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라 지음
1.
'여행기가 어려운 것은 프로든 아마추어든 작가들이 대부분 이 분야에서 자신의 최악의 작품을 써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 윌리엄 진서가 여행기에 대한 글쓰기에서 한 말이다. 그만큼 여행기를 잘 쓰기가 쉽지 않다는 거다. 미국인이 쓴 여행 책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월든'이 꼽힌다. 소로가 읍내에서 벗어난 거리가 1마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월든'이 미국에서 추앙받는 여행 책이란 사실이 흥미롭다. 결국 어떤 장소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인간의 활동이며, 누가 무엇을 하느냐가 그 장소에 나름의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2.
KBS 클래식 FM '세상의 모든 음악'에선 매일 저녁 여행이 배달된다. 아파트 주방 창 불빛이 켜지면서 이동 행렬로 길 위가 붐빌 시각. 6시 40분 무렵이 되면 나는 자발적 정적 모드에 들어간다. 김미라 작가의 '여행자의 노트' 코너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태생적으로 여행자의 그리움을 간직한 목소리' 전기현 진행자를 따라 이국의 낯선 도시와 골목을 거닐다 보면 나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처럼 시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자가 된다. 처음 들어보는 낯선 지명 때문에 세계지도를 펼쳐보게 되고, 여행 책자에 소개되지 않는 소박한 명소를 검색해 보며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새로 써본다. 인증 사진 찍는 여행에 익숙했다면 <열두 번의 체크인> '김미라 작가'의 여행법을 추천한다.
"나는 방송 원고를 준비하듯 시칠리아의 문학과 영화, 그리고 예술가들을 공부했다. 삼각형 스카프 모양을 한 시칠리아의 낯선 지명들도 하나하나 외웠다. 카타니아, 노토, 시라쿠사, 모디카, 라구사, 아그리젠토, 팔레르모, 체팔루...."
김미라, <열두 번의 체크인>,니케북스, 2025, p. 11
김미라 작가는 여행을 떠나기 전 완벽한 파워 J로 철저한 스터디를 하지만, 여행지에선 느긋한 로맨티시스트 파워 P로 움직인다. 일정표를 소화하는 여행이 아닌, 현지의 느닷없는 상황을 향유하며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으로 여행지마다 관련 있는 미술, 역사, 음악, 영화 이야기를 읽어낸다. 빨리 완독 하기보다 느리게 곱씹으며 오래도록 이 책을 곁에 두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르아브르는 2차 대전 때 독일군에 점령되었고,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었던 도시다. 르아브르의 시민들이 폐허 위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진을 나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고생을 하고도 황폐해지지 않은 사람'을 좋아한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파괴되었으나 다시 일어선 도시, 그러면서도 황폐해지지 않은 도시를 사랑한다. 그래서 폐허를 딛고 일어선 르아브르에 남다른 애정을 느꼈다.
김미라 <열두 번의 체크인>, 니케북스, 2025, p114
섬세하고 따뜻한, 그러면서도 작은 디테일도 놓치지 않는 김미라 작가의 해박하고 따뜻한 시선을 <열두 번의 체크인>에서 만날 수 있어 행복하다. 어디를 가도 그곳의 공기, 햇살, 나무의 의미를 생각하고,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심미안을 닮고 싶다.
3.
<열두 번의 체크인>은 '세상의 모든 음악' 코너였던 '여행자의 노트' 확장판이다. 방송에 다 쓰지 못한 또 한 권의 '여행자의 노트'에는 영화의 배경 음악이 되어줄 멋진 곡들이 QR코드가 되어 곳곳에 숨어 있다. QR코드를 누르고, 음악을 들으면서 <열두 번의 체크인>을 읽다 보면, 글로 듣는 '여행자의 노트'를 체험한다. '세상의 모든 음악' 클로징 멘트에 소개되는 PD 안종호, 진행 전기현, 작가 김미라 트리오가 어느새 내 곁에 와있다. 김미라 작가의 글을 읽는 내 시선은 전기현 씨의 내레이션으로 바뀌고, 그 위로 안종호 PD의 배경음악이 흐르고 있다.
여행은 일상에서 지치고 구겨진 마음을 곱게 펴는 일. 그 펴진 마음으로 다시 현실을 살아낼 힘을 얻어 "한 번의 여행은 한 번의 망치질"이라 작가는 표현한다.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우리의 여행 경험은 명료해지는 것 같다. <열두 번의 체크인>은 내게 부드럽게 권유한다. "한 번의 여행은 한 번의 망치질!!!"
시칠리아 여행에는 약간의 자격이 필요하다. 낡고 남루한 것을 사랑할 줄 아는 자격, 약간의 능력도 필요하다. 여행의 모험이 되는 순간을 즐기는 능력, 아무것도 없다고 여겨지는 곳에서 아름다운 것을 호흡할 수 있는 능력, - P22
외로움과 허기가 구분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러니 외로움에 휘청일 때는 스스로를 맛있는 곳으로 데려가 밥을 먹어야 한다. 인생에 허기가 몰려올 때는 스스로를 그렇게 보살펴야 한다는 것을 시칠리아에서 새삼 깨달았다. - P56
해야 할 일 많은 가을에 긴 시간을 내어 여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행을 떠나야 할 이유가 열 가지 있다면 못 갈 이유는 백 가지도 넘었다. 하지만 눈 질끈 감고 떠났다. 그렇다. 여행이란 뒷일 생각같은 건 잠시 접어두고 눈 질끈 감고 떠나는 것이다. 안도현 시인도 여행을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 번쯤 내동댕이쳐 보는 거야‘라고 썼다. - P99
"르아브르는 2차 대전 때 독일군에 점령되었고,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었던 도시다. 르아브르의 시민들이 폐허 위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진을 나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고생을 하고도 황폐해지지 않은 사람‘을 좋아한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파괴되었으나 다시 일어선 도시, 그러면서도 황폐해지지 않은 도시를 사랑한다. 그래서 폐허를 딛고 일어선 르아브르에 남다른 애정을 느꼈다. - P114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감동을 줄 때가 있다. 오래 우리 땅을 떠나 있던 어느 교포의 어눌한 한국어가 감동을 줄 때도 있고, 익숙한 모국어보다 낯선 외국어가 뭉클한 마음을 전해줄 때가 있다. 몽생미셸의 미사에는 바로 그 뭉클함이 있었다. 끝까지 미사를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그곳에서 잠시 영혼의 안식을 누렸다. 비로소 여행지가 아니라 수도원에 온 것이 실감났다. - P152
때론 ‘그 여행에서 어떤 책을 읽었는가‘가 여행의 느낌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리스를 여행할 때 니코스 카찬자키스의 <모레아 기행>을 가방에 넣었던 것처럼, 프랑스를 여행할 땐 또 프랑스를 그리워하게 만들 책을 넣었다. 그때 내 여행 가방엔 베르코르의 <바다으ㅏㅣ 침묵>이라는 소설이 들어 있었다. - P196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을 정말 좋아하는지 알아보려면 그 앞에 가난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여보면 된다. 가난한 애인, 가난한 학생, 가난한 작가, 가난한 연구자, 가난한 여행자, 소르본느에서 떠올려보는 가난한이라는 말이 좋았다.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아서. - P215
독특하고 뭔가 울림이 있는 지명을 알게 되면 마음이 흔들린다. 예전부터 가진 기분 좋은 약점이자 일종의 직업병이다. 어떤 원고를 써야 하나, 막막한 상황에 부딪칠 땐 매혹적인 지명 이야기로 풀어나갈 때가 많았다. 펠로폰네소스 지도에서 모넴바시아를 발견했을 때 그 이름에 먼저 반했었다. - P232
카잔차키스는 모넴바시아를 이렇게 표현해 놓았다.
"이 바위에는 언제나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만 살았다. 바람, 바다, 외로움, 가난이 하나의 망치가 되어 그들의 영혼을 사정없이 두들겨 댔다."
모넴바시아가 얼마나 특별한 곳인지를 알려주는 이 문장을 액자처럼 마음에 걸어두었다. 바람과 바다와 외로움과 가난이 하나의 망치가 되어 영혼을 사정없이 두들겨댄 마을, 그런 영혼의 망치질을 견딘 자부심 강한 사람들의 마을. - P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