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생각한 것 03_ <예술의 유토피아 : 아도르노의 문제의식>
영화의 예술됨은 무엇으로 시작될까.
필자가 영화 전공을 하며 만난 많은 영화학도들은 자신들의 작업과 고민을 자연스럽게 ‘예술’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비슷한 계열이지만 영상이나 방송을 전공하는 이들이 제작하는 영화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예술적 가치가 낮다는 뉘앙스를 보이기도 했다. 사실 필자 역시 그러한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졸업을 한 지금,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과연 그들의 영화와 우리의 영화는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물론 영화 언어의 기술적인 완성도나 플롯을 다루는 방식에서 전공자와 비전공자 사이에 일정한 차이는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술은 결국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작업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근본적인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결국 질문은 다시 돌아온다. 영화가 예술로서 성립하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는가. 단지 필자가 다녔던 학과의 이름이 ‘영화예술과’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왜 영화는 다른 미디어들과 달리 ‘예술’이라는 단어와 더 쉽게 연결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들이 막연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무엇이 영화를 영화이게 만드는 것일까. 우리는 보통 영화의 시작을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 <기차의 도착>에서 찾는다. 그러나 기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영화의 원형적 시작은 토머스 에디슨이 개발한 키네토스코프에서 이미 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키네토스코프에서 상영된 영상들을 영화의 시작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이 단지 ‘움직이는 영상’에 머물렀을 뿐, 다수의 관객이 동일한 시간을 공유하며 함께 감상하는 상영의 문화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의 탄생은 단순히 움직이는 이미지를 기록하는 기술의 발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를 공동의 경험으로 만들어내는 상영의 형식과 문화가 등장하는 순간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화는 하나의 기술적 장치라기보다, 관객과 스크린, 그리고 공동의 시간을 매개로 성립하는 하나의 사회적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관객을 서로 밀착된 좌석에 앉혀 특정한 시선의 위치에 고정시키고, 암막으로 차단된 거대한 공간 속에서 압도적인 사운드와 거대한 스크린을 통해 창작자의 언어와 메시지를 강하게 제시한다. 이러한 장치는 관객을 하나의 디스포지티브 속에 위치시킨다. 관객은 어둠 속에서 움직임이 제한된 채 동일한 화면을 바라보며, 영화가 구성한 시간과 시선의 질서에 자연스럽게 편입된다.
비록 발터 벤야민은 복제 기술의 시대에 예술 작품이 지녔던 고유한 아우라가 소멸한다고 말했지만, 역설적으로 영화관이라는 공간은 또 다른 형태의 아우라를 생성한다고 볼 수 있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스크린을 마주한 관객의 경험은 일종의 의례적이고 집중된 감각을 만들어내며, 이는 과거 예술품이 지녔던 현존성과 유사한 혹은 사이비적인 감각을 재구성한다. 결국 영화는 단순한 영상 콘텐츠가 아니라, 특정한 공간과 장치, 그리고 관람 방식이 결합된 하나의 감각적 경험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창작자의 시선과 메시지는 관객에게 더욱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전달될 가능성을 갖는다. 따라서 영화라는 매체는 다른 콘텐츠에 비해 창작자의 의도를 집약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독특한 매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의 형식적 성향과 수용 방식은 아도르노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문제적인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형식은 오늘날 문화산업이라는 시대적 헤게모니 속에서 관객에게 동일한 감정과 의미를 주입하려는 경향을 쉽게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방식의 영화는 동일성의 논리에 포섭될 위험을 지닌다. 따라서 아도르노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형태의 영화는 예술로 명명되기 어렵다.
아도르노의 철학을 살펴보면 그는 언제나 동일성이 만들어내는 전체성을 경계했다. 마치 5·18을 겪은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민주화’와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식이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것과 유사하게, 홀로코스트라는 시대적 상흔을 마주했던 아도르노 역시 자신의 사유 속에서 전체주의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성찰했다. 그는 특히 근대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등장한 전체주의가 사실상 동일성의 원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렇다면 이 동일성의 원리란 무엇일까. 동일성의 원리는 쉽게 말해 세계를 획일화하고 물신화하려는 경향을 의미한다. 이러한 원리는 역사 속에서 권력이 사회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되어 왔지만, 자본주의의 시대에 이르러 더욱 강하게 작동하게 된다.
산업혁명 이후 생산 방식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이전의 생산 체계에서는 하나의 도구를 만들기 위해 장인이 생산 과정의 대부분을 직접 수행했다. 예를 들어 호미를 만든다면 대장장이는 손잡이를 다듬고 쇠를 달구어 두드리는 등 제작 과정 전반에 참여하며 하나의 완성된 물건을 만들어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전체를 통제하며 생산의 주체로 기능했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생산은 점차 분업화되기 시작했다. 생산 과정은 여러 단계로 세분화되었고, 노동자들은 전체 생산 과정이 아닌 특정 단계의 작업만을 반복적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어떤 이는 기계를 조작하고, 어떤 이는 재료를 운반하며, 또 다른 이는 특정 부품만을 가공하는 식으로 노동이 나뉘었다.
이러한 분업 체계 속에서 노동자는 더 이상 하나의 완전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아니라 생산 과정의 일부 기능을 담당하는 존재로 변화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보았듯이 자본주의적 생산 체제에서 노동의 목적은 사용가치를 창출하는 데 있기보다 교환가치, 즉 이윤을 창출하는 데 놓이게 된다. 그 결과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결과물과 점점 더 분리되며, 노동 과정에서 느끼던 장인적 성취감 또한 약화된다.
이처럼 분업화된 생산 체계 속에서 노동은 점차 인간의 창조적 활동이라기보다 경제적 효율성을 위한 기능적 행위로 변한다. 결국 노동자는 하나의 완전한 생산 주체라기보다 생산 기계의 일부처럼 작동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노동의 대가는 돈으로 환산되고, 노동자의 가치 역시 교환가치의 기준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논리는 문화 영역에도 그대로 작동한다. 원래 문화와 예술 작품은 인간에게 새로운 경험과 사유를 제공하는 사용가치적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문화가 산업화되고 대중문화가 대량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문화는 점점 상품으로 유통되는 대상이 된다. 영화, 음악, 방송 프로그램은 어떤 경험을 제공하는가 보다 얼마나 많이 팔리고 소비되는가에 의해 가치가 판단된다.
이 과정에서 문화는 교환가치 중심으로 조직된다. 예를 들어 영화는 형식적 실험이나 비판적 사유보다 흥행 수익, 관객 수, 투자 회수 가능성과 같은 지표로 평가된다. 음악 역시 작품의 긴장보다는 차트 순위와 판매량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 문화가 시장 논리에 따라 생산되고 소비되면서 예술은 점차 독립적인 사유의 영역이 아니라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변한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현상을 문화산업이라고 불렀다. 문화산업 속에서 문화는 대량 생산되고 표준화되며, 관객은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존재라기보다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로 위치 지어진다. 그 결과 문화는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비판적 기능을 잃고, 오히려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분명 대중문화 속에서 나름의 사용가치를 경험한다고 말이다. 영화나 콘텐츠를 보며 울고 웃는 감정적 경험을 통해 정서적 회복을 얻기도 하고, 현실의 피로를 잠시 잊기도 한다. 또한 이웃이나 친구들과 그 콘텐츠에 대해 이야기하며 새로운 경험을 공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도르노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는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그 욕망이 과연 주체로부터 비롯된 진정한 욕망인가.
예를 들어 강남의 뱅뱅사거리에서 강남역 2번 출구 방향으로 걸어간다고 상상해 보자. 우리는 그 길 위에서 수많은 상업적 이미지와 마주하게 된다. 가게 간판에서부터 시작해 미디어 전광판, 버스 광고판, 가로등에 매달린 깃발형 광고까지. 이러한 이미지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한다. 연예인의 이미지가 특정 상품에 대한 욕망을 만들어내고, 음식점 간판은 배가 고프지 않은 순간에도 새로운 소비의 욕망을 떠올리게 만든다.
비슷한 구조는 알고리즘에서도 발견된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우리의 소비 성향을 분석하고 유사한 콘텐츠를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그렇게 제공된 콘텐츠들은 대중의 취향을 일정한 방식으로 범주화하며, 결국 대중 역시 하나의 알고리즘적 분류 속에 위치하게 된다. 이 구조는 소비자뿐 아니라 창작자에게도 작동한다. 크리에이터 역시 알고리즘이 요구하는 소비 패턴 속에서 콘텐츠를 제작해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욕망이 우리 내부에서 먼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적 장치들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이다. 문화산업은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내고, 그 욕망이 소비를 통해 해결될 수 있을 것처럼 제시한다. 소비의 순간에는 일시적인 만족이 발생하지만 곧바로 또 다른 욕망이 생산된다. 그 결과 대중은 다시 노동으로 돌아가고, 소비와 노동의 순환 속에서 시스템은 유지된다.
이러한 구조가 유지되기 위해 대중의 욕망이 어느 정도 동일화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문화산업은 욕망의 방향을 조직하고 공통된 기호와 취향을 공유하도록 만든다. 다시 말해 문화산업은 대중의 개별성을 존중하기보다 기호와 욕망을 표준화해 소비를 지속시키는 구조를 만든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영화는 문화산업의 강력한 도구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30년대 이탈리아의 ‘백색전화 영화’는 사회적 갈등과 노동 문제를 배제하고 화려한 부르주아 세계만을 제시했다. 이는 관객이 현실의 구조를 비판하기보다 환상적 삶을 욕망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오늘날 많은 할리우드 영화들, 특히 마블의 어벤저스 시리즈와 같은 슈퍼히어로 영화들은 사회적 갈등과 위기를 서사의 중심에 놓지만, 그 해결을 초월적 능력을 지닌 영웅의 등장에 의존한다. 이 구조는 헤겔의 변증법적 도식과 유사하게 보이기도 한다. 사회적 위기나 갈등이 하나의 부정적 상황으로 제시되고, 이에 맞서는 신화적 영웅이 등장하여 궁극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회복하는 서사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화산업 속 영화는 현실의 모순을 성찰하게 하는 예술이라기보다 시스템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기능할 위험을 지닌다.
그러나 아도르노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서사 구조는 현실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봉합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즉 영화는 해결되지 않은 사회적 아이러니와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는 대신, 그것들이 결국 해결될 수 있다는 서사적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기존 사회 질서를 은연중에 긍정하게 만든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동일성의 논리가 극단적으로 구현된 사례로 20세기의 전체주의 체제들을 떠올렸다. 특히 나치즘 아래에서 자행된 홀로코스트와 소련의 혁명 이후 형성된 강력한 국가 권력은 서로 다른 역사적 맥락 속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하나의 동일한 질서로 통합하려는 강한 욕망을 드러냈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개인의 차이와 개별성은 점차 제거되고, 집단적 정체성과 이념적 동일성이 강조된다. 나치즘은 ‘민족’과 ‘인종’이라는 동일한 기준을 통해 사회를 조직했으며, 그 과정에서 유대인과 같은 타자를 제거하는 폭력적 결과로 이어졌다. 한편 소련 역시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 국가’라는 단일한 이념적 질서를 중심으로 사회를 재편하려 했으며, 이 과정에서 개인의 다양성은 종종 집단적 이념 아래 종속되었다.
예를 들어 영화 <청년경찰>이나 <범죄도시>와 같은 작품에서는 조선족 범죄 조직이나 중국계 범죄 집단이 주요 갈등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서사 구조 속에서 범죄 조직은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부정적 타자’로 제시되고, 이에 맞서는 경찰이나 주인공은 질서를 회복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결과적으로 서사는 사회적 위협이라는 ‘반’의 상황을 제시한 뒤, 이를 제압하는 영웅적 주체를 통해 새로운 질서의 회복이라는 ‘합’의 구조로 마무리된다.
문제는 이러한 반복적인 서사가 특정 집단에 대한 파편적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개별 사건이나 범죄가 특정 집단 전체의 특성처럼 인식되면서, 대중은 점차 그러한 이미지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현실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방식의 문화 재현은 사회의 복잡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단순화된 갈등 구조 속에서 특정 집단을 ‘타자화’하는 서사로 기능할 가능성이 있다.
그뿐일까. 민주화 과정을 경험했던 이른바 586세대 역시 문화 콘텐츠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기억과 이념을 지속적으로 재현하고 전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군부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의 경험을 중요한 역사적 정당성으로 제시하며, 문화 콘텐츠 속에서 과거 권력 구조에 대한 비판과 청산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세대는 이미 사회의 주요 제도와 권력 구조 속에서 일정한 기득권적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앞서 살펴본 소련의 사례를 떠올릴 수 있다. 소련 역시 혁명을 통해 기존 권력을 전복하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세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혁명의 기억과 이념은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는 지배적 서사로 작동하게 됐다. 혁명의 경험은 끊임없이 문화와 예술 속에서 재현되었고, 이러한 서사는 체제의 모순점을 비판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그러나 아도르노에게 예술은 바로 이러한 동일성의 논리에 대한 안티태제이다. 예술은 현실을 복제하여 욕망을 자극하는 기술도 아니고, 사회를 장밋빛으로 묘사하는 수단도 아니며, 명확한 교훈을 전달하는 계몽적 도구도 아니다. 오히려 예술은 현실과 긴장 관계를 맺으며, 현실이 감추고 있는 모순과 파열을 형식 속에서 드러내는 비판적 사유의 장이다. 아도르노에게 예술의 유토피아는 완성된 이상 세계의 설계도가 아니라, 현실이 배제하고 억압한 가능성을 지워버리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
그렇기에 예술은 부정의 변증법 아래 완성된다. 이 부정의 변증법은 정반합을 도출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충돌로 다시 한번 모순적인 것들을 이야기한다. 동일화되지 않고, 합쳐지지 않으며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아드르노는 동일화되지 않은 것들을 주목한다. 단독자의 불안, 실존, 개성에 집중한다. 개별자의 특징과 특성에 주목하고 사회가 주목하지 않은, 그러니까 동일화의 원리 속에서 외면된 ‘낯선 것’에, 개개인에 규합되지 않는 성격과 부정에 집중한다. 아도르노의 미학에서 그는 타자성을 포옹한다.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에서 낯선 것이 더 이상 추방되지 않는다면 소외 또한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예술의 유토피아는 타자성을 옹호하는 상태이며, 낯선 것과 이질적인 것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태도와 관련된다. 인간이 이러한 낯선 것들을 외면하거나 억압하는 대신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삶 속의 소외는 줄어들 수 있으며, 이러한 상태가 바로 예술과 철학이 지향하는 유토피아적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타자성의 원형은 자연에서 발견된다. 자연은 인간의 개념적 동일성 원리에 의해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영역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지배적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가능성을 암시한다. 따라서 예술작품 속의 조화는 현실의 갈등이 완전히 해결된 상태가 아니라, 갈등과 모순이 긴장 속에서 공존하는 상태이다. 좋은 예술작품은 현실의 적대관계를 봉합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암시만 한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예술의 태도를 ‘반조화적 제스처’라고 설명한다. 이는 기존의 조화나 질서를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조화를 깨뜨리고 현실 속에 숨겨진 갈등을 드러내는 태도이다. 예술작품은 현실의 모순을 감추거나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작품 속에 드러내면서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나아가 아드르노의 입장에서 예술은 혹은 문화는 그 스스로도 비판의 대상으로 놓아야 한다. 그 스스로가 만든 방식이 언제든 타성에 젖은 동일성의 원리로 구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드르노는 부정적 사고를 강조하며 대상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사고까지 끊임없이 반성하게 한다. 나아가 문화비평은 문화 밖에서 공격하는 것이 아닌 문화 내부의 모순을 드러내는 내재적 비판이어야 하며 이런 비판적 사고를 통해 사물화 된 현실을 넘어설 가능성을 가능성을 탐색해야 한다.
이를 바탕해 예술은 기존의 언어와 개념 속에서 간과되거나 배제된 것들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잊힌 대상과 사건을 다시 드러낸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는 방식이 된다. 아도르노는 예술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보았고, 예술작품은 개인적 표현을 넘어 사회적 의미를 갖는 구조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즉 창작자의 주관적 시선이 현실의 사건을 미메시스라는 예술의 객관적 언어를 통해 작품으로 형성될 때, 수용자는 그 언어를 통해 작품이 품고 있는 비동일적인 것들을 감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심미적 경험은 관객으로 하여금 동일성의 원리가 가리려는 비동일성을 주체적으로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렇기에 영화가 예술이고자 한다면 아도르노가 감각한 비동일성으로 끝없이 깨어 있어야 한다.
핵심은 창작자가 현실을 설명하려거나 해결하려는 욕망을 이겨내는 것에 있다. 창작자는 현실의 갈등을 없애는 것보다 갈등이 너무 쉽게 세계관 안에서 화해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따라서 영화의 플롯은 사건 아래 깔끔히 전개되는 방식을 지양해야 한다. 나아가 인물의 행동은 완전히 심리적으로 해명되지 않아야 하며, 사건은 해답 없이 남을 수 있고 결말은 갈등을 종결하기보다는 새로운 불일치를 생성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관객에게 혼란을 주기 위한 모호함이 아닌 현실 자체가 이미 모순적이라는 비동일성을 적극적이고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잘 정리된 이야기에 대한 강박은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의 복잡성을 너무 일원화된 방식으로 바라보게 만들며 세계를 이해 가능한 세계로 환원시키는데, 이는 앞서 주구장창 이야기한 동일성의 폭력 중 하나이다. 특히 사회적 폭력이나 상처, 계급의 모순, 제도적 억압 등 쉽게 봉합될 수 없는 문제들을 다룰 경우, 지나치게 완결적인 플롯은 현실의 상처를 서사의 질서 속에 길들여 버린다.
이 지점에서 창작자는 다시 한번 자신의 위치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감독은, 혹은 작가는 언제나 어떤 객관적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용산 참사나 세월호 참사, 혹은 5·18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 더 나아가 무안공항 참사나 오송역 참사와 같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사회적 비극들 말이다. 이러한 사건들은 이미 세계 속에서 발생한 객관적 현실이며, 창작자는 그 현실을 자신의 감정과 정서, 시선을 통해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단순히 개인의 감정을 토로하는 매체가 아니다. 감독은 이러한 주관적 경험을 영화라는 객관적 언어와 시나리오의 문법을 통해 하나의 ‘미메시스’로 형상화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도르노가 말한 동일성의 문제가 다시 등장한다. 만약 감독이나 작가가 관객에게 쉽게 읽히고 몰입되기 쉬운 서사를 위해 현실의 모순을 하나의 매끄러운 이야기로 정리하려 한다면, 그 순간 현실의 균열과 갈등은 하나의 통일된 의미 속으로 봉합될 위험이 생긴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사는 감독 자신의 주관과 객관이 하나의 질서로 일원화된 동일성의 원리로써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다. 감독은 끝없이 이야기를 거칠게 만들어 관객이, 대중이 주체로서 이야기를 숙고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아도르노의 관점에서 예술은 바로 이러한 동일성의 충동을 경계해야 한다. 예술은 현실을 설명하거나 해결하는 체계가 아니라, 현실이 스스로 감추고 있는 모순을 드러내는 형식이어야 한다. 따라서 창작자는 현실을 하나의 메시지로 정리하려는 욕망보다, 그 현실 속에서 쉽게 해소되지 않는 긴장과 불일치를 드러내는 데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태도 속에서 영화는 현실을 단순히 재현하는 기록이나 교훈적 서사로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현실이 감추고 있던 균열과 타자성을 드러내며, 우리가 너무 쉽게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던 세계를 다시 낯설게 바라보게 만든다. 다시 말해 영화는 현실을 봉합하는 서사가 아니라, 현실의 비동일성을 끝까지 남겨 두는 형식이 될 때 비로소 예술로서의 가능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런 시나리오들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가지다. 첫째로는 사건은 하나의 진실로 수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스터리가 있다면 완전히 풀리지 않거나 풀리더라도 또 다른 불일치를 낳는다. 둘째는 인물은 심리적으로 완전히 번역되지 않는다. 인물은 관객이 손쉽게 이해하고 동일시할 수 있는 존재라기보다는 사회적 조건과 물질적 환경 속에 놓인 하나의 존재로 드러나게 된다. 즉 아도르노는 관객의 감정적 동일시보다는 사유를 발생시키는 쪽의 플롯에 더 가치를 둔다.
연출적인 부분에서도 비슷한 경향성을 가진다. 핵심 원칙은 현실의 모순을 어떻게 내재적으로 드러내는가이다.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보다 영화가 현실과 맺는 방식 그 자체가 연출의 중심이 된다. 그런 맥락에서 몽타주와 같이 비가시성을 교란하는 방식들은 ‘서사’라는 상위 개념으로 모든 것을 종합하지 않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장면들이 인과적으로 설명되기보다는 하나의 문제를 서로 다른 표면에서 드러내도록 배치될 때, 관객은 이야기의 해답을 얻기보다 장면들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감각하게 된다. 장면 A가 장면 B를 설명하지 않지만, 두 장면 사이의 불편한 병치가 노동, 폭력, 젠더, 계급, 기억과 같은 문제들을 스스로 사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아도르노는 헤겔의 변증법, 즉 정과 반이 합으로 종합되는 동일화의 논리를 거부한다. 따라서 몽타주 역시 궁극적으로 하나의 의미나 메시지로 수렴된다면 그것은 여전히 동일성의 논리에 머무르게 된다.
이 지점에서 고전적 몽타주 이론들과의 차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쿨레쇼프의 몽타주는 두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방식이며,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는 충돌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하나의 사상적 종합에 도달하려는 변증법적 구조를 갖는다. 이것은 A+B=C라던지 혹은 A+B=AB의 종합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은 이러한 방식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 그것은 충돌을 통해 새로운 종합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충돌 자체를 끝까지 남겨 두는 사유에 가깝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마지막 몽타주 장면을 예시로 들어보겠다. 영화의 마지막 몽타주 시퀀스는 매우 유명하다. 주인공 아이들이 소원을 빌고 화면은 여정 이전, 혹은 여정 이후인지 모를 일상성의 파편적 이미지들을 서로 병치시킨다. 이 장면들은 서사를 설명하지도 않고 감정적 결론도 주지 않는다. 대신 일어날 수 없는 모순적인 기적과 함께 영화가 보여주었던 아이들의 순례길이라는 미메시스에 저마다의 주관적 시각으로 영화를 체험하고 감각하게 한다. 여기서 몽타주는 의미의 종합이 아니라 의미의 공백을 만들어낸다. 감독에 의해 구획된 어태치먼트적인 시각보단 삼자적 디태치먼트로 사고하고 시각 하게 된다. 즉 종합하는 몽타주가 영화처럼 규명된 이미지를 제시하는 형식이라면 아도르노적 몽타주는 이미지가 활자가 되어 객관으로서 관객들에게 주관적 사유로 받아들여지는 방식일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관객에게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현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하고 있음을 감각하게 만드는 형식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화의 형식은 이야기의 완결을 향해 나아가기보다, 현실의 비동일성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작동해야 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영화는 단순한 서사적 재현을 넘어, 현실의 모순을 사유하게 만드는 예술적 가능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아도르노가 견지한 예술적 시선에선 사실주의가 다시 한번 숙고될 필요성이 있다. 사실주의는 자칫 현실의 표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명목 아래, 그 자체에 대한 정당화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즉각성의 감각은 뛰어나지만 영화는 마치 스크린 속 펼쳐지는 세상을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현실의 자기 동일성을 강화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세상을 복제하려는 사실주의 시도가 만약 갈등의 봉합으로 끝을 맺는다면 아도르노는 물신화와 규범화를 위한 도구로서 미메시스가 그 목적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다큐멘터리적 관찰을 활용할 수는 있지만, 그 즉각성이 곧 진실이라는 환상을 깨뜨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연출은 설명을 줄이고, 공백과 지연을 늘리며 반복과 지속 속에서 미세한 어긋남을 전면화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같은 프레이밍이 반복되다가 아주 작은 실수가 발생했을 때, 영화는 그 실수를 서둘러 해석하지 않고 그 자리에 더 오래 머무를 수 있어야 한다. 결정적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에도 카메라는 친절하게 다가가지 않고, 오히려 멀리 떨어져 그 장면의 해석 책임을 관객에게 남길 수 있다. 이처럼 영화는 관객에게 이해를 제공하기보다, 이해하려는 노동을 요청한다. 이 노동은 불친절함이 목적이 아니라, 현실을 쉽게 소비 가능한 감정과 의미로 바꾸지 않기 위한 비동일화의 몸부림이다.
이러한 노동은 동일화의 기계적 노동과 다르다. 공백과 지연, 불편함을 일으키는 가시 편집은 관객이 주체로서 이 모든 과정을 시각하고 사유하게끔 한다. 규범화되어 전체를 바라보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주어진 감각을 수용하고 배출하는 동일화의 기계적 노동과 달리, 주어진 재료(미메시스, 객관)를 바탕해 주체로서 사고하고 판단하고 비동일성을 감각하는 이러한 행위를 산업화 이전 장인적 관점으로 노동했던 주체성을 상기시킨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그런 맥락에서 필자는 가시성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는다. 영화가 그 스스로가 영화임을 끝없이 이야기하는 장치. 제 삼의 벽을 넘는 방식이라던지, 의도적으로 중요한 장면에서 클로즈업을 잡지 않는다던지, 압도감을 주는 2.35:1과 달리 끝없이 불편함을 주고 외화면을 떠올리게 만들 수밖에 없는 화면비 1.37:1도 균열의 한 예시일 것이다. 영화 음악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방법 또한 있을 것이고 혹은 화면과 어긋난 동시성, 생활음과 기계음의 반복, 잔향과 침묵, 해석되지 않는 음향적 공백 등 관객이 영화라는 몽환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만드는 요소들을 떠올린다. 음악은 이미지와 서사에 맞물려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 이 감정이어야 해!”라는 서브 텍스트 아래 작동한다. 그렇게 된다면 관객은 주체성을 잃고 동일한 관객으로, 혹은 신화를 바라보는 교인으로서 일방향적인 언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서 음악은 해석을 안내하는 기능이기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연기 역시 같은 맥락에서 고려된다. 심리적 연기는 관객이 인물의 내면을 곧바로 이해하도록 돕지만, 동시에 그 인물을 하나의 해석 가능한 심리 단위로 고정할 위험이 있다. 반대로 절제된 연기, 반복된 동작, 몸짓과 손의 절차, 표정보다 행동의 물질성에 주목하는 연출은 인물을 심리적 동일시의 대상으로 만들기보다, 조건 속에 놓인 존재로 보이게 만든다. 이 경우 관객은 인물을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차원을 넘어, 그 인물이 처한 사회적 상황과 구조를 읽게 된다. 이는 감정이입의 제거가 아니라, 감정이입이 곧바로 도덕적 판정과 서사적 해소로 이어지는 회로를 늦추는 방식이다. 그런 맥락에서 비전문 배우의 활용 또한 현실의 규열을 보여주는 좋은 방식 중 하나일 것이다.
결국 아도르노의 예술의 유토피아에 가장 합당한 영화 연출 및 시나리오의 방식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것은 현실을 사실처럼 복제하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의 비동일성과 파열을 형식 속에 보존하는 영화이다. 그것은 갈등을 봉합하는 플롯이 아니라, 해결의 이름으로 병합된 것들을 남겨 두는 플롯이다. 또한 관객에게 감정을 즉각 소비시키는 영화가 아니라, 불편함과 공백, 잔여를 통해 사유를 요구하는 영화이다. 이러한 영화는 직접적으로 유토피아를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토피아를 이미지로 완성해 보여 주지 않음으로써, 지금 여기의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가능성만을 암시한다. 바로 그 암시, 즉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부정적 충실성 속에서 아도르노가 말한 예술의 유토피아는 영화 안에서 비로소 형식이 된다.
그러나 확연하게도 우리는 이런 영화를 꿈꾸는 데에 부담을 느낀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 아무리 단편 영화라고 하더라도 영화는 상당한 비용이 드는 작업이다. 필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면 첫 번째 영화에는 약 삼백만 원 정도가 들었고, 두 번째 영화에는 천만 원, 세 번째 영화에는 천육백만 원 정도가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촬영팀과 조명팀, 음향팀, 배우들까지 단편 영화라 하더라도 보통 열다섯 명에서 스무 명 정도의 인력이 함께 움직인다. 그만큼의 노동과 협업, 그리고 제작비가 투입되는 작업인 만큼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떤 성과를 기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 성과는 솔직하게 말해 영화제일 것이다.
앞서 우리는 영화가 영화가 되는 조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바로 관람 문화이다. 영화는 단순한 기술적 장치가 아니라, 관객과 스크린, 그리고 공동의 시간을 매개로 성립하는 사회적 예술이다. 그렇다면 영화제에서 상영되지 않는 영화, 혹은 극장에서 관객과 만나지 못하는 영화를 만드는 일은 창작자에게 동기적인 측면에서도, 기회비용의 측면에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선택이 된다.
결국 창작자는 두 가지 요구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게 된다. 한편으로는 현실의 모순을 쉽게 봉합하지 않으려는 예술적 태도를 지켜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가 관객과 만나는 제도적 구조 속에서 성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 창작은 단순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과 제도 사이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이 된다.
그런 상황에 대한 하나의 해답으로 필자는 요즘 장인 정신에 입각한 촬영 방식에 관심을 두고 있다. 소수의 인원들이 거대한 담론을 다루기보다는 우리 지역 사회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모순성과 비동일성을 포착하는 영화 말이다. 감독이 조연출의 역할을 겸하고, 촬영감독이 조명감독이 되며, 미술감독이 스크립터가 되고, 프로듀서가 음향을 담당하는 작은 규모의 프로젝트다.
이러한 방식은 서사의 규모를 확대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경 속에서 드러나는 비동일성을 어떻게든 포착해 내는 데 목적이 있다. 거대한 제작 시스템 속에서 정리된 이야기로 현실을 설명하려 하기보다는, 작고 유연한 제작 방식 속에서 현실의 균열과 모순을 보다 가까이서 바라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자본에 종속되지 않는 창작자가 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또 다른 출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서사에 종속 죄어 더 큰 자본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포착하고 싶은 지역사회의 사부작거리는 비동일성과 모순에서 출발해 자본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일일지도 모른다. 제작 환경에서부터 자본의 압력에서 벗어나고, 삶의 노동과 예술을 분리시켜 예술마저도 문화산업의 논리 속에서 종속되는 것을 피하는 방식도 이러한 아도르노적 예술을 위한 대안이라는 생각을 필자는 하다.
물론 이러한 선택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이러한 방식은 영화가 문화산업의 동일성 속으로 너무 쉽게 편입되는 것을 잠시 멈추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틈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은 현실의 모순과, 아직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포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화의 예술성은 거대한 서사나 완결된 메시지 속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틈과 균열을 끝까지 바라보려는 태도 속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영화의 예술됨은 기술의 정교함이나 제도의 승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을 쉽게 설명하고 봉합하려는 동일성의 충동을 거부하며, 끝내 해소되지 않는 모순과 비동일성을 형식 속에 남겨 두려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아도르노의 관점에서 영화는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는 매체가 아니라, 세계가 아직 화해되지 않았음을 감각하게 만드는 예술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창작자는 거대한 서사와 매끄러운 완결성보다 지역과 삶의 구체적인 균열 속에 남아 있는 낯선 것들에 더 오래 머물러야 한다. 또한 그러한 시선은 영화의 내용뿐 아니라 제작 방식과 노동의 구조에까지 미쳐, 자본과 제도의 압력으로부터 다른 출구를 모색하게 만든다.
어쩌면 바로 그 지점에서 영화의 예술성은 비로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계를 쉽게 이해 가능한 것으로 환원하지 않고, 끝내 낯설고 불편한 채로 남겨 두려는 집요한 실천 말이다. 그렇기에 영화와 예술이 문화산업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맞설 수 있는 대항의 형식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벅찬 기쁨인가. 영화가 자본과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비동일성과 묻히길 강요받는 수많은 모순들을 미메시스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가능성인가. 그렇기에 우리는, 바로 그러한 영화와 예술을 믿기에, 아도르노가 그랬듯 끝까지 싸워야 한다. 우리가 발견한 비동일성과 모순을 모방하는 것을 정말로 참을 수 없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