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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린 밤의 아이" (가수 바바라 인터뷰)

<섭식장애인식주간>


     2023년 2월 24일부터 3월 2일까지 7일간 한국 최초로 <섭식장애 인식주간>이 열렸다. 그동안 대개 섭식장애는 ‘다이어트를 하려는 여자들의 문제’로 납작하게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폭식과 거식, 마른 몸과 뚱뚱한 몸의 이미지로만 소비하기에 섭식장애는 이미 한국에 만연하다. <섭식장애 인식주간>에서는 당사자, 치료자, 연구자의 입장에서 섭식장애를 바라보며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여성들이 섭식장애로 빠지게 되었을지 입체적으로 살펴보는 자리였다. 이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있는지, 그럴 때 사람의 마음과 신체가 어떻게 반응하게 되는지 드러내는 일이기도 했다.


     어쩌다가 <섭식장애 인식주간>의 라이브 송출 일을 돕게 되면서 나는 행사의 모든 현장에 참석했다. 그 중 셋째날 저녁은 시인 백은선과 가수 바바라가 <우리의 가능세계>라는 이름으로 시 낭독과 음악 공연을 하는 시간이었다. 시인 백은선과 가수 바바라는 모두 섭식장애의 당사자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노래, 시 낭독을 들으며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은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눈가를 훔쳤고, 내 뒷자리에 있던 사람은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코를 훌쩍였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온라인 송출은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기 때문에 행사에 지나치게 집중하면 안 되지만,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내게 친구들의 이야기와 나의 경험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바바라님을 인터뷰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내가 그의 노래를 듣고 울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바바라님은 거의 이삼십 분을 쉬지 않고 자신이 어떻게 섭식장애를 갖게 되었고, 어떻게 만나오고 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그의 이야기에서 묵직한 무게감과 두툼한 두께가 느껴졌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20~30분은 부족하다고, 아직 들어야 할 이야기가 더 있다고 느꼈다. 어떻게 더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안과 여유, 애환과 위트가 뒤섞여 있는 그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고,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는 그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1. 나를 살린 밤의 아이            


고은 <섭식장애 인식주간> 패널로 나오셔서 그러셨죠. 좋은 상담선생님을 만나서 많이 괜찮아지셨다고요. 


바바라 제가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알고 정신과에 다녀온 이야기를 트위터에 썼어요. 그랬더니 트친이셨던 분 중에 한 분이 명함을 DM으로 보내시면서 저를 도와주고 싶다는 거예요. 그분이 지금 제 상담 선생님이에요. 그 뒤로 트위터는 서로 차단헀죠. 아, 진짜 보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잖아요.(웃음) 트위터에도 상담 선생님 잘 못 만난 분들이 많은데, 저는 다행히도 저를 잘 아는 분이 상담을 해주셔서 되게 많이 좋아졌어요.

          상담 초반에는 그만 낫고 싶은 마음에 괴로운 걸 다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상담에서 다 이야기하고 간 날이면 몸에 근육이 다 뭉쳐서 못 움직이고, 집에서 웅크리고 울기를 1~2년 하고 나서 깨달은 거예요. 선생님이 “천천히 하셔야 된다”, “제가 아무리 상담사여도 그때 일을 다 말할 필요는 없다”고 한 말이 맞구나. 그래서 약간 우회해서 접근하기 시작했어요. 상담이라는 게 내가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를 보는 거잖아요.


고은 상담을 통해 바바라님은 스스로를 어떻게 보고 또 어떻게 이해하게 되셨나요?


바바라 작년(2022년) 여름에 제가 좀 힘들었어요. 그때 수술을 하나 했는데, 그 수술하고 나면 호르몬 조절하는 약을 6개월 정도 먹어야 되거든요. 산부인과 의사들이 말을 안 해줬는데, 부작용 중에 감정 기복이 있었던 거예요. 근데 호르몬[조절로 인한 부작용]이라는 건 되게 교묘하게 오거든요. 딱 제 상담 선생님이 한 달 동안 안식월을 가지셨을 때예요. 그냥 제가 뭔가 잘못한 것 같고, 너무 우울하고, 나아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차원이 다르더라고요. 상담 다시 가자마자 오열하면서 너무 힘들었다고 했더니 선생님도 너무 놀라셨어요. 저희는 그때도 호르몬 때문인지 몰랐죠.


          그 당시에 제가 제일 무섭고 힘들었던 건, 제일 힘들었던 건 희망이 없다는 거였어요. 이 지난한 우울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영화 <인사이드아웃>처럼 내 안에서 생겨나고 생각하는 감각들은 다 자기를 위한 거지, 나를 해치기 위한 건 아니래요. 그걸 우리가 어디서 알 수 있냐면, ‘정신 차려야 돼’, ‘약 먹어야지’, ‘힘들지만, 이겨내!’ 이렇게 말하는 존재는 매니저 역할을 한대요. 불을 내지 않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 불이 나면 어떡해요? 그럼 소방관이 와야 하잖아요. 그게 불안이고 슬픔이고 공황, 자살 시도하는 마음이라는 거예요. 


          너무 복잡하잖아요. 그래서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냐고 했더니,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공황이 오고, 숨을 못 쉬겠고, 술 생각이 나고, 자꾸 폭식하는 행위가 소방관이 와서 불을 꺼주는 거라고, 그러니까 죽으려고 하는 걸 막는 거라는 거예요. ‘나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 아, 갑자기 술 먹고 싶다.’, ‘오늘 죽고 싶을 만큼 화가 나니까 5인분 치 먹고 토할 거야.’ 이러면 소방관이 온 거고, 그런 게 없으면 구출하지 못하는 거죠. 선생님이 얘기를 마치신 뒤에 물어보더라고요. 우리 마음 중 ‘밤의 아이’가 사실은 소방관이라고, 나를 지키려고 하는 거라는 얘길 들으니까 어떤 기분이 드냐고요.


          저는 망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스스로를 망치고 있고, 나는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렇게 열심히 나를 망친 것도 스스로를 구하려고 얼마나 신호를 보내고 애를 썼던 건지…. 근데 그건 저만 알잖아요. 내가 애썼다는 게 느껴지니까 되게 고맙더라고요. 그날 그 얘기를 듣고 되게 많이 울었어요. 내 공황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밤에 정말 많은 일을 했거든요. 날이 밝으면 잊고 싶은 그런 일들을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 밤의 아이가 또 나를 살려줬구나’, ‘소방관이 와서 불을 꺼줬구나’. ‘죽고 싶어 하는데 왜 못 죽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소방관이 계속 살리는 거니까 못 죽는 거예요. 사실 구급대원이 왔으니까요.






2. 어, 그럼 누가 잘못한거지?



고은 2011년 1월에 <네오 비트 제네레이션 Neo Beat Generation> 앨범으로 데뷔하셨죠. 그리고 활동이 없으시다가 4월 1일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하셔서 급부상하셨어요. 유희열씨가 신인인데도 싱글이 아니라 12곡을 들고나왔다고 칭찬했다고요. 갑자기 주목받기 전인 1월 24일, 그러니까 첫 앨범으로 데뷔하신 직후에 <마이데일리>와 한 인터뷰를 봤어요. 인터뷰 기사 제목이 자극적이에요. “바바라, 예쁨은 버렸다. 오직 음악으로 승부하겠다.” 2011년이면 한창 걸그룹이 성행하던 때였나요?


바바라 아니요. 그때는 아이유가 독식할 때였어요. 나는요, 오빠가, 좋아요, 삼단 고음 때요. 걸그룹이 대세는 아니었을 때예요. 


고은 기사에는 솔로 여가수가 자기 음악 스타일로 승부를 보는 게 어렵지만, 한번 해보려고 한다고 적혀있어요. 외적인 부분이 아니라 음악으로 승부를 보겠다고 내걸고 등장했는데, 제가 <섭식장애인식주간>에서 들었을 땐 외적인 부분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다고 했었던 것 같아요. 


바바라 저희 회사가 음악 하는 사람들이 ‘유니크한 음악을 하고 싶다’ 하면서 뭉쳐서 만든 회사였어요. 그런데 대표님은 좀 대중적인 사람이라 치프 프로듀서랑 의견이 잘 맞지는 않았어요. 치프 프로듀서는 얼굴 상관없이 음악을 잘 만들고 싶다고 하셨던 분이고, 대표님은 노래 잘하는 예쁜 가수였음 좋겠다고 하셨죠. 처음에는 진짜 그런 생각이었어요. 얼굴은 신경 쓰지 말고 노래를 잘해서 음악을 하자. 그런데 제가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나가서 예상치 못하게 너무 유명해져 버린 거예요. 그때부터 방향이 많이 바뀌었어요.


          사람들이 안 볼 땐 상관이 없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저를 너무 찾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잘나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잖아요. 어디 유명한 대표 기획사, 유명한 사람을 만나면 그들이 제 얼굴을 보고 바로 뭐라고 했어요. 인사하자마자 스캔하고 “수술을 하나도 안 한 건가?”, “너무 연예인 삘이 안 난다~”, “아니, 대표님 얘 병원을 왜 안 데려가요?” "너 몇 키로야?" 제가 53kg라고 하면 “너 53kg 같이 안 보여. 너 지금 60kg는 돼 보여.” 이건 약과고 더 심한 얘기도 많이 해요. 성적으로 안 좋은 얘기도 하고요. 그런 걸 하도 듣다 보니까 회사도 방향이 흔들리게 된 거죠. 


고은 헉, 그렇게 바로요?


바바라 네. 근데 사실 음악으로 승부하겠다고 한 게 ‘연예인치고 안 예쁘려고 하네’ 이거예요. 그래도 연예인은 연예인이어야 한다는 게 있어요. 사실 음악으로 승부한다는 여가수들도, 못생겼다는 개그우먼들도 실제로 보면 엄청 예뻐요. 얼굴로 이미지 메이킹을 안 한 것뿐이에요. 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못생기면 안 돼요.


          그래서 더 힘들었어요. 회사는 바깥에서 음악밖에 없는 것처럼 얘기하길 바라고, 회사로 들어오면 저의 모든 걸 다 마음에 안 들어 했어요. 방송 없을 때는 맨날 운동하고 살 빼기를 바랐고, 메이크업도 배워서 오기를 바랐어요. 대표님이 아는 게 별로 없으셨어서 회사에서도 되게 많은 시도를 했죠. 유명한 코디를 붙인다거나 유명한 대표들을 데려와서 판단하게 한다거나요. 관리를 엄청 시켰어요. 그땐 모순이란 생각도 못 했어요. 왜냐면, 방송에 나가는 건 당연히 어려운 일이니까. 그냥 하나의 작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를 자꾸 검열하게 된 거죠. 


고은 그렇게 급작스럽게 연예계에 휘말리게 되었군요.


바바라 너무 많은 대중의 관심과 메이저의 콜을 받았어요. 사람이 너무 잘 돼도 위험한 게, 준비되지 않았을 때 잘 되니까 제 바운더리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음악 동료가 하나도 없는 거죠. 인디나 재즈로 가기에는 너무 유명했어요. 메이저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메이저이긴 [제가 하는] 음악이 너무 어렵고. 그런데 또 일반인 친구들은 다 나를 연예인이라고, 멋지다고 하고. 모두들 나를 멋있어하고 예뻐하지만, 다들 나를 밖에서만 보는 거죠. 그렇게 고립되었을 때는 되게 억울하고 힘들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내가 어딘가에 낑겼구나, 싶어요. 사람들도 혼란스러워했어요. 저라는 사람은 본성이 소심하고 감성적인데, 음악은 파워풀하고 어려운 음악을 하니까.


          그런데 사실 ‘회사 사람이 지금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거 보면 되게 억울하지 않을까?’, ‘회사 사람은 잘못이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요. 어쨌든 니즈를 맞춰야 하잖아요. 지금은 회사 분들을 다 이해해요. 우리도 천천히 잘되고 싶었는데, 갑자기 잘 된 걸 어떡해. ‘어, 그럼 누가 잘못한 거지?’ 저는 악인이 누구였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저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3. 숨어 먹어야 했던 하루하루


고은 제가 듣기에는 고작 22살, 23살이었던 바바라님이 여기저기 치였다는 느낌이 들어요. 대표님은 대표님대로, 치프 프로듀서님은 프로듀서님대로, 또 누구는 누구대로 자기의 욕망을 바바라님에게 투영시킨 것 같달까요.


바바라 그죠. 투자자도 있고, 회사에는 어른들이 많으니까요. 계속 정신없이 흘러갔던 것 같아요. 여기서 치는 대로 치이고, 저기서 치는 대로 치이고. 그들의 말이 폭력으로 느껴질 만큼 강력했고,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못 할 만큼 바빴고요. 회사 가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가 집에만 오면 계속 울고 부모님도 방에 못 들어오게 하고 그랬어요. 엄마는 도대체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혼란스러운 거죠. 방송에도 나오고 주변에서도 딸이 잘된 것 같다고 하는데. 


          당시를 생각해보면 모든 게 비정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너무 예민하고, 뭔가를 잘해야 된다고 긴장하고 있었어요. 회사에서도 점점 고립됐고요. 먹으면 안 된다고 밥도 안 시켜주고, 혼자 먹고 혼자 연습하고 혼자 집에 갔죠. 당시 정말 큰 방송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해는 해요. 회사도 그런 일이 처음이었으니까, 제가 뭘 먹는 것만으로도 자기들이 스트레스를 받더라고요. 나중엔 먹는단 말도 못 했어요. 내가 누구랑 있든 뭘 안 먹는 게 당연해져서요. 집에서도 그렇고 먹는 일이 혼자 숨어서 하는 일이 돼버린 거예요. 그게 섭식장애로 이어지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고은 사람들 앞에서 내가 먹지 못하겠구나, 하고 처음 느낀 건 언제였어요?


바바라 그때가 3월쯤이었던 것 같은데요. 데뷔한 지 1년 차, 한창 바빴을 때, 갈등이 정말 최고조로 치달을 때, 그쯤에 제가 자면서 먹는 습관이 생겼어요. 손으로 맨밥을 한 솥 먹고 그냥 잠이 들어요. 그럼 아침에 토할 것 같이 깨서 바로 화장실 달려가서 토하고, 그런 일이 몇 번 있었어요. 그때는 그냥 넘겼어요. 일이 바쁘고 뭘 먹지도 않는데 그랬으니까 위가 정상은 아니었겠죠. 제 친구가 팀장으로 있는 피부과에서 팩을 하다가 갑자기 토할 것 같아서 화장실에서 토를 하다가 기절했거든요. 그렇게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의사가 엄청 화를 냈어요.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이거는 거의 사망이라고, 그렇게 호통쳤던 게 아직도 생각나요.


          피검사를 했는데 헤모글로빈 수치가 5.5였어요. 한국 여성 기준 12 이상이 정상이거든요. 6~7 이하는 정말 심각한 상태인 거죠.강남 쪽 응급실에서 집 근처 병원으로 옮겨서 4일을 입원하면서 피 네 팩을 받아서 수치를 10.5까지 올렸어요. 정상 수치는 아니지만, 이제 여기서부터는 노력을 해야 한다더라고요. 제가 피를 수혈받다니 말이 되냐구요, 뭐 큰 병도 없는데요. 내 삶에 약간의 균열을 느꼈죠. 심각하다고는 못 느꼈고요. 근데 그때 대표님한테서 또 전화가 왔어요. “병원 밥 먹고 살 쪄오기만 해 봐, 아주” 다시 정신 차렸죠. 엄마한테 부탁해서 샐러드만 먹었어요. 엄마 아빠도 돌아버리는 거죠. 애가 뭐를 못 먹어서 이렇게 됐는데, 병원에서도 못 먹으니까요. 그때도 치프 프로듀서님은 그냥 먹으라고 했거든요. 하지만 제가 누굴 더 무서워하겠어요.


          그런데 그 뒤로 두 달 뒤에 대표님이 급성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되게 힘들었죠. 갑자기 뭔가 없어진 기분이었거든요. 제가 장지까지 다 갔는데, 대표님 장례식장에서 3일 밤을 새우면서 활동한 뒤 처음으로 맥주를 마셨어요. 거기서 뭔가가 터졌죠. 내가 지금 저 사람 앞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죽도록 취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네, 장례식 음식을 먹어도 뭐라고 안 하네. 감정적으로 힘들고 무서웠는데, 장례식장 이후로 술은 먹어도 살이 안 찐다는 인식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매번 술로 다이어트 약을 넘겼어요. 그러면 안주가 안 먹고 싶어지거든요. 그게 맞는 건 줄 알았어요.


          그러다 약발이 잘 안 받게 되면서 술 먹어도 뭐가 먹고 싶어졌어요. 그렇게 뭘 먹고 나면 무서워서, 참을 수가 없어서 다 토했어요. 그땐 잘못된 걸 몰랐어요. 그냥 급급했죠. 먹어버린 걸 어떻게든 돌이켜야 된다고. 대표님이 돌아가시고 1년 정도 있다가 전 회사 치프 프로듀서님이 만드신 회사에서 다시 시작하게 됐어요. 그 회사에서는 뭐든 마음껏 먹게 해줬는데도 마른 몸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치프 프로듀서님이 들으시면 되게 억울하실걸요?(웃음) 먹고 싶은 거 다 사주고 술도 먹게 해줬는데 뭐가 문제야, 그랬을 거예요.(웃음)






4. 여기가 내 자리인가보다


고은 지금 보컬 레슨을 하고 계시잖아요. 어떻게 보면 바바라님이 힘들게 거쳐 왔던 나이대를 또 만나고 계시는 건데, 그 마음이 어떠실지 짐작이 잘 안 돼요.


바바라 넷플릭스 다큐 <나는 신이다>를 보면서 몇 번이나 중단했어요. 저는 사이비 종교와는 관련이 없지만, 못 견디겠더라고요. 근데 용기를 내서 본 이유가, 저도 메이플님처럼 키가 크고 마르고 성실했거든요. 그게 너무 나 같아서, 이 사람이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 꼭 끝까지 봐야겠다 싶었어요. 그리고 제자들이 다 대학생이라서 너무 답답한 거예요. 정말 취약하거든요. 저는 알잖아요. 10대 여자애들과 20대 여자애들이 얼마나 사각지대에 있는지요. 지금 입시 보려면 다 예뻐야 되거든요. 살을 다 빼야 돼요. 이거 어떻게 해야 되나. 세상이 10대, 20대 여성을 가만두지 않으니까, 마음들을 놓을 데가 없어요. 계속 긴장한 채로 사는 거예요. 


고은 <일다>에 쓰신 기사에서 레슨을 하면서 많은 경험을 했다는 이야기도 봤어요.


바바라 제 레슨에 학생이 많아요. 일주일에 6일 레슨을 하면서 주에 40명 정도까지도 만난 적이 있어요. 이렇게 9년을 했으니까, 400~500명을 만난 거죠. 그러면서 과거의 저와 너무나 많이 만났어요. 제가 중학생 때 학교 폭력을 당했는데, 레슨생 중에 학교 폭력 가해자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저한테는 너무 착하고 너무 잘하는 거예요. 사이가 좋은 거죠. 그런데 그 애가 학교 폭력 가해자라는 얘기를 들으니까 제 마음이 너무 힘든 거예요. 그때 많은 걸 느꼈어요. 이 친구의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고, 주동자 친구도 외롭게 사는 친구였거든요. 가해자들을 이해한다는 게 아니라, 상담을 하면서 그 애와 저의 가해자를 분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 친구 또한 어른의 보호가 필요한 상황이었고요. 그러면서 저도 다각도로 보고 포용할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어찌 되었든 이 친구를 밀어내면 안 되겠다. 


          또 저랑 똑같은 상처가 있는 친구들도 있어요. 자기가 먹토(먹고 토하기)를 하고 있다고 레슨 중에 은밀하게 고백하더라고요. 아무도 모른대요. 당사자들은 자기가 그렇게 심각한 걸 잘 몰라요. 이 아이도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계속 얘기를 하더라고요. 근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거기까지 갔겠어요. 그때 나는 이게 숙명인 것 같다, 싶었어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지난날을 생생하게 만나는 게 제 인생인 거예요. 저는 거기서 도망치고 싶고, 잘나가는 사람들하고만 만나고 싶죠. 그런데 자꾸 고여 있는 데서만 저를 필요로 하는 거예요. 마음 아픈 사람들만 보여요. 그런 저 스스로가 너무 싫었던 적도 있었어요. ‘아 정말 너무 싫다’


          그런데 이제는 여기가 내 자리인가보다 해요. 제가 총대를 메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운명처럼 저에게 와요. 요즘엔 그냥 헛웃음 지으면서 받아들이고 있어요. 저는 진짜 한 번도 ‘내가 섭식장애와 관련해서 할 일이 뭐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거든요. 나서서 그런 얘기하기 싫어요. 그런 면을 빼고 보이고 싶죠. 누구나 다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지, 아팠던 걸 보이고 싶진 않잖아요. 근데 자꾸 그런 상황이 저에게 와요. 아니, 4년 만에 생긴 무대가 섭식장애 무대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웃음) 지금 소속사 대표님도 공연 끝나고 이 주제로 가사를 써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이거는 뭐 어쩔 수가 없구나 싶어요. 






          바바라님은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준비하면서부터 인터뷰 당일까지 트라우마가 생생하게 올라온 상태라고 했다. <섭식장애 인식주간> 이후로 받고 있는 연락들도 한 몫 했댔다. 너무 좋았다고, 이야기 나눠주어서 고맙다는 말일 테지만, 아무리 좋은 피드백일지라도 과거를 단박에 아무렇지 않게 만들지는 않을 테니까. 그는 섭식장애 이야기를 하기 싫었다고, 지금도 너무 힘들다고, 인터뷰가 끝난 뒤에 또 얼마나 힘들어질지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는다. 인터뷰를 좋아하지 않지만 섭식주제에 관해서는 이야기하겠다고 응하고, <일다>에 섭식장애에 관한 무척 긴 글을 쓰고, 찾아오고 연락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눠준다. 생생하게 마주하게 되는 과거 때문에 혼이 쏙 빠질지라도, 찾아오는 이들을 마다하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만난다.


          인터뷰를 하며 그가 가진 힘에 놀랐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계속해서 대면하면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과거 자신들의 욕망을 투영하느라 바바라님을 거센 해류 한가운데로 몰아넣었던 이들을 복기하면서도, 자신이 당했던 폭력을 비슷하게 행한 가해자를 만나면서도, 다시 떠올리면 괴로운 기억을 생생하게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는 버텼다. 자신을 괴롭히고 또 살리는 밤의 아이와 함께 웅크리고 서서, 보컬 선생의 자리에 서서, 섭식장애 당사자의 위치에 서서 버텼다. 넘어지고 부서지기 십상인 자리에서 피하지 않고 버틴다는 것은 분명 능력이다. 거기엔 괴로운 사람과 상황을 내치지 않고 포용하는 넓은 마음, 계속 듣고 계속 말해주는 용기, 그리고 여기가 내 자리라고 받아들이는 강단이 필요하다.


          바바라님을 인터뷰하고 돌아와서 심적으로 평탄치 않은 며칠을 보냈다. 비교적 경미했던 과거의 섭식장애 경험과 보다 훨씬 아팠던 나의 친구들이 떠올랐다. 그 이야기를 듣는 나도 쉽지 않았는데, 직접 이야기를 꺼내야 했던 바바라님은 얼마나 힘들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인터뷰 글을 열심히 썼다. 바바라님이 버티고 서있는 자리에, 그 옆에 잠시나마 같이 버티고 서있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분명 누군가는 나처럼 바바라님 덕분에 외면하고 싶은 기억들을 대면하고, 바바라님처럼 버텨볼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Singer Barbara 노래하는 바바라

Insta  @barbara_kiki

Youtube  https://www.youtube.com/@singerbarbara9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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