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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정 Feb 21. 2024

그럼에도

내게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학생들은 직업도, 연령도, 국적도 다양한데 홍콩의 다섯 살 어린이가 가장 어리고, 중국의 일흔두 살 어르신이 가장 연장자이다. 


개인적으로 10세 이하 어린이와 60세 이상 어르신을 학생으로 받기 부담스러워 하는 편이다. 이유는 10세 이하 어린이 수업에서는 카메라엔 어린이만 잡히지만 카메라 뒤에는 아이를 너무 사랑하는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온가족이 아이가 수업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은 학생에게 질문했는데 카메라 뒤에서 자기도 모르게 수업에 열중했던 어린이의 아버지가 냉큼 대답을 해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던 일도 있다. (이날 비로소 온가족이 내 수업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르신들은 수업을 하면서 자꾸 당신 젊었을 적 이야기를 털어놓으시는데 이걸 들어드리는 에너지가 수업을 하는 에너지보다 많이 든다. 무속인으로부터 '남한테 기를 빼앗기는 타입이니 사람 많은 데 가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을 정도로 사람에게 에너지를 많이 쏟는 타입이라, 하는 수업이 아니라 듣는 수업을 마친 후엔 침대에 얼마간 엎드려 있어야 한다.    


어느 날 중국의 일흔두 살 어르신이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연락을 하셨기에 이유를 여쭈니

한국에서 산 지 10년이 넘었는데 한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게 부끄러워서라고 했다. 한국어도 이웃에 사는 조선족들이 하는 몇 마디를 어깨 너머로 배운 게 다라며 앞으로도 한국에서 쭉 살아야 하는데 입이 있는데도 말을 못해서 답답하다고 했다.  


보통은 '한국어를 배우는지, 얼마나 배웠는지, 어디에서 배웠는지, 한국어능력시험(TOPIK) 성적을 딸 계획인지, 그 성적표를 어디에 활용할 것인지, 어떤 교재로 배우고 싶은지, 이전에 공부했던 교재가 무엇인지, 특별히 관심 있는 주제가 있는지' 등등 꼬치꼬치 묻는 편이지만 어쩐지 이 분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아 더 묻지 않고 서둘러 체험수업을 종료하려고 하니


"남편이 한국 사람이었어요. 내가 도망갈까 봐 한글을 못 배우게 했어요. 작년에 남편이 죽었는데, 남편이 죽고나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글을 모르니까 은행도 못 가고, 기차표도 못 끊어요. 내가 남편 죽고서야 자동차 운전면허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오늘도 학원에 가서 운전 연습을 하고 왔어요. 이제 한국어도 제대로 배워서 내가 내 말하면서 살고 싶어요. 그러니까 선생님 나한테 한국어 좀 가르쳐 줘요."


나는 잠시 할 말을 찾기가 어려워 허둥대다가 정규 수업 시간 예약을 잡은 후 수업을 마쳤다. 혼자서도 한국어를 공부할 수 있는 갖가지 앱과 사이트를 안내하면서 '충분히 고민해 보고 연락달라'며 친절한 척, 사실은 수업 등록을 안 받으려던 나의 속내를 들킨 것 같아서였다. 


반려자를 떠나보낸 뒤 남겨진 자리는 황망하고, 외롭고, 당황스러울 것이다. 남편의 땅에서 생전 처음 배우는 운전과 남편 나라의 말은 어떤 풍경일까. '그럼에도 나를 놓지 않고 다시 배우기를 택한' 삶을 대하는 이 어르신의 태도에 한편으로는 감동스럽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워서 한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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