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밀린 서류를 얼추 처리하고나니, 소금물에 푹 절인 배추마냥 온몸이 축축 늘어졌다. 재택에 들어간 팀장의 빈자리를 흘깃 봤다가 뱅글뱅글 의자를 돌려가며 지렁이 기어가는 무늬의 천장을 올려봤다가 옆축이 떨어진 슬리퍼를 잡아당기며 손장난을 치다가... 문득 건너편 사무실의 홍프로가 궁금해졌다. 나는 홍프로 자리에 가볼 요량으로 엉덩이를 들썩거리다 말고, 홍프로네 부장 얼굴이 떠올라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다크써클로 줄넘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퀭한 눈의 홍프로네 부장은 과묵할 것 같은 외모와 달리 일름보였다. 공주임이 일은 안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놀러다닌다고 윗분한테 고자질할 수도 있으므로 나는 홍프로에게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마침 어제 있었던 창업 스터디에서의 대화가 흥미로웠으므로 그 주제로 홍프로를 유혹해봐야겠다 했다.
“TF가 결성됐는데 그 중 몇몇이 일을 안 한다. 어떤 안건이 생기면 대책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아주 시니컬한 태도로 비판만 한다. 개인으로 보면 정말 엘리트이고 능력이 많은 사람들인데, 함께 프로젝트를 하려니 굉장히 힘들다. 업무분장이 제대로 안 된다. 이런 얘기요.”
창업 스터디에서 나는 몇 달 전 꾸려진 TF 구성원들의 면면과 업무분장이 제대로 안 돼서 생기는 불편한 감정들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들을 불러다 얘기를 해야 하는 것인지, 그냥 나머지 팀원들이 그들 몫을 더해야 하는 것인지 물었다.
“그랬더니요?”
홍프로가 빠른 답장을 보내왔다. 물음표 끝에는 호기심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랬더니 그건 그들 잘못이 아니라 그 TF를 꾸린 상급자의 잘못이래요.어떤 팀을 만들 때는 팀원 개개인의 능력도 고민하지만 팀원 간의 시너지까지 고려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으니 책임은 그 팀을 꾸린 상급자가 져야 한다고요.그리고 팀원 구성도 잘못 됐대요. 어떻게 제일 중요한 PM(Project Manager)이 외부인일 수가 있냐고요. PM으로 외부인을 들였다는 건 내부에 그 사업에 대한 이해도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 거라고요. 총 6명 중 내부인이 5명이고, PM이 외부인이면 이 팀은 잘 굴러갈 수가 없대요. 갈등은 내부인 간에 일어나는데, PM이 여기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냐고요. 너무 정확하죠?”
“그럼 그냥 손 놓고 있어요?”
“그럼에도 프로젝트를 잘 완수하고 싶다면 그들한테 차도 사 주고, 밥도 사 주래요. 속 얘기를 듣고, 이해하면서 공감대를 쌓아서 협조하도록 해야 한대요. 그래서 아침에 마음을 탁 먹고 왔어요. 내가내가 아침에 그 사람들 얼굴 보면 커피도 사 주고, 오늘 점심도 사 줘야지. 그리고 무슨 얘기 덧붙일 것도 없이 잠자코 잘 들어줘야지 했어요. '내가 무조건 이해할 거야' 하는 맘으로 출근을 했어요. 그런데 아침에 딱 얼굴을 보는 순간, '아, 내가 그 정도 그릇은 안 되는구나. 난 글렀어.' 했어요.”
“음.. 저도 그 정도 그릇은 안 되는 거 같은데…”
스터디에서 대표는 어느 대기업 사장과의 일화도 들려주었다. 20대 때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녀의 아버지가 대기업 사장님이었단다. 하루는 그 분께 어떻게 그 많은 사원들 중에서 임원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를 물었단다. 대답은 아주 명쾌했는데,
“잘 사 줘.”
였다고 했다. 만 명이 넘는 사람들 중에 사장 자리까지 올라가는 사람은 겨우 10명 남짓. 그 엄청난 확률의 주인이 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주변에 밥을 잘 사 주는 것이었다고 했다. 대표는,
“잘 사 주는 사람들은 나중에 사 주는 자리에 가 있어요. 늘 얻어먹는 사람은 얻어먹는 거밖에 못하는 자리에 가 있고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동물의 세계에선 밥 주는 사람이 주인이에요.”
“그래서 대표가 저한테 그랬어요. 잘 사 주라고. 그 습관이 네 미래 자리일 수 있다고요.”
“습관이 미래 자리일 수 있다는 건 참진리지, 근데 저는 잘 사 줘 봤는데 그냥 봉이 되는 느낌이었어요.”
우리는 잠시 웃었다.
“두 번째 고민도 얘기했어요. 연차가 쌓일수록 나는 퇴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마음도 더 좁아지고, 사내 관계도 더 좁게 가져가고 싶고, 협력하고자 하는 마음, 잘하고 싶은 마음도 점점 더 사라진다. 대체 성장이란 무엇이냐?”
“캬아- 그런 걸 들어주는 스터디가 있어요? 그랬더니요?”
“두 가지 의미에서 성장이라고 한대요. 하나는 시야가 넓어지는 것이래요. 그래서 전체를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래요. 막 들어와서는 뭐 모르니까 지 꺼만 하고, 그 앞에 놓인 것만 보다가 성장하게 되면 다른 부서의 업무, 관련 시장, 사업 방향 등 전체를 놓고 고민할 수 있게 된다고요. 둘은 디테일이래요. 시야가 넓어져도, 고민을 많이 해도, 디테일이 떨어지면 실행을 할 수가 없대요.”
“음.. 뭣 모르고 지 꺼만 하다가, 나갈 때까지 지 꺼도 못하고 나가는 사람은 성장을 포기한 거네. 들어보니까 세 가지인 거 같아요. 디테일하고 실행력은 다르니까. 연차가 쌓였는데 디테일하게 고민만 하면 안 될 거 같아요. 세 가지로 해요. 앞으로. 넓은 시야, 디테일, 그리고 실행력.”
“음, 좋다. 그래서 대표가 제 연차에 그런 고민을 한다면 선택을 하면 된대요. 나가든지, 바꾸든지, 순응하든지.”
“멘토단이다 멘토단.”
“하나 더 있는데 마저 들어 보실래요?”
시곗바늘은 어느덧 퇴근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홍프로와의 대화가 자못 재미있어서 그녀를 좀더 붙들어 놓고 싶었다.
“말씀하세요. 기다리는 메일이 있어서 10분 정도 더 있어야 할 거 같으니.”
“제가 회의록은 누가 써야 하냐고 물어봤어요.”
“그 스터디에서?”
“네. 그리고 스터디원들의 회사에서는 누가 회의록을 쓰냐고도요.”
“누가 쓴대요?”
“팀장이 쓴다, 막내가 쓴다, 우린 안 쓴다 등등 많은 얘기가 나왔는데, 대표 얘기는 회의록은 팀장이 써야 한대요.”
“헙!”
“그래야 회의록에 힘이 생겨서 그 일이 실행될 수 있대요. 회의록은 정리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일을 잘 진행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기 때문에 팀장이 정리해야 팀원들에게 영향을 미친대요.”
“보통 막내가 쓰는 이유를 보면 잡일이라는 관점 하나랑, 우리가 '고쳐 줘야 하니까'의 두 가지 관점이 있는 거 같아요. 한마디라도 가르치려 들고 말이죠.”
“제가 그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어느 날 이게 막내가 쓰는 것이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당신들은 어떠냐. 대기업에서는 막내가 많이 쓰는 거 같은데, 그 이유는 보통 압축적으로 일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서이지 잡무를 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고 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나는 대체 어떤 조직에서 일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이 많아져서 잠을 못 잤어요.”
홍프로는 한참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메신저 창 하단에는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습…'
라는 알림이 떴지만 홍프로로부터 더이상의 답장은 없었다. TF의 구성 초기에 팀장직을 제안 받았던 그녀는 어쩐 일인지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홍프로 옆에 가 '팀장직 받고 월급 좀 더 올려달라고 했어야지 그걸 걷어찼냐'며 원통해 하는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조직의 코어를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이 TF가 어찌될지 시작도 전에 앞날을 짐작했던 그녀는 내 얘길 듣고 시름이 깊어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