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가 보여주는 여름夏
여름을 의미하는 한자인 하夏는 정확한 유래가 전해지지 않는 특이한 한자다. 형태적으로 보면 사람의 머리頁(머리 혈)와 양팔臼(절구 구), 양발夊(천천히 걸을 쇠)로 이루어져, 사람의 형상을 보여준다. 이렇다 보니 과연 어떤 사람의 모습이 여름을 의미하게 되었는지 여러 추측이 있다. 의젓하게 어깨를 펴고 서 있는 어른의 모습으로 보기도, 더운 날씨 때문에 바람이 다리 사이로 통할 수 있게 벌리고 앉아있는 사람으로 보기도, 그냥 여름을 상징하는 매미로 보기도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는 건 기우제를 지내는 무당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는 설이다.
夏의 초기 자형을 보면 마치 첫 번째 그림처럼 관을 쓴 무당의 빠른 발동작이 보이는 듯하다.
기우제는 고대에 여름이 시작되는 5월 초의 입하立夏부터 가장 큰 규모로 이루어지는 국가적 제사였다. 여름이 시작되고서부터 3~4일 동안 정기적으로 여름 동안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이렇게 큰 공을 들였던 이유는 작물들이 자라려면 비가 잘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여름이 되면 빗줄기가 굵어지고 강수량도 많아지면서 본격적으로 작물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이렇듯 여름의 힘을 한마디로 정리해본다면 봄에 태어난 생명력이 본격적으로 성장을 이루는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름의 모습을 절기를 통해서 알아보자.
여름 절기의 흐름을 보면 주로 풍경을 보여주던 봄절기와 비교해 고대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상을 상상할 수 있다. 여름이 시작되는 입하立夏가 지나고 세상에 만물이 가득 차오른다는 소만(小滿)이 되면, 나무와 들판 가리지 않고 무성히 잎들을 뻗어 올린다. 이렇게 풀들이 자라는 건 텃밭에서도 마찬가지라 이 시기부터 상추, 쑥갓, 콩 같은 작은 작물을 수확할 수 있게 된다. 춘궁기를 보내면서 힘들었던 사람들에게 소만(小滿)의 소(小)는 이런 작은 작물과 함께 작은 만족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만이 지나면 망종(芒種)이 된다. 芒은 보리나 벼 같은 작물의 껍질인 까끄라기라는 의미로 망종에는 벼농사를 시작한다.
그런데 벼농사를 시작하기 전, 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봄 동안 키워온 보리를 수확하는 일이다. [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소만 이후, 그리고 망종이 오기 전까지 보리농사를 마무리 지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망종 전에 보리를 수확해야 했던 것일까? 보리를 길렀던 곳에 물을 채워 벼농사를 지었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벼농사를 짓기 전 보리를 수확해야 했던 이유는 자리 문제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만 이후 사람들은 작은 작물들을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자고로 배를 든든히 채우려면 곡물이 있어야 한다. 농사를 짓는 일은 국가의 사업과 마찬가지였는데 그런 일을 굶주린 상태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본격적으로 벼농사가 시작되는 망종 전에 벼를 수확해 곳간과 배를 든든히 채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절기만 봐도 여름이 되어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보리가 다 자라 수확하고, 모내기를 시작하고, 그 밖의 작물이 자라나는 속도에 맞춰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름이 되면 국가에서는 기우제를 통해 한 해의 농사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비가 내리길 기도하고, 사람들은 보릿고개 동안 자란 보리로 배를 채워 하루하루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6월 하순에 태양이 가장 오래 떠 있는 하지가 지나가면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시작해 조금 더운 소서(小暑)와 아주 더운 대서(大暑)가 되면 여름 절기가 끝난다. 이때부터 여름, 하면 떠오르는 무더운 날씨가 시작되기 때문에 나로서는 어떻게 보내야 할지 걱정이 시작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사람들은 무더운 날씨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지난 글에서 봄 춘(春)에서 태양日이 아래에 있는 것을 통해 땅이 태양의 기운을 담고 있다 해석한 적이 있다. 그런데 한여름의 무더위를 나타내는 더울 서(暑)를 보면 태양日이 머리 위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기가 되면 봄에 땅이 품고 있던 양의 기운이 하늘 한가운데에 자리 잡아 절정에 달한 시기로 바라봤다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다.
고대 사람들은 세계의 원리가 음과 양의 반복(一陰一陽)이라 생각했다. 이걸 사계절의 운행에도 적용할 수 있었는데 음과 양의 반복으로 한번 덥고, 한번 추운 사계절의 흐름을 간단히 정리할 수 있었다. 일양에 해당하는 여름에 고대 사람들은 소서와 대서 절기를 통해서 단순히 점점 더워진다는 점이 아닌 더위를 통해 양의 기운이 더 강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과연 무엇을 양의 기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여름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빗방울이 강직하고 활발하게, 때로는 요란하게 내리고, 앞뒤를 가리지 않는 뜨거운 열기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모든 색을 선명한 빛으로 만드는 밝은 햇빛, 그 태양을 향에 줄기를 뻗어 올리는 식물들... 이 모든 것이 여름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양의 기운이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고대 사람들이 소서와 대서를 통해 점점 강해지는 양의 기운의 변화를 기록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주역의 한 괘를 보고 소서와 대서가 일종의 경고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주역에는 과도하게 양의 기운이 세지면 화를 입게 된다는 내용을 가진 택풍대과(澤風大過, ䷛)라는 괘가 있다. 이 괘를 보면 양의 기운이 가장 강한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 괘의 형상을 보면 상괘에는 연못을 상징하는 택괘(澤, ☱)가, 밑에는 나무를 상징하는 손괘(巽: ☴)가 있다. 보통 나무는 연못의 물을 먹으며 자라는데 택풍대과의 형상을 보면 연못이 넘쳐 나무를 삼킨 것처럼 보인다. 언뜻 보아도 좋은 형상으로 보이진 않는다. 양의 기운이 과도해졌다는 모습을 통해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대과괘는 들보 기둥이 휘어지는 것이니, 나아갈 바를 두면 이롭고 형통하다. (택풍대과, 괘사)
大過 棟橈 利有攸往 亨
대들보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걸쳐 지붕을 받치는 커다란 나무로 전통 가옥의 핵심이다. 벽과 지붕을 이어주기 때문에 건물의 힘을 가장 많이 지탱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택풍대과는 양의 기운이 과해진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양의 기운이 과해지면 집이 무너지게 되는 낭패를 본다는 거다. 다만 괘사에서는 무너지게 되더라도 [나아갈 바를 두고] 무너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여놓았다. 나아갈 바를 둔다는 건 대들보가 쓰러지더라도 그 이후의 거취를 미리 염두에 두거나 쓰러지더라도 어디를 향해 쓰러지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흔들리는 대들보를 미리 알아차려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내려앉은 집에 허망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고대 사람들은 소서와 대서를 통해 양의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있으니 잘 살펴야 한다는 일종의 경고를 한 것 같다.
그런데 과연 양의 기운이 과해지는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살펴야 하는 걸까? 여씨춘추에서는 여름에 특히나 욕망을 조심하라고 말한다.
기호와 욕망이 끝이 없으면, 반드시 탐욕스럽고 비열하고 어그러지고 난잡한 마음과 방탕하고 흐리터분하고 간교하고 거짓의 일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윽박지르고, 수가 많은 쪽이 수가 적은 쪽에 사납게 굴고, 용감한 자가 겁내는 자를 업신여기고, 나이가 많은 자가 나이가 어린 자에게 오만하게 구는 것들은 모두 이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여씨춘추 중하기)
且夫嗜欲無窮,則必有貪鄙悖亂之心,淫佚姦詐之事矣. 故彊者劫弱,眾者暴寡,勇者凌怯,壯者傲幼,從此生矣.
윽박지르고 사납게 되고 누군가를 업신여기는 모습은 그야말로 중심이 무너져내린 사람의 모습이다. 도대체 욕망이 양의 기운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여씨춘추>에서 욕망을 조심하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강하게 앞으로 나아가려는 기운이 과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의미다. 여름은 사계절 중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시기다. 봄에는 생명이 깨어나고 가을이 되면 이제는 작물이 자라지 않고 겨울은 모든 생명이 잠든다. 고대 사람들은 한 해 동안 눈에 띄는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 여름에 가장 애써야 했다. 한 해의 농사가 모두 여름에 달렸으니 얼마나 초조했을까. 그렇기에 어느 시기보다도 바쁘게 움직여 일해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초조함 때문에 많은 성장을 이루려는 욕망을 앞세우지 않도록, 완성하는 양의 기운에 경도되어 휘둘리지 않도록 해야 했다.
양의 기운과 욕망은 어떤 점에서 닮아 보인다. 앞으로 곧게 뻗어 나가는 모습이 그렇고, 떠올리면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비슷한 건 '어떤 움직임'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욕망은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욕망을 통해 우리는 때로 목표를 이루기도, 그 과정에서 성장하기도 한다. 택풍대과의 괘사에도 결국 대들보의 움직임을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양의 기운이지 않은가. 여씨춘추에서는 욕망을 조심하라고 했지만, 사실 고대 사람들은 욕망을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욕망의 자연스러움 만큼이나 여름의 더위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여름이 성장을 위한 시기라면, 여름의 열기와 욕망은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여름의 열기와 욕망의 관계를 알고 나니 그동안 여름을 성장을 위한 시기라 생각하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됐다. 여름의 더위가 싫어 괴로워했는데 이제는 여름의 성장하는 힘을 통해 내가 하는 일들을 잘 진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소서가 지나 대서가 되면, 혹시라도 여름의 열기와 욕망에 휘둘리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씩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