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혜정 Feb 01. 2016

어쩌다 회사를 차려가지고

어른이 여러분, 당당하게 놀려면 개인사업자를 내십니다.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언제 되었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지금 확인했다.


작가 소개란에 나를 뭐라고 소개할지 잠시 멍하게 (멍한 이유는 하나다. 술을 마셨기 때문에 머리가 안 돌아가서) 생각하다 보니,  나를 부르는 호칭들이 떠올랐다. 작가님, 강사님, 선생님, 박사님, 대표님, 드러머 누나 <-?


그래서 그걸 다 썼다.

내 손으로 멋대로 써재낀 프로필임에도, 써놓고 보니 어쩐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잠시나마 뿌듯하다.

하지만 다들 익히 알다시피 다양하게 들쑤석거린다는 것은 뭐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게 없다는 뜻이다. 명함에 슬래시를 쳐가며 너저분하게 이것저것 써넣은 모양새 만큼이나 구차한 것이다. 게다가 내가 이 호칭 저 호칭 자청한다는 것이, 하나의 호칭에 부끄럽지 않도록 일편단심 매진하는 전문인들을 모욕하는 것이기도 하다.


심지어 당장 몇 달 뒤엔 대표님이라는 호칭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 회사가 왜 망했는지, 마침 브런치 작가도 되었겠다, 연작으로 쓰면서 뻔뻔하게 연명해야지.

이런 제목이면 눈길을 좀 끌 것 같다. '정부 지원받던 스타트업, 왜 소리 소문 없이 망했나?' 어쩌면 '눈먼 돈' 또는 '지원금 헌터를 못 걸러내는 지원 제도의 맹점' '전문성이 없는 공무원'이란 말들로 점철된, 괜스레 통찰력 있어 보이는 댓글이 마구 달리면서 단번에 인기 글이 될 지도 모른다(망상)


여하튼 난 현재 호칭이 많다. 쌈박하게 하나로 딱 정하고 싶었지만, 천성이 구차해서 늘어놓기로 한다.

그중에서 언제 사라질까 가장 아슬아슬한 호칭은 역시 v대표v다.

스스로 생각했을 때, 나한테 가장 안 어울리는 호칭이기도 하다.

난 수줍음도 많이 타고, 존재감도 없고, 낯도 많이 가리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친화력도 없다.

대표가 가져야 할 미덕과 가장 먼 곳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쩌다 회사를 차려가지고.


일단 술도 취했겠다 첫 글이니까, 아무도 궁금하지 않겠지만 이런 한심한 내가 어쩌다 회사를 차렸는지부터 말해볼까 한다.




사업자를 내기 직전, 당시 난 놀고 있었다.

알차게 노는 게 아니라, 쓰레기처럼 가만히 놀고 있었다.

아니다. 쓰레기는 바람 불면 나뒹굴거리기라도 하지.

나는 뭍으로 끌려나온 심해어처럼, 나라는 모습을 유지해주던 압력이 다 사라졌다는 듯 흐물흐물 풀어지고 있었다.

커버 사진이 될 뻔한 심해어 녀석. 원래는 멀쩡하게 생겼는데, 뭍으로 나오면 이 녀석의 형체를 유지해주던 수압이 사라져서 마구 부풀고 일그러진다고 한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박사를 드디어 끝내고, 긴 터널을 달려 나온 결과가 무려 집구석에서 노는 거였다. 집안일은 일대로 하면서, 그저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자조적으로 '집에서 놀아'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집이란 장소에서 숨만 쉰다.


1) 늦은 오후에 눈을 뜨면, 그대로 저녁이 될 때까지 배고픔에 절면서 누워만 있는다.

2) 그러다 저녁에 허기진 채로 겨우 몸을 일으켜 술을 마신다! 알코올!

3) 그러다 새벽녘에 잠들고 다음날 늦게 일어나 다시 신나는 심해어 체험.


CD 케이스에 올려놓은 지우개 같이 침대에 들러붙어 있으면서도 당시의 난, 그간 고생했으니 여유 있을 때 쉬어두는 것이라고 편리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박사까지 했으나 결국 취업의 벽에 가로 막힌 30대(청년 세대 불쌍해)'

'고학력 경력 단절 여성(한국 여성 불쌍해)'

라는 폴더에 나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똑똑하다 믿는 사람들일수록, 타인을 판단할 때는 자신의 카테고리 폴더 중 이거다! 싶은 걸 열어서 후딱 집어넣어 분류하는 경향이 강하다. 일단 폴더에 넣으면, 그 사람을 다시 꺼내보며 정보를 갱신하기보다는 그냥 자신이 붙여 놓은 라벨만 반복해서 볼 뿐이다. 그 사람에게 딱 맞는 새로운 폴더를 만드는 수고는 하지 않는다. 나라고 타인에 대해서 안 그럴 자신이 없으니, 되도록이면 내가 가진 폴더를 늘리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여하튼 간에, 그래서 나는 '박사 실업자'도 아니고, '경단녀'도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내가 들어간 폴더를 걷어차기 위해, 실은 세상이 원하는 인재임을 증명하려고 회사를 차렸는가?

아니다.

정말로 할 일이 없었다.

그들이 욱여넣은 폴더는 하필 나를 설명하기에 딱 알맞았다! (똑똑한 이들의 선입견 대단해)

그렇다한들 듣고 싶지는 않은 평가였다. 동정은 사양하고 싶었다. 난 새롭게 할 일을 고민하기보다, '내 의지로 쉬고 있는 것'이라는 스탠스로 보일 방법이 없는지를 더 진지하게 고민했다.

뭔가... 남 보기에 안쓰럽지 않게 놀고 싶은데?


그래서 개인사업자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조원희 감독님이 그랬다. 놀아도 '시나리오 구상  중입니다'라고 하면 그럴 듯하게 놀 수 있다고. 개인사업자를 내고 놀면 "사업 구상 중입니다"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경단녀니 고학력 실업자니 하는 명절날 친척들 같은 눈초리를 받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한 번 그렇게 떠오르니, 아주 좋은 생각 같았다. 그래서 재빨리 행동에 옮겼던 것이다. (물론 이 생각이 순진했음을 바로 깨닫을 수 있었다)


그렇다. 내 회사는 있어 보이게 놀기 위한 장치였다.

그리고 이것이 내 삶을 바꾸기 시작했다.



(커버 아트 : 김도윤 작가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