee오빠의 이력이 담긴 명패 스무 개쯤 보였다. 기록하는 사진들과 책들이 책상과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중 한 폭의 그림이 내 눈길을 오래 붙잡아 두었다. "이 그림이 이 방에서 최고 마음에 들어요." 웃음 지어 봤다.


Lee오빠가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며 말했다. "평생 처음 여기 와서 차를 끓여본다." 멋지다 칭찬했지만 왠지 쓸쓸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누군가를 위해 서투르게라도 무언가 하는 모습. 완벽한 대접보다 서툰 정성이 더 따뜻하다는 걸. 차를 타주려고 움직이는 오빠 옆에서 결국 우리 둘이 함께 준비했다.

식당엔 손님이 많았다. 우리가 미리 예약해둔 덕분이었다. 동태전과 대구탕찌리, 맛깔스러운 밑반찬들. 오징어볶음을 추가하려 했으나 주방이 바쁘다며 거절당했다. 커피 마시러 가자는 말에도 Lee오빠는 사무실로 다시 모두를 이끌었다. 자기 공간에 사람들을 들이는 일. 그것도 마음을 여는 방식이었다.

주차비 22,000원. M오빠가 카드를 꽂았다. 미안했지만 멋져 보였다. 집까지 모셔다드려야지 하며 웃었다.

거의 다 와갈 무렵, M오빠가 말했다. "미금역에 내릴게." 언니가 가져온 산수유 5개를 먼저 드리고 나머지는 11일에 전해드리기로 하고 미금역에 내려드렸다.


언니네 집에 들러 차에 산수유를 싣고 돌아오며 생각했다.

60세에 작가가 되고, 사람들을 만나는 방식도 달라졌다. 예전엔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불안했다. 선물, 시간 약속, 옷차림까지. 부족함을 보이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오늘은 모든 게 불완전했다. 늦게 출발했고, 빈손으로 갔고, 주차비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편안했다.

Lee오빠가 평생 처음 끓인 커피. M오빠가 먼저 낸 주차비. 남산터널에서 울던 나를 에스코트해준 남편의 그날. 소영언니가 말한 "다음부터는 굳이 그러지 마."

나이 들어 깨닫는다.

받은 만큼 돌려주고 부족한 만큼 채워주는 것. 정확한 등가교환이 아니라 느슨한 주고받음. 빈손으로 와도,

늦어도,

서툴러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마음들.

미리 알려주지 않아도, 준비하지 못해도 개의치 않는 사람들.

그 마음들이 쌓여 우리는 계속 시간을 내어주는것 같다.

다음엔 또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관계는 이렇게, 이야기로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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