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를 잃은 디지털 콘텐츠가 만든 새로운 성소비 문화

듣고 배운 것 02_문화연구실습 (동아방송예술대학교)

by 고갬동

서론 : 여전히 나체는 합당한 예술의 소재인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가여운 것들>을 두고 지인들과 짧은 토론을 나눈 적이 있다. 논의의 핵심은 다음 질문으로 귀결되었다.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타인의 나체를 디지털 이미지로 변환하고, 그것을 무한히 복제, 배포해도 되는가?” 이 물음은 필자가 오래전부터 품어온 문제의식과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발터 벤야민이 지적했듯 오늘날의 디지털 예술은 기술복제 시대에 맞추어 아우라를 상실하고 있으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비판한 대중문화의 산업화는 이미지를 대량 생산, 유포 가능한 상품으로 전환하였고 이를 통해 대중을 개성을 가진 존재보단 소비자로 획일화하며 양산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현대의 나체 재현이 창작 활동에 앞서 반드시 윤리적 재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주제라고 판단한다.


과거 예술 작품에서 나체는 종종 종교적, 신화적 맥락 속에서 고유한 원본성과 아우라를 지니며 표현되었고 이러한 독자성 덕분에 윤리적 논란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과 대중 매체의 발달은 나체를 무한히 복제, 유포되는 이미지로 만들었고 이는 나체 표현을 예술적 맥락에서 떼어내어 즉각적 소비의 대상으로 재구조화하였다.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지적한 문화산업의 표준화, 상품화, 그리고 라캉의 시각이론이 밝히는 관음적 응시의 구조는 오늘날 나체 이미지가 단순한 미학적 대상이 아니라 성적 소비 구조와 맞물려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해준다.


현대의 나체 재현은 더 이상 순수한 예술적 표현으로만 남아 있지 않으며 기술적 조건과 문화산업의 구조 속에서 새로운 윤리적 책임의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문화, 예술계는 이러한 논의를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 채 아우라 시대의 예술작품이 지니던 관성을 반복하듯 나체 재현을 관행적으로 수행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이 재현의 관성이 창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거대한 문화산업 체제 속에서 자본주의적 성 소비 문화를 촉진하는 경로로 쉽게 연결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예술적 의도로 시작된 나체가 복제, 유통의 산업적 회로에 진입하는 순간 성적 이미지로서의 상품화 압력에 놓이게 되며 이는 결과적으로 대중의 성 소비 방식을 획일화하고 성적 감각과 욕망을 자극하는 문화산업적 메커니즘과 맞물린다.


실제로 <가여운 것들>을 검색해보면 ‘가여운 것들 좌표’, ‘가여운 것들 시간대’, ‘가여운 것들 움짤’과 같은 연관 검색어가 자동으로 제시된다. 이는 단순 영화 <가여운 것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며 가령 해외 드라마 <브리저튼>에 대해서조차 매체는 19씬 좌표 모음을 제공하기도 한다.이는 특정 장면이 영화 전체의 메시지나 서사적 맥락과 분리된 채 자극적 파편으로 소비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좌표’와 ‘시간대’는 관객이 서사보다도 노출 장면이 등장하는 시점을 찾아 영화를 탐색한다는 의미에서, 작품의 의미 구조가 해체되고 장면 단위의 즉각적 쾌락이 우선되는 소비 방식이 강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파편적 소비는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붕괴와도 긴밀히 연결된다. 서사의 정서적 전환을 위해 배치된 장면이 디지털 플랫폼에서는 ‘움짤’ 형태의 무한 순환적 자극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즉 <가여운 것들>의 나체는 더 이상 영화적 맥락 속 미적, 윤리적 문제로 남아 있지 않고 클릭과 조회수를 이끌어내는 디지털 상품으로 가판대에 배치되어 판매되는 것이다. 구글의 연관 검색어 자동 완성은 이러한 성적 이미지를 일종의 ‘판매대’로 배치하여 알고리즘 차원의 소비까지 촉진한다.


더 나아가 개봉 당시 북미 주요 매체들은 ‘에마 스톤의 파격 노출’과 같은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성적 장면을 작품의 핵심 흥행 포인트로 소비했다. 이는 영화가 담은 페미니즘적 메시지와 무관하게 나체가 디지털 홍보 구조 안에서 즉각적 시선 자극과 조회수를 위한 자본주의적 기호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성적 재현은 창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대중이 성적인 요소로 해당 작품을 읽도록 유도되고, 오독되며, 궁극적으로는 소비의 대상이 되는 구조로 쉽게 발전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발터 벤야민,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그리고 라캉의 이론적 틀을 바탕으로 현대 디지털 이미지와 영상 매체가 재현하는 나체와 성적 장면이 어떻게 대중의 성 소비 문화를 형성, 촉진하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이 분석을 통해, 영화, 영상, 사진 등 현대 예술계가 나체를 다루는 데 요구되는 윤리적 기준과 성찰의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본론Ⅰ. 이론적 배경_ 발터 벤야민,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라캉의 이론으로 주제 바라보기

이러한 필자의 주장을 바탕하기에 앞서 언급했던 네 명의 철학자들의 이론을 먼저 짚어보는 과정을 거치려고 한다.


⓵ ‘아우라의 상실’ 발터 벤야민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에세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예술 작품의 아우라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아우라란 예술 원작만이 가지는 신비로운 분위기와 유일성으로서 그것이 작품에 시간, 장소적 현존감을 부여하는 요소이다.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사진술과 영화 같은 기계적인 복제 기술의 발달은 전통 예술이 지니던 이러한 아우라를 붕괴시켰다.


가령 과거에 하나밖에 없는 원본 유화로 존재하던 누드 회화는 관람자가 특정한 미술관이나 맥락에서만 접할 수 있었기에 그 접근성의 희소성이 경외심과 윤리적 경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디지털화 된 이미지와 영상은 무한히 복제되고 어디서나 소비될 수 있어서 나체 이미지가 지니던 독특한 권위와 맥락, 즉 제의적 가치가 사라지고 일상적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벤야민은 이런 아우라의 몰락이 예술을 대중화하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고 보았지만 동시에 나체 표현처럼 민감한 주제마저 일상적인 상품으로 전락시킬 위험도 강조한다. 디지털 시대에는 한 번 온라인에 등장한 누드 사진이나 영상이 영원히 복제, 유통되며 원작자의 의도나 맥락과 무관하게 소비된다. 이로 인해 과거보다 나체 이미지나 성의 핍진적인 재현에 대한 윤리적, 미학적 경계가 흐려지고 나체 자체가 자극적 볼거리나 포르노적 콘텐츠로 취급될 가능성이 커졌다. 벤야민의 통찰은 현대 나체 예술이 직면한 가치 전락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⓶ ‘산업화된 문화, 예술’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앞선 발터 벤야민의 이론 ‘아우라의 상실’을 이어받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대중문화가 자본주의 논리에 지배 받는 문화산업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들의 저작 「계몽의 변증법」에서 밝히듯 문화산업은 예술을 산업적 상품으로 전락시켜 대중을 수동적 소비자로 만든다고 봤다. 이 이론을 성적 이미지에 적용해보면 대중 매체는 성애적 요소를 상품화하여 ‘팔리는 콘텐츠’로 활용한다. 실제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문화산업이 성적 욕망을 이용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문화산업은 끊임없이 쾌락을 약속하며 소비자를 기만한다. 줄거리와 연출로 꾸민 이 쾌락의 어음은 끝없이 연장된다. 반복해서 욕망의 대상을 노출시키는데, 밀착 스웨터 속 가슴이나 영웅의 나신 등, 관객은 항상 메뉴를 보며 만족해야 할 뿐, 실제 만찬에 이르지 못한다. 어떤 에로틱한 장면도 암시적으로 흥분을 주지만 결코 끝까지 가지는 않는다.”

이 언급에서 알 수 있듯, 대중영화나 광고는 노골적인 성행위까지 직접 보여주진 않더라도 계속해서 성적 이미지(매력적인 육체, 노출 등)를 미끼로 던져 관객의 호기심과 욕망을 자극한다. 그러나 정작 완전한 만족은 주지 않음으로써 관객이 영구히 갈증을 느끼며 산업이 구축해둔 성소비의 길로 이어지게 만든다. 이런 지연된 만족의 구조는 문화산업이 소비를 지속시키는 전략이다.


한편, 현대에는 이러한 암시적 수준을 넘어서는 더욱 노골적인 성 상품화도 등장했다. 과거 주류 극영화에서는 검열과 장르 관습상 직접적인 성행위 묘사가 제한되었지만,오늘날에는 성적 콘텐츠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포르노 산업이 거대한 문화산업으로 성장했다. 포르노는 겉보기에는 아도르노가 말한 “끝까지 보여주지 않는” 대중문화와 달리 노골적인 성행위를 즉각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그렇지만 포르노그라피조차도 궁극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지적이 있다.

포르노 영화는 현실의 성행위를 가장 투명하게 재현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소비자에게 실질적 성의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끝없이 새로운 자극을 찾게 만든다. 핍진적인 이미지가 충족시키지 못한 욕망은 실제로 행위하고 싶은 욕망으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가령 한 논평에선 “포르노는 당신이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상상하게 함으로써 경험을 보완해줄 뿐”이며 그렇기에 계속 소비하도록 만든다고 지적한다. 결국 문화산업 논리 속에서 섹스조차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하여 소비자는 끊임없이 더 강한 자극을 찾아 지갑을 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드르노을 바탕해 말해보자면, 문화산업은 성적 욕망이라는 인간 본능마저 체계적으로 활용한다. 즉 성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 중점이 아닌 ‘Sex sells’, 즉 섹스는 마케팅이다라는 격언에 따라 문화, 예술계가 소비를 위해 영화와 음악, 광고에서 노출신, 매혹적인 육체 이미지, 선정적 연출을 통해 대중에게 소비 심리를 유도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우려했던 대로 문화가 인간의 비판적 사고나 예술적 자율성을 고양하기보다는 즉각적 쾌락과 현실 도피의 도구로 전락하는 모습으로 연결된다. 물론 앞서 소개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가여운 것들>을 통해 페미니즘적 철학 담론에 감탄하고 일부 계몽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산업의 기획자들에게 그들은 거대한 그물에 틈바구니를 빠져나간 한 마리의 물고기에 불가할 뿐이다. 결국 문화산업은 이러한 문화, 예술 콘텐츠를 통해 시청자를 소비자로 바꾸고 이름바 ‘섹스 셀링’에 성공한다. 이렇듯 디지털 콘텐츠를 바탕해 재현된 성은 강렬한 감각적 자극으로 현실을 잊게 하고, 더 자극적인 것을 찾아 소비를 지속하게 함으로써 대중을 수동적이고 욕망에 길들여진 소비자로 만들 위험이 있다.

‘관음증이 주는 권력이란 착각’ 라캉과 이를 활용한 멀비까지.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은 현대 시각 문화 비평에 큰 영향을 줬으며 특히 응시 개념은 영상 매체에서 권력과 욕망의 문제를 논하는 핵심으로 떠올랐다. 라캉은 인간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타자의 시선이 중요하다고 봤고 보는 행위 자체에 욕망이 얽혀 있다 분석했다.


이러한 개념을 이어받은 영화이론가들은 영화 관람 행위를 일종의 관음적 상황으로 파악했다. 대표적으로 라우라 멀비는 1975년 에세이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에서 할리우드 영화의 카메라가 남성 관객에게 관음증적인 쾌락을 제공한다고 논했는데 , 여기서 말하는 관음증이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몰래 바라보는 즐거움”을 의미한다. 이 행위는 대상에게는 인지되지 않으면서 일방적으로 훔쳐보는 것이기에 “가학적이지 않더라도 강력한 위치를 함축”하는 시선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보는 이는 대상에 대한 일방적 통제감과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 시선의 권력은 성적 이미지 소비에서 두드러진다. 전통 예술에서조차 많은 누드화들이 남성의 응시를 전제로 제작되었는데 여성 나체 모델은 남성 관객이 자신을 본다는 걸 가정하고 포즈를 취하곤 했다. 이러한 이미지에서 여성 누드는 “남성 관객의 응시를 끌어들이는 미끼” 역할을 하며 그림 속 여성은 남성 화가(또는 관객)에 의해 소유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현대의 사진, 영화 속 노출 장면 역시 대개 소비자의 시선을 철저히 의식한 상태로 연출된다. 특히 주류 상업영화에서는 카메라가 여성 배우의 특정 신체 부위를 부각하는 식으로 남성적 시선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고, 이는 관객에게 은밀한 관음의 쾌락을 제공한다. 이러한 관음증적 시청 경험은 라캉 이론의 맥락에서 볼 때, 관객이 화면 속 인물을 마음대로 훔쳐보고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며 일종의 권력적 만족감을 준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라캉의 응시 개념은 단순히 관객 개인의 욕망 차원을 넘어, 사회적 권력관계와 연결된다. 누가 보는 주체이고 누가 보이는 객체가 될지는 사회적 지위와 성별 권력에 의해 좌우되곤 한다. 멀비의 분석처럼, 전통적으로 남성은 보는자, 여성은 보여지는 대상으로 위치지어져 왔다. 이 성별 시선의 불균형 속에서 여성의 몸은 객체화되고 관객은 무책임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현대의 뮤직비디오나 광고에서 여성의 성적 이미지가 남성 시청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 소비되는 현상, 영화에서 카메라가 여성 신체를 훑는 연출, 심지어 인터넷상의 불법 촬영물 유포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러한 일방적 시선의 권력 구조와 맞닿아 있다. 라캉과 이를 발전시킨 이론가들은 이런 상황을 비판하며 시선의 권력을 자각하는 비판적 미디어 읽기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본론 Ⅱ. 사례 분석_

⚫ 과거와 현재

앞서 언급했듯, 예술로서 받아드려지던 나체는 사진 이미지 매체의 혁명 이후 다양한 양상으로 변화를 겪었다. 사진과 영화는 회화와 달리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할 수 있었고 이는 나체를 이상화하기보다 즉물적으로 재현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즉 이전 시대에는 작가의 손을 거쳐 이상적으로 “꾸며진 나체”가 예술이 되었다면 사진 시대에는 실제 사람의 벌거벗은 모습을 직접 담은 이미지들이 등장했다.

이는 곧 에로틱 사진과 포르노그래피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19세기 말부터 유럽에서 유통된 누드 사진엽서나 초기 에로 영화들은 더 이상 미화나 알레고리가 아닌 노골적 자극을 목적으로 제작되었고 대중적 호기심을 자아냈다. 이러한 변화는 “현실의 재현에서 자극의 재현으로의 전환”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20세기 들어 대중 영화 속 성적 묘사는 점차 클리셰화되고 관객의 감각을 자극하는 장치로서 사용되는데 가령 할리우드 영화의 러브신은 일정한 공식이 있거나 에로 장면의 조명, 샷리스트가 상투화되어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이러한 표준화된 연출은 대중이 기대하는 자극을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개별 작품의 예술적 독창성은 약화시킨다. 달리 말해, 사진과 영상 매체 시대의 성적 나체 이미지는 관객의 직접적인 성적 반응을 유도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예술적 거리감이나 성찰보다는 즉각적 쾌락의 소비에 초점을 맞추게 됐다는 것이다. 결국 고전 누드가 “우리를 응시하는 경외로운 아름다움”이었다면, 현대의 포르노그래피적 이미지는 “우리를 흥분시키는 자극”으로 변질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 배경에는 사진/영상 매체의 사실성 뿐만 아니라 산업적으로 소비되는 쾌락 상품의 논리가 자리하며,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 대한 끝없는 논쟁을 야기한다.

⚫ 소비를 유도하는 이미지

아도르노의 문화산업 이론을 성 이미지 산업에 적용해보면, 현대 대중영상 속 성애 장면들도 일정한 규격에 따라 생산, 유통되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할리우드 영화나 글로벌 OTT(넷플릭스 등) 드라마에서의 성적 묘사는 대체로 비슷한 미장센과 흐름을 갖는 경향이 있다. 조명과 음악이 깔리고 카메라는 선정적인 각도로 인물의 신체를 비추며, 클라이맥스에서 몽타주 처리나 은유적 연출을 삽입하는 등 여러 작품들이 유사한 공식을 답습한다. 실제로 영상 매체의 이미지 레퍼런스를 모아둔 Shotdeck에 ‘Sex’라는 키워드를 넣으면 유사한 각도와 조명, 이미지들의 스틸컷들이 난무한다. 이는 아도르노가 말한 문화상품의 표준화와 다르지 않다. 즉, 관객들에게 친숙하고 거부감 없는 틀 안에서 성적 자극을 제공함으로써 대중의 반응을 손쉽게 이끌어내는 전략이다.


심지어 포르노 산업에서도 특정 장르나 카테고리가 인기를 끌면 유사한 영상이 대량 생산되며 성 표현의 클리셰화가 두드러진다. 일본 성인물 업계는 오래전부터 대중적인 화제작을 의상·장르·상황 패러디의 방식으로 재현해 왔다. 미국에서는 저작권법의 공정 이용에서 패러디가 일정 부분 보호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대중문화 작품을 변형한 ‘패러디 포르노’ 산업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대중의 수요가 존재할 경우 대중적인 서사와 캐릭터 역시 문화산업의 논리 속에서 언제든 다른 형태의 상품으로 재가공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이는 성애 장면이 조회수와 화제성을 높이는 공식으로 자리잡았음을 뜻하며 한편, 성애 묘사의 획일화는 성 자체의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을 단순화시키고 현실의 성적 관계에 대한 왜곡된 기대를 심어줄 위험이 있다는 측면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


⚫ 욕망의 상품화

문화산업 논리에서는 사랑, 로맨스, 성적 쾌락 등 인간관계와 감정마저 시장 논리에 따라 포장되고 판매된다. 현대인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사랑의 이미지를 소비하고 연애나 섹스를 특정한 시나리오대로 꿈꾸도록 길들여진다.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는 “현대의 로맨틱 사랑은 시장과 분리된 피난처가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와 긴밀히 결탁한 실천”이라고 말하며 실상 꽃다발, 반지, 근사한 데이트와 같은 로맨스의 클리셰들조차 광고와 미디어에 의해 구성된 소비 문화의 산물임을 지적했다. 즉 개인의 내밀한 욕망과 감정 영역까지 상품이 스며들어 욕망의 형태와 표현마저 산업이 디자인하는 셈이다. 아도르노의 말처럼 문화산업의 “모든 문화형태는 철저히 상품이며 그 안에서 내용은 부차적”인 상황에서, 사랑의 표현도, 성적 쾌락의 방식도 고유한 개성이나 진정성을 잃고 유행 상품 패키지로 변질된다. 이러한 상품화된 욕망의 한 예로, 헐리우드 로맨틱 코미디들은 연애의 단계와 해피엔딩까지의 공식을 팔고 포르노그래피 산업은 쾌락의 즉각적 충족을 반복적인 포맷으로 판매한다. 심지어 데이팅 앱조차도 인간관계를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시장 논리로 최적화함으로써 사랑이나 성적 만남을 소비재처럼 다룬다. 한국에선 <환승연애>라는 프로그램으로 통해 헤어진 연인 간의 관계에 대해 문화적 정형화를 성립하기도 하고 <솔로지옥> <연애의 참견> <하트 시그널> 등을 통해 정형화된 남친, 여친상이나 데이트 문화를 만들어 내고 그 안에서 대중들이 소비하게 만든다.


결국 문화 산업 체제에서 사랑과 섹스마저도 판에 박힌 상품으로 제공되며, 소비자는 자신이 원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주어진 시나리오 내에서 욕망을 소비하게 된다. 이처럼 욕망의 상품화는 개인의 친밀한 영역을 경제적 교환물로 전환시켜 쾌락의 산업화를 촉진시킨다.

영화라고 그 양상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와 그 속편들은 재벌 남성 그레이와 대학생 여주인공의 관계를 중심으로 가학적 성적 취향(BDSM)을 로맨스 서사에 담았다. 이 시리즈는 노골적인 정사 장면과 소위 여성 판타지적 요소를 전면에 내세워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기존에 음지의 취향으로 여겨졌던 BDSM 소재를 대중 메인스트림으로 끌어내어 일상적 로맨스로 포장한 것이다. 덕분에 관련 상품화도 활발하여, 미국의 한 성인용품 회사는 “그레이” 열풍 이후 매출이 10배나 증가해 연 1억 파운드에 달했다고 한다.


즉, 문화산업은 이 영화를 통해 성적 취향 자체를 상품화하여 거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했다. 전통적으로 음지에 속하던 성적 판타지가 이처럼 영화관과 OTT를 통해 양지화됨으로써 성적 소비가 로맨스 장르의 일부로 정당화되고 일반 관객에게도 일상적인 엔터테인먼트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사례는 대중이 어떠한 취향을 받아드리고 성생활을 함에 있어 문화산업이 우리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소비를 권장하고 유도하는 지에 대해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 이미지의 영구 보존 (디지털 박제)

디지털 기술 시대에 들어와 성적인 이미지와 영상은 한 번 온라인에 올라오면 영구히 복제, 확산되는 특성을 띤다. 흔히 “인터넷은 영원히 기억한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일단 유포된 사적 이미지나 영상은 삭제한다 해도 이미 수많은 곳에 복제되어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되기 십상이다. 법원에서도 “인터넷에 일단 올라간 이상 그 확산을 통제하기 극히 어렵다”고 지적할 정도로 디지털 환경은 사진과 영상의 무한 복제와 유통을 허용한다.


이는 과거 아날로그 시대와 달리 피해자의 통제권이 완전히 상실되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를 낳는다. 가령 리벤지 포르노나 유출된 연예인 사생활 사진 등의 사례에서 보듯 한 번 퍼지기 시작한 이미지는 수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재등장하며 피해자에게 지속적인 상처를 준다. 이러한 디지털 박제화 현상은 성적 이미지가 더 이상 한시적 소비로 끝나지 않고 반영구적 데이터로서 존재함을 뜻하며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존엄성에 큰 위협을 가한다.


그런 배경 속에서 성적 이미지와 예술의 경계는 더욱 흐려진 콘텐츠들은 이젠 클릭 수를 위한 콘텐츠 상품으로 소비되는 경향이 강하기에 예술로서 접근하는 나체의 이미지는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술의 자율성과 고유 맥락이 상실되고, 이미지들이 플랫폼 상에서 똑같은 데이터 단위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예술영화의 정교한 섹슈얼한 장면도 유튜브 클립이나 SNS 짤로 잘려나와 자극적 하이라이트만 유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맥락은 사라지고 자극만 표류하는 상황에서는, 예술적 성찰이나 진정성보다 즉각적이고 교환가능한 쾌락이 우선시 된다. 가령 영화 예술에 대한 메타 영화로서 가치가 있는 영화 <히든 페이스>도 ‘역대급 수위’와 여배우 ‘박지현’의 전라 노출에 치중한 홍보를 할 뿐이다. 베냐민이 일찍이 사진 복제 시대에 예술의 '아우라' 상실을 논했듯이 디지털 복제 시대에는 예술의 아우라뿐 아니라 윤리적 경계마저 희미해졌다. 그 결과 성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에는 철학적·미학적 담론의 부재가 두드러지고 기술의 폭주를 제어할 윤리적 가이드라인의 공백이 커지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성 이미지는 예술적 표현이라기보다 소비되는 데이터로 전락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사회철학적 성찰이 따라가지 못한 사이 개인의 존엄성과 예술의 가치 모두 위협받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아도르노라면 문화산업이 최악으로 치달아 예술을 완전히 잠식해버린 사례로 볼 법하다.

결론. 문화산업에 지배되는 문화예술 콘텐츠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가여운 것들>에서 출발한 필자의 고민은 발터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상실을 기준 삼아 디지털 예술 시대에도 관성적으로 반복되는 예술계의 나체 이미지 사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또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문화산업론을 바탕으로 아우라를 잃은 디지털 나체 이미지가 어떻게 자본주의적 생산, 유통 구조 속에서 대중을 기만하고 소비를 유도하는지 살펴보았고 나아가 라캉과 로라 멀비의 관점을 통해 이러한 디지털 나체 이미지가 어떤 방식으로 폭력적, 관음적 시선을 조장하며 사회적 욕망을 구성하는지 분석하였다.

물론, 발터 벤야민이 지적했듯이 아우라의 상실이 반드시 부정적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면서, 과거에는 특정 계층만이 향유할 수 있었던 예술과 문화를 누구나 평등하게 그리고 쉽고 간편하게 즐기고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이제는 누구나 창작자로서 예술 활동에 참여하고 문화를 생산·확장할 수 있는 보다 진보된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본 글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은, 관습처럼, 혹은 관성처럼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반복되어 온 창작 방식에 대해 우리가 다시 숙고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우라의 시대 속에서 형성된 어법과 관습들이 클래식이라는 변명 아래 비판 없이 사용될 때, 아우라 없이 영원한 디지털 환경에 남게 되는 페르소나들의 성적 이미지를 창작자들은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


거칠게 말해보자면, 만약 숙고 없이 만들어진 영화라면 그 영화적 완성도가 완벽에 가까운 <아가씨>와 <아노라>일지라도 창작자들의 예술적 욕망을 단순히 배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 영화들은 서사적으로 권력, 자본주의, 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미지의 차원에서는 문화산업과 자본주의, 그리고 남성적 욕망이 요구하는 미장센과 시각적 규범에 여전히 순응하고 있다는 점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물론 나체 이미지나 성적 행위를 활용한 이미지는 예술과 문화 콘텐츠에서 결코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는 가장 원초적 언어이자, 풍부한 예술적 깊이와 서사적 가능성을 지닌 중요한 표현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이미지가 어떤 맥락을 재생산하고 누구의 시선을 강화하며 어떤 욕망을 정당화하는지에 대해 창작자는 반드시 책임 있게 성찰해야 한다. 단지 예술이라는 말로 정당화될 수는 없으며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가 가지는 윤리적, 사회적 파급력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창작자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태도일 것이라고 주장하며 본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필명_고갬동 (gogamd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