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생각한 것 02_ 칼럼 <젠더 폭력에 대한 예수의 전복적 시선>
01. 사회주의와 페미니즘, 그리고 예수
“예수는 좁은 의미에선 페미니스트일 수 있고, 넓은 의미에선 사회주의자일 수 있습니다."
뉴스 앤 조이의 칼럼 <젠더 폭력에 대한 예수의 전복적 시선>에서 이민희 칼럼니스트는 십계명 속 “간음하지 말라”라는 명령이 고대 사회의 가부장 구조와 남성 중심의 소유 개념 아래 해석되어 유대 문화로 자리 잡았다고 주장합니다. 이민희 칼럼니스트는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 간음이 주로 ‘남의 아내’와 맺는 성관계를 의미했다는 점을 환기하며 이 계명이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소유이자 자산인 ‘여성’를 지키는 맥락으로 활용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맥락은 여성을 하나의 주체로 바라보는 방식이 아닌 도구이자 소유물로서 바라보는 태도를 야기시킵니다. 즉 이 계명은 여성의 존재적 존엄을 바탕해 당시 히브리 사회에서 해석되었다기보단 성행위를 위한 도구이자 가사를 위한 소유물로서 여성을 소비하고, 존재하게 하는 남성 중심의 성윤리와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기능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간음 금지의 계명이 가부장적으로 해석되는 관행이 전환되는 순간이 있는데 이를 잘 나타내는 구절이 다음의 마태복음 5장 28절이라고 이민희 칼럼니스트는 말합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
이 구절은 소유의 개념으로 간음을 해석하던 구약의 가부장적 관행에서 벗어나 여성을 존재로서 목적하게 만듭니다. 즉, 간음의 범위를 여성을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수준까지 확장시키는 개념을 제시하며 고대 히브리 여성들이 존재로서 대우받고 목적으로서 영위되어야 함을 예수는 선언한 것입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예수는 해당 구절을 통해 여성을 향한 내재화된 권력적 시전 자체를 제재하고 죄로 규정하며 당시 고대 히브리 공동체의 가부장적 윤리관을 송두리째 뒤집어버리는 전위적 정언명령을 선포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만 이 여성에게 돌을 던져라”
군중은 간음하다 걸린 여인 한 명만 심판의 무대로 끌고 왔지만, 그 무대엔 함께 간음한 남성은 없었다고 칼럼니스트는 지적합니다. 율법은 여성만을 정죄하며, 군중은 여성에게만 그 잣대를 들이밉니다. 이에 예수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로 응수해 누구도 돌을 던지지 못하게 만듭니다. 예수는 죄와 형벌의 문제를 공동체 책임의 문제로 전환시켰습니다. 즉 죄가 그저 개인의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맥락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 주며 특히 율법이 여성에게 불평등하게 적용되는 구조, 그래서 여성이 범법자로 몰리 수밖에 없는 구조를 뒤집었다고 칼럼니스트는 주장합니다.
예수를 통해 간음 금지의 계명은 남성의 욕망을 정당화하거나 면죄부를 제공하는 수단에서 벗어났습니다. 이 계명이 그릇되이 상징했던 욕망의 구조 자체를 바꾸고 착취당하고 지워진 이들과 연대하는 실천적 지침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것이죠.
좁은 의미에서 예수는 여성의 수단화를 거부합니다. 여성이 성적, 가사적 요소로서 남성에 의해 혹은 사회에 의해 도구화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선 인간이 타인에 의해 도구화되고 수단화되는 것을 반대합니다. 예수는 여성이, 그리고 인간이 타인에 의해 수단화되는 것을 반대했고 존재로서 목적되길 바랐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좁은 의미에선 페미니스트일 수 있고, 넓은 의미에선 사회주의자일 수 있습니다.
02. 자본주의와 예수
“제대로 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진보주의자일 수 없다”
대선 정국이 지났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은 색깔론의 얼룩을 쉽게 지워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색깔놀이에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인들이 열성으로 일열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까운 것 같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진보적 가치, 즉 사회주의적 가치에 적대감을 가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는 실질적으로 눈앞에 보이는 결과입니다. 많은 사회-공산주의 국가들이 국가 유물론을 바탕해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을 탄압한다고 있습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그리고 두 번째는 마르크스의 오래된 이 문장 때문입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그러나, 사실로서 이 문장의 맥락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바를 뜻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는 아편은 오늘날의 헤로인, 펜타닐과 같은 의미보단 치료제로서, 진통제로서 아편이 맞습니다. 즉 종교는 사람을 망치는 아편과 같다는 의미보단, 종교는 인민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치료제로서 아편이다라는 뜻이 적합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왜 인민이 고통받는다고 생각했을까요?
[읽고 생각한 것들 01]에서도 수차례 언급한 것이지만, 자본주의가 인간을 바라보는 근원적인 잣대는 ‘노동자’입니다. 즉 자본주의는 인간을 하나의 목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재화를 위한 도구’로서 수단화하고 상품화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린 취업을 위해, 승진을 위해, 돈을 위해 자신을 수단화하고 상품화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졌습니다. 나아가 우린 서로를 자본주의 시스템이 체계화회든 물질적 가치로 평가하는 것에 익숙해졌는데 – 한 인격을 연봉으로 평가하고, 문화산업이 설정한 외형적 가치를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 그것의 예입니다. 우린 문화 산업이 세뇌하는 가치에 따라 타인을 평가하고 자신을 소비합니다. 그리고 그 소비를 위해 자본에 승복하고 스스로를 기꺼이 도구화시키죠. 이는 앞서 이민희 칼럼니스트가 주장했던 ‘전복하는 예수’의 기치와 정반대의 논지입니다. 이민희 칼럼니스트의 시선으로 바라보자면 넓은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예수가 뒤 업고자 했던 가부장적 유대사회와 같습니다. 존재를 존재로서 바라보지 않고 수단이자 도구로서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죠. 즉, 자본주의는 예수의 가치와 맞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의 자유주의는 종교를 가질 자유도 주지만 종교를 타락시킬 자유도, 종교를 오독시킬 자유도, 타인을 파괴하고 소유화하며 대상화하고 소비할 자유시장도 – 심지어 그 자신도 상품화할 자유도 줍니다.
사회주의의 모든 요소들이 예수의 가치와 맞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앞선 예수의 선언을 보자면 넓은 의미에서, 그러니까 커다란 공통분모로서 그를 사회주의자라고 부를 근거를 마련합니다. 마치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묶이는 천주교와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의 수많은 분파처럼 말이죠.
사회주의는 상품화된 인간상을 반대합니다. 사회주의에서는 인간을 단순히 생산적인 기계나 노동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을 비판하고, 사람들 간의 평등을 실현하려 합니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보는 세계관을 제시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욕망과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며 타인을 존재로서 인정하고, 공동체 내에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주의는 인간 해방을 궁극적인 목표로 두고, 인간이 더 이상 경제적 착취나 사회적 억압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시스템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죠.
자, 알겠습니다. 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했는지는요. 어떤 맥락에서 인간이, 노동자가 고통받고 있는 존재라고 말했는지 파악했습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왜 종교가 치료제가 아닌 진통제라고 표현했을까요. 마르크스는 종교는 진통제처럼 고통은 유예시키지만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니다. 마르크스에게 종교는 물질적 조건, 즉 경제적 억압과 착취로 인한 인간의 고통을 내세에서 보상받겠다는 희망을 통해 피하게 만드는 도구였습니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고통을 견디면, 내세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신념에 의지하게 되며, 그로 인해 현상을 변화시키려는 실제적인 투쟁을 미루게 된다고 마르크스는 봤습니다.
여기서 니체가 등장합니다.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던 모든 기독교인들의 적 니체가 말이죠.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의 존재를 "낙타", "사자", 그리고 "아이"라는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낙타는 부담을 짊어지고 고통을 견디는 존재로, 이는 종교적 신념, 사회적 압박, 또는 도덕적 규범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응하는 태도를 상징합니다. 낙타는 수동적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감내하며 "수고하고 견디는 존재"로서 사회적 질서나 신의 뜻에 따른 삶을 살아갑니다.
마르크스와 니체의 맥락을 종합해 보자면 종교는 고통은 덜어주지만 근본적 원인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특히 기독교는 수단화, 상품화, 도구화된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기는 하지만 어쩌면 현상 유지를 하는 대상으로도 보이기도 합니다. 그 고통을 견디기만 한다면 그 고난 끝에 천국이 보상으로 주워지니까요. 그러나 이 말은 틀렸습니다. 아니, 이 말들은 틀렸습니다.
먼저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을 말 그대로 신의 죽음으로 해석하는 것은 틀렸습니다.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가 부수고 싶었던 마르크스의 말처럼 진통제를 맞아 모든 세상의 짐을 지고 살아가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자 – 이를 부추기는 자본화된 종교 세계관, 부패한 서구권의 도덕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는 채찍을 든 선지자였습니다. 기득권의 도덕 – 기득권의 종교에 채찍을 드는 그런 선지자였죠. 그렇기에 니체는 예수를 긍정했습니다. 다만 내세관을 강화한 사도 바울을 부정했을 뿐이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 가운데 있다”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라는 유명한 찬양의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함을 피력합니다. 예수에게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완성은 재림의 예수로 인하겠지만 – 그리스도인이라면 타인을 도구화시키고 소비하고자 하며 대상화하는 권력의 도덕 – 자본의 도덕으로부터 끝없이 대항하여야 합니다. 그가 꿈꾸는 하나님 나라는 누구도 서로를 대상-도구화하지 않고 사자와 사슴이 함께 뛰놀며 아이가 뱀의 굴에 손을 넣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의 나라, 평등의 나라는 내세가 아닌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예수는 피력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나라가 예수의 가치를 따르는 이들의 노력에도 이루어질 수 없음을 믿지만 그들은 그 평화의 나라가, 천년 왕국이 이 땅에서 실현 가능할 것이라고 믿으며 일명 ‘혁명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는 키르케고르의 부조리한 믿음과 같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니체와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내세적 종교관 – 참는 태도는 예수에게 해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과 일목상통하는 경향성을 띄고 있죠. 예수의 가르침은 사회주의처럼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타인과 자신을 상품화, 도구화, 대상화함 반대하고 니체의 가르침처럼 부도덕과 부조리에 침묵하고 눈 가리기를 거부합니다. 예수는 설령 그가 꿈꾸는 평화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살아가길 주문합니다. 마치 혁명가처럼 말이죠.
03. 안티 페미니즘과 축자영감설 그리고 예수
많은 크리스천이 안티 페미니스트적 성향을 가지는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첫째는 성경의 가부장성을 문자 그대로 따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 두 번째는 동성애에 대한 페미니즘의 태도 때문이라고 어림 짐작합니다. 그러나 저는 앞서, 조금 성급한 주장을 한 만큼 조금 포용적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좁은 의미에서 페미니스트일 수 있습니다. 아니, 페미니스트입니다. 페미니즘이 여성을 향한 대상화에, 나아가 소수자를 향한 대상화에 싸우는 사상이라면 말이죠.
가부장성에 대한 문제는 앞서 서두에서 이야기한 ⓵의 단락에서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해두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일명 LGBT에 대한 페미니즘의 사상적 태도이겠죠. 먼저, 이 문제를 쓰기 전에 제 입장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보수적 성 관념에 동의합니다. 즉 성경이 죄라고 말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고 성경적 세계관 내에서 세상의 다양한 문제를 해석하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반대합니다. 가령 레위기에서 월경기의 여성을 부정하다고 묘사한 것은 문자 그대로 그 여성이 출혈하였기에 부정하다는 것이 아닌 성적 대상화되어 자산화된 여성이 월경기에도 범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는 해석을 따릅니다. 또 바울이 교회 내에서 여자들은 잠잠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은 당시 초대 교회에 잘못된 가르침을 설파하는 여성 예언자 – 선지자들이 많았음에 기원한다는 것에 동의하며 그 가르침은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는 내용이라고 확신합니다.
나아가 저는 저명한 독일의 신학자 헤르만 궁켈과 같이 창세기가 일부분 설화라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그가 지적했듯이 일류가 단일한 존재에게서 출발하여 지금에 이르렀다는 해석을 부정하며 저 스스로는 유사한 신화인 프로메테우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처럼 ‘아담’이란 존재가 혹은 아담으로 해석된 부족이 인류를 대표했을 것이란 상상을 합니다. 노아의 대홍수가 범 지구적인 이벤트로 이루어졌다기보단 지협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하고 모세의 홍해의 기적은 보다 지협적인 장소에서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제시한 과학적 현상 아래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진 이유는 홍익대 유현준 교수가 제시했듯이 ‘전쟁’이란 이벤트 속에 너무 많은 밀도의 사람들이 성 위에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하며 나아가 에스더서가 역사적 증거가 없는 유대 민족의 설화란 사실도, 요나가 고래 뱃속에 들어갔을 것 또한 설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설화를 믿음이 제 믿음과 삶에 더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조차 가변합니다. 즉 20대 중반의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장 기적적인 이벤트인 예수 부활은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역사적 실존 증거는 이미 반 기독교 역사가들에 의해서도 정설로 받아들여지니 나열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예수의 부활, 즉 죽은 인간이 삼일 만에 부활했다는 배리는 차마 받아들여집니다. 아니,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예수의 부활이 믿어지기에 구약도 긍정합니다. 구약은 예수를 향한 예언서이기 때문이죠. 신앙적으로 말이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물론 제 말이 정론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사실과 빗대어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믿으로 현상을 규명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저는 진화론이 사실임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창조’란 제 믿음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저는 창조과학이 사이비 과학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진화론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야훼가 인류를 계획하고 창조했음을 믿습니다. 과학은 현상을 규명하고 종교는 규명을 해석합니다. 그렇기에 종교가 현상을 규명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조금 조심스럽게 다시 접근하자면 적어도 종교가 성경을 잣대로 현상을 규명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규명에 있어서 성경적 언어는 앞서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알 듯이 성경은, 그중에서도 구약은 이천 년도 훨씬 넘은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 탄생과 죽음이 끝난 이후 한참 후에서야 삼국의 역사가 펼쳐졌지만, 우린 아직 우리 한민족의 역사상 최고의 구국 영웅인 을지문덕이 누구인지 – 어느 가문의 사람이고 어떻게 태어났으며 죽었는지에 대해서도 규명하지 못합니다. 장수왕의 말기를 제외한 그의 즉위 전반의 역사적 자료 또한 남아있지 않고 고구려를 세운 시조가 주몽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명확히 규명하고 있지 못합니다. 기록은, 역사는 그만큼 불완전합니다. 우리가 정론으로 받아들이는 역사서에는 신화적인 언어들이 가득하며 이는 구약의 성경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구약의 기적 또한 그 시대 사람들의 현상에 대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야훼의 섭리인 과학적 자연현상에 바탕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야훼는 최초의 인류에게 ‘쌍생성과 쌍소멸’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것들을 받아들일 지적 수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빅뱅 이론을 설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7일 창조를 이야기했던 것이고 언어로의 탄생으로 창조를 설명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린 현상을 과학으로 받아들이되, 그 현상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 저 같은 경우에는 종교적 가치관과 세계관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이 현상을 규명하는 책이 아닌 해석하는 믿음의 서적이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저 또한 그 믿음을 따르고자 합니다.
동성애에 대한 문제도 동일합니다. 제가 과거 다니던 교회는 장로교에서 진보적인 교단으로 알려진 기독교 장로회에 속한 교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단은 한신대학교를 모교로 둔 교단이죠. 한국 기독교 범주 내에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말입니다. 그렇기에 제게서 스쳐갔던 다양한 중고등부/청년부 목사님은 대개 신학적 해석에 있어서 동성애를 긍정하셨습니다. 그 또한 야훼가 허락한 사랑의 범주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죠.
그러나 저는 그것을 오랫동안 부정했습니다. 사실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을 부정했습니다. 성경을 기준으로 세상을 규명하고 해석하고자 했기 때문이죠. 그러다 우연히 ‘동성애 유전자’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고 이에 대해서 나름의 공부를 해보았습니다. 이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자주 활용도는 동성애 찬성의 근거이지요.
일단 저는 종족 번식과 보존에 저해가 되는, 아니 어쩌면 치명적일 수 있는 ‘동성애’라는 성적 취향이 유전화될 수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과학적 연구 결과를 따르자면 동성애 성향은 유전(생물학적) 요인과 환경 요인이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형성되는 것으로 알려집니다. 쌍둥이 연구 등에서 남성 동성애의 유전성은 약 34~39%, 여성은 18~19%로 추정되며, 나머지 영향은 주로 태아기 호르몬 노출 등 환경 요인으로 설명됩니다. 즉 “게이 유전자” 하나가 성적 지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요인들이 복합된 결과라는 것이 중론인 것입니다.
나아가 게이 유전자는 성 대립 선택 가설에 따라 동성애 관련 유전자가 남성에게는 동성애 경향을 유발하지만, 여성에게는 생식력을 높이는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을 바탕해 유전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실제로 동성애 남성의 어머니/이모 등 모계 혈연 여성들이 일반 여성보다 출산력이 높은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이는 동성애 유전자가 여성 친척의 번식 성공을 증가시켜 유전자를 유지시켰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여기서 들었던 생각은 유전학적으로 게이 유전자가 동성애의 백 퍼센트 요인이 아닌데 왜 게이 유전자라고 불리는 것인지였습니다. 여기서 말한 데로, 그것이 사실 여성의 다산력에 관련이 있다면 게이 유전자라고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이에 대한 대답으로는 이 또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해석에 명명되었다는 것입니다. 게이 유전자라는 표현은 마치 하나의 특정 유전자가 동성애 성향을 직접 결정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합니다. 실제로는 수십 개 이상의 유전자 변이가 아주 미미한 영향을 합쳐서 작용하며, 전체 성향의 10~30% 정도만 설명됩니다. 이를 다유전적 특성이라고 하죠. 그래서 과학자들은 유전적 상관성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며 그 기능은 여성의 다산성에 대함에 집중한다고 합니다. 대중매체는 과학을 단순하고 자극적으로 전달하려 하기 때문에, “게이 유전자 발견!” 같은 헤드라인이 쓰이곤 했습니다. 1990년대 해머의 연구 이후 특히 그런 경향이 강했습니다고 합니다. 더불어 정치적/ 문화적 상징성에 바탕해 성적 지향이 선천적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게이 유전자’라는 말이 상징처럼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는 논지를 강화하려는 맥락에서 전략적으로 채택된 언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이에 따라 저는 ‘동성애 유전자’라는 단어가 제가 줄기차게 이야기했듯이 이데올로기로 현상을 규명하고자 할 때 생기는 오류의 예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기독교인들이 기뻐할 것도 없습니다. 동성애는 그럼에도 유전적 현상이란 사실 또한 규명되기 때문이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해석이 규명을 앞서선 안된다. 성경적 해석이 – 이데올로기 / 페미니즘적 해석이 과학적 규명을 앞서 현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기독교인들 또한 이를 주목해야 합니다. 엄연한 유전학적 현상에 대해서요. 야훼 앞에서 확신하지 말라는 문장이 떠오릅니다. 그것만큼의 교만이 없다는 것이죠. 여호와의 정언 명령이라 여기며 <간음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여성의 대상화에 활용했던 고대 유대 사회와 같은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우리의 확연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적 성향이 야훼의 아가페적인 사랑에 포함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에 정말로 유전적으로 동성애가 전달되는 성향이라면 우린 선천적으로 동성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저주받은 사람’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우린 리처드 마우라는 신학자의 해석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제 신학적 가치관과 매우 비슷한데, 리처드 마우라는 신학자는 보수적 개혁주의자임에도 동성애자들과의 관계에서 상호 존중과 공감을 강조합니다. 그는 한 에피소드에서 장애인 공동체 예배에 참석한 자신의 체험을 소개하며, “하나님이 내게 지어주신 사람”임을 선언한 구절을 낭송하는 동성애자들을 보며 그들의 고통에 공감했습니다. 비록 교리적으로 동성애 행위를 죄로 보나 동성애자 개인의 인격과 애통에 대해 공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우는 이러한 공감이 신학적 진리와 상충하지 않는다고 보면서도 “내 신학·윤리관은 바뀌지 않았으나 그들의 인간 됨을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라고 밝혔습니다. 즉, 그는 동성애 성향 자체를 하나님의 창조물로 인정하나 전통적 교리대로 동성애 행위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마우는 동성애를 문자적 성경으로 규명하고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유전적 상관성이란 과학적 규명을 하나님의 창조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자신의 종교적 틀 안에서 해석했죠. 그렇다고 반대의 의견을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핵심은 사랑입니다. 맞습니다. 사랑입니다.
개인적으로, 이제 제가 확신하는 것은 신이 제게 무한하게 전달하는 ‘사랑’ 밖에 없습니다. 죄가 없는 이가 죄 많은 원수를 위해 십자가에 내달릴 정도의 사랑 밖에 없습니다. 진리에는 확신을, 비진리에는 관용을, 모든 것엔 사랑을 이란 격언이 있듯이 저는 제가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사랑’ 외에 모든 현상에 야훼와 예수의 사랑으로 규명하려고 합니다. 그런 측면에 있어서 우린 페미니즘이 바라보는 소수자를 향한 연대 의식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페미니즘이 동성애나 성소수자를 옹호하기에 그들을 배척하기보단, 그 안에 있는 핵심을 – 그리고 그들이 포용하고자 하는 소수자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페미니즘은 기본적으로 여성의 권리와 평등을 옹호하는 사상입니다. 그 핵심은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권리가 남성과 동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 페미니즘은 여러 가지 세부적인 이슈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 주된 목적은 성별에 따른 불평등과 성차별을 없애고, 모든 인간이 존엄과 평등을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에 맥락에서 소수자에 대한 연대는 페미니즘을 단순히 여성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소수자와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연대를 포함하게 만듭니다. 이는 동성애(성소수자), 빈곤층, 이주민, 인종적 소수자 등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대와 지원을 의미하죠. 따라서, 페미니즘의 핵심은 대상화와 소외에 맞서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고유한 존재로서 존중받고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또한 같은 맥락의 사상을 견지했습니다. 예수는 단순히 여성만을 위한 인물이 아니라, 모든 억압받는 자들과 소수자들을 위한 연대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는 세리, 창녀, 병자,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존엄성과 권리를 옹호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의 가르침은 단순히 여성의 권리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확장될 수 있습니다. 세리 마태와의 만남에서 예수는 세리를 부르며, 죄인과의 연대를 통해 사회적 약자들이 고백하고 회개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습니다. 이는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는 인간을 도구화하거나 상품화하는 사회적 구조에 맞서 싸우고, 모든 사람을 고유한 존재로 존중했습니다. 그는 대상화에 맞서 존엄성과 인간성의 회복을 위한 싸움을 이끌었습니다. 예수는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았고, 모든 사람이 야훼의 형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는 모든 차별을 뛰어넘는 사랑을 강조하며, 그 사랑이 여성, 남성, 성소수자 등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방식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는 죄로, 혐오로 대상화되어있는 자들을 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나병환자였죠. 예수 시대에 나병 환자로 산다는 것은 죄인 취급과 격리, 절망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나병 환자에게 다가가 만지시고 고쳐주심으로써, 야훼의 사랑이 어떠한 경계도 넘어간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병자에게 깨끗함과 용서를 선포하여 육체의 고침과 영혼의 해방을 동시에 이루셨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이를 다시 품 안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야훼의 은혜로운 성품과 복음의 핵심 가치를 봅니다.
반면, 현대에도 여전히 일부 종교인들은 동성애자를 향해 돌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죄인 중의 죄인으로 낙인찍고 공동체에서 몰아내는 것이 의로움을 지키는 일인 양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복음의 정신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바로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예수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야 필요하니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죄인과 약자들을 부르러 왔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과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며 그들이 야훼의 나라의 주인공이 되도록 이끄셨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오래된 해석 아래 얼마나 많이 고통받는 이들을 놓쳐왔습니까. 마치 나병 환자들을 성전에서 쫓아내 동굴로 내몰았던 고대 유대인처럼 말이죠. 예수 시대의 나병 환자 치유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도전하게 합니다. “과연 지금 우리의 신앙 공동체는 누구를 나병 환자 취급하고 있는가?”라는 질문 말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지 숙고해 보게 합니다. 신학자 몰트만의 말처럼, 교회의 참된 표지는 고통받는 이웃의 상처라고 합니다. 교회가 그 상처를 끌어안고 함께 아파할 때, 비로소 예수의 몸 된 공동체로서 제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예수의 가르침은 페미니즘의 핵심 가치와 잘 연결됩니다. 그는 여성의 존엄성과 평등을 인정했으며, 소수자와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대와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예수는 사람을 도구화하거나 상품화하는 사회적 구조에 맞서 싸웠고, 대상화된 존재를 존중하는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는 좁은 의미에서 페미니스트일 수 있으며, 페미니즘의 소수자 연대와 평등을 위한 싸움에 대한 가치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04. 위선자와 예수에 대한 단락글
저는 지금까지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이 가지는 예수적 가치의 유사성을 이야기하며 어쩌면 우리가 오랫동안 놓쳐왔을, 편견에 의해 외면해 왔을 가치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좁은 의미에서 페미니스트이며 넓은 의미에서 사회주의자라고 칭해왔습니다. 그러나, 사실로서 예수는 그들일 수 없습니다. 예수는 사회주의자로도, 페미니스트로도 정의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대개 다 위선자들입니다. 적어도 제가 경험하고 바라본 이들은요.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폭력엔 눈을 감기 때문입니다.
권해효 배우의 인터뷰에서 이런 단락을 보았습니다. “메갈리즘 운동을 주류 남성의 폭력성과 동일 선상에 두는 것은 오류이다” 만약 페미니즘이 그런 것이라면, 그러니까 같은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폭력을 용인한다면 저는 예수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의할 수 없습니다.
예수에게는 권력자를 향한 자그마한 폭력조차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지키기 위해 군인들의 귀를 잘랐을 때도, 제자들이 예수를 로마 권력을 향한 정복적 리더로 보았을 때도 예수는 폭력을 그 방식으로 활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그 어떤 방식의 폭력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신, 즉 성전의 부패를 제외하고선 말이죠.
예수의 가치는 비폭력에서 나옵니다. 예수의 가치는 유형적 전복에 중심을 두지 않습니다. 예수의 가치는 사랑의 전파에 있습니다. 긍휼함에 있습니다. 그렇게 로마는 정복되었습니다. 폭력의 저항이 아닌 사랑의 저항으로 권력은 정복되었습니다. 예수의 전복은 그렇게 진행됩니다. 예수의 저항은 폭력적 전복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기득권으로 간 기독교는 그 예수의 가치를 잃어버렸지만요.
예수가 보여준 ‘전복’은 세상의 전복과는 달랐습니다. 그의 저항은 칼이 아닌 눈물로, 그의 혁명은 분노가 아닌 사랑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칼을 들었을 때 예수는 그 칼을 거두라 하셨고, 제자들이 하늘의 불을 내려 정죄하길 원할 때 그는 조용히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의 전복은 폭력의 반복이 아니라 폭력의 무력화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는 결코 페미니즘이나 사회주의로 귀속될 수 없습니다. 그 운동이 인간을 억압하는 질서를 해체하고자 출발했을지라도, 결국 그것이 다른 형태의 권력과 배제로 귀결된다면, 예수는 그 자리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혁명, 자기 의가 뒤섞인 정의, 용서 없는 급진성은 예수와 무관합니다.
저는 영화하는 진보주의자들의 위선을 마주합니다. 그들은 여성의 아픔에 대해서, 차별에 대해서 끝없이 이야기하지만, 그 내면엔 노동자를 도구화하고 배우들을 대상화하는 이들로 가득합니다. 어떤 감독은 “요즘 여배우들은 캐릭터를 위해서 도통 벗질 않아”라고 말하지만 여성주의, 페미니즘적인 서사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각광받죠. 현장에서 수없는 여성들이 대상화되어 언어로서, 행동으로 차별과 행동을 받지만 영화를 만드는 이들은, 즉 그 위선적인 진보주의자들은 침묵합니다. 여성주의 영화-진보주의 영화라는 이데올로기의 완성을 위해, 진보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완성을 위해 수많은 스텝들은 대상화되고 소비되고 도구화됩니다.
두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사람들은, 일반화하기는 그렇지만, 대게 위에 말한 영화를 만드는 방식을 따릅니다. 과정에서 끝없는 대상화와 도구화, 소비화를 합니다. 어떤 종류의 폭력을 거부하고 대상화와 소비화를 포기하긴보단 자신들이 믿는바 ‘영화’ ‘노동해방’ ‘여성평등’을 이루기 위해 작고 크게 폭력을 용인합니다. 물론 저 또한 그렇습니다.
<살처분>이라는 단편 영화를 찍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과 조류 살처분이란 개념을 융화시킨 영화인데, 저는 환경주의적이며 진보주의적 가치 아래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영화를 찍었지만, 생명의 존엄과 평등 – 환경적 가치를 기치로 서사를 만들었지만 실제적으로 영화를 찍으며 저는 수많은 스텝들을 도구화하고 배우를 도구화하고 병아리를 도구화했습니다. 저 또한 예수의 가치를 따르겠다고 했지만 “왜 학생 단편을 찍는데, 대우받길 원하지?” “배고픈 거 조금 참으면 안 되나?” “학생 영화하는데 잠 조금 덜자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진보주의를 표방하며 대학생활을 하고 창작 활동을 해왔지만, 그럼에도 저는 그 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제 스텝들을 도구화해 왔습니다. 저는 저 스스로의 위선을 바탕해서 진보주의의 위선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이젠 영화를 찍는 것이 두렵기도 합니다. 영화를 찍는 그 과정 자체가 끝없이 예수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끝없이 보수의 악함을 지적합니다. 기득권을 비판하고 저의 가치가 선함을 강조합니다. 작은 폭력은 미러링이며 그것이 이룰 평등의 가치를 위해 폭력과 또 다른 차별을 눈감습니다.
예수는 편 가르기를 넘어서고, 억압자를 미워함으로 억압받는 자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방식을 거부합니다. 그는 폭력적 권력자뿐 아니라,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는 자들의 위선 또한 드러내셨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자신을 보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의 방식으로 보면 그 모든 사람들은 위선자입니다. 아니 저는 위선자입니다. 그런 느린 방식의 저항이기에, 답답한 방식의 저항이기에 예수의 가치는 외롭습니다. 아무도 예수의 가치를 따르지 않고, 혹은 표방하지만 왜곡하기만 합니다. 심지어 예수는 그 가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살아있을 때 말이죠.
그러나 오늘날의 도덕률은 예수의 사상에서 기인했습니다. 예수가 저항했던 폭스 로마나는 무너졌고 잠시나마 그 자리엔 샬롬이 자리했었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예수의 가치는 왔지만 오지 않은 가치입니다. 그래서 더 외롭고 두렵도 괴로운 것 입니다.
그렇기에 우린 예수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린 스스로를 선으로 여기는 혹은 성역으로 여기는 가련한 진보주의자들의 위선에 대해 눈을 떠야 합니다.
폭력을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신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습니다. 예수의 가치가 그러하였고 끝내 폭력의 로마는 무너졌습니다. 우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아니, 저는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예수의 가치로, 예수는 좁은 의미에서 페미니스트일 수 있고 넓은 의미에서 사회주의자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예수는 그들과 같을 수 없습니다.
예수는 느리더라고, 아프더라도, 그럼에도 사랑으로 이겨내려고 합니다. 바꾸려고 합니다. 대상화에, 도구화에, 그리고 폭력에 말입니다. 설령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가치이지만,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왔다고 믿으며 느리더라고 우린 그 가치를 따라야 합니다. 폭력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Picture from_ withaview.ai
필명_고갬동 (gogamd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