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생각한 것 01_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과 <키르케고르 입문>
Part 1.
오랜만에 지인들과 새벽을 지새우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것들은 총체적으로 보았을 때 ‘성적 자기결정권’에 관한 일련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시작은 영화 <가여운 것들>에 대한 파편적인 감상평들이었습니다. 지인 A는 영화 <가여운 것들>에서 벨라(엠마 스톤 役)의 무분별한 성행위가 성적 자기결정권에 의한 행동, 즉 자신의 주관적 선에 대한 최선의 행동이었다며 영화를 긍정하였습니다. 반면 필자는 칸트의 정언 명령에 위배되듯 욕망의 주체인 벨라가 사회란 시스템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는 것, 스크린에서 벨라의 성을 담아내는 방식이 과격함에 대해 논하며 영화를 부정하였죠.
이러한 담론들은 이윽고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논재로 치달았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성을 수단화함 거리낌이 없다면 과연 우리 사회는 그것을 지탄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간단한 예시로 ‘스폰’이 소재로 나왔는데,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주체가 즐거이 성을 도구화할 수 있다면 그것을 도덕적으로 지탄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방식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은 아닙니다. 성적 쾌락 추구가 그 삶의 목적인 사람이 성의 도구화를 통해 재화를 마련할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자아실현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개인적인 필자의 주장은 여전히 칸트의 정언 명령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인간은 도구화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 말입니다. 이는 사회 구성원이 주체적 지향성과 무관하게 자신을 도구화하려 함과 타인을 도구, 소유화함을 도덕이란 불변적 잣대로 막아야 한다는 개인적인 생각에서 도출됐습니다. 도구화 됨은 도구화 함을 탄생시킵니다. 그렇기에 성이 수단화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주장에는 허점이 있습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부르주아에 의해 프롤레타리아가 수단화되는 자본주의의 체제 아래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덤 스미스와 헤겔은 노동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애덤 스미스는 노동과 인격이 분리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현실 사회에서 우린 수많은 순간 속에서 노동과 인격이 동일시되어 존엄의 상실을 겪고 목격합니다. 그런 사회에서 속 필자가 오롯이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해서만 정언 명령을 적용하고자 하는 것은, 혹은 이미 그 체제의 순응하며 그 도덕성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역설적으로 보이기 충분한 것입니다. 우린 이미 충분히 인격을 재화로 환산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김봉규 작가의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선 더 도발적인 의견을 개진합니다. 그는 매춘이 ‘자본을 위해 인격을 상품화하는 것’으로 새롭게 정의되는 순간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은 누구나 잠재적인 매춘부가 된다고 말합니다. 자본주의는 승진이나 구직을 위해 끊임없이 인격을 포기하라고 말합니다. 돈이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이야기도 합니다.
이에 현혹되어 사람들의 비판적 사고는 마비되고 올 곳이 스스로의 인격을 매춘하여 자본주의란 이데올로기에 맹목적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이윽고 이러한 맹목성은 보편, 정상스러움으로 사회에 자리 잡힙니다. 자본주의는 자본을 위해 인격을 포기하는 것을 장려하고 때로는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현실을 포장합니다. 그러므로 매춘은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다른 직업이 지니는 도덕성만큼 도덕적이며 그 비도덕성만큼 비도덕적입니다. 결국 자본주의는 매춘을 장려합니다.
그런 측면에 있어서 우린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재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작가 김봉규는 그의 저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또 얼마 후 소련이 붕괴됐을 때 사람들은 드디어 인간적인 체제가 비인간적인 체제를 극복한 것이라 믿었지만 이는 착각이었습니다. 이념으로만 보면 차별 없는 세상, 함께 벌고 나눠 동일하게 행복을 누리는 세상을 꿈꾼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에 비해 훨씬 인간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도덕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은 자본주의가 인간의 욕망에 기초한 이데올로기라는 점에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무산계급이 원하는 평등 사회를 만들면 모두 다 행복해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비슷한 월급, 비슷한 집, 비슷한 지위 등 차별이 없는 세상에 만족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혁명으로 유산계급을 때려 부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줬습니다. 하지만 마르스크주의는 자멸했습니다. 체제의 문제도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노동자와 농민이 만족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인간은 만족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길 원하고 더 소유하길 원합니다. 그렇기에 본질적으로 인간의 욕망에 기초해서 보자면 인간은 자본주의에 더 적합합니다. 인간은 타인을 짓눌러서라도 자신의 내던져서라도 욕망하고 얻어내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의식주에 대한 생존의 욕구는 사치를 만들어 내고 이윽고 익숙해진 사치는 극단의 폭력으로도 잉태 됩니다.
쉽게 생각해 봅시다. 사실 늑대는 필요 이상의 사냥을 하지 않습니다. 생존을 위한 살생 그 이외의 것들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더불어 사실 개 또한 발정기 때만 성교를 합니다. 하지만 이른바 문화화되었다고 자부하는 문명인들은 시도 대도 없이 온갖 잡다한 방식을 동원해 살육하여 이른바 괴식을 즐기고 성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다양성이며 행복추구권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권리는 점차 성장하여 폭력적인 양상을 띄는 푸아그라나 샥스핀로 발달되기도 하고 영화 <감각의 제국>에서의 사디즘이나 <소돔에서의 120일>과 같은 소설처럼 극단의 폭력성으로 발화되기도 합니다.
작가 김봉규와 필자는 이러한 양태를 보며 인간이 도덕적이지 않는다는 결론을 가지게 됩니다. 대신 인간은 욕망 중심적인 개체이며 육체중심적인 개체라는 판단합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이 자본주의란 채제 아래서 우리는 더욱 자신을 도구화하고 타인을 수단화하여 육체의 욕망을 체우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도덕을 표상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교육하는 것일까요. 김봉규 작가는 인간이 도덕적인 사회를 통해 자신의 이기심을 실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인간이 원하는 도덕적인 사회는 개인의 이기심에 도움이 되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중간 정리를 해보고자 합니다. 지인과 나눈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필자의 주장은 칸트의 정언 명령에 바탕한 도덕적 언어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실제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자본주의가 성을 활용한 매춘과 마찬가지로 인격을 매춘하는 양태를 뛴다는 작가의 통찰로 반박됐습니다. “죄 있는 자만이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즉 필자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을 긍정하는 한에서 타자를 향한 도덕적 판단이 사실상 무용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아가 사회는 그 자신의 뜻대로 수단화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덕적 잣대를 내밀 수 없습니다. 작가는 이러한 자본주의는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에 바탕한 체계이며 인간 사회에 적합한 이데올로기라고 봤습니다. 나아가 작가는 이 시대를 새롭게 정의합니다. <합리적 이기주의>라고 말이죠.
Part 2.
김봉규 작가는 역사의 흐름과 이기주의의 발전 양상이 인간의 성장 과정과 흡사하다고 말합니다. 고대 시기, 그러니까 인간으로 따지자면 대략 6개월 이전의 갓 태어난 아이는 주변 대상들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며 애착 대상을 찾습니다. 그런 고대의 인간 문명의 애착 대상은 바로 눈앞에 있는 자연이었습니다. 주체인 아기는 눈앞의 세상 자연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자연을 하나의 상급 개념(신, 종교)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해의 방식은 토테미즘과 애미니즘, 샤머니즘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봅니다. 이는 자연 중심적인 시대관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연 중심주의적이거나 생태주적이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유아기의 형태에서의 불안함을 자연이라는 경외의 대상을 신적인 존재로 삼으며 극복하고자 했지만 그 자연을 소비하고 정복하고 자연을 향한 신심은 생존의 욕구로서 찾는 기복적인 양상으로만 발현될 뿐이었죠.
이러한 양상은 중세에 바뀌게 됩니다. 인간의 성장기로 따지자면 부모를 각인하는 시간을 거치는 단계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작가는 자신의 구체적인 존재의 근원인 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단계를 가지게 됐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주체로서 유일신을 바라보고 신을 통해 자신을 지각합니다. 또 기존에 기복 신앙의 대상이었던 자연에 대한 새로운 지각을 가지며 인간 자신에겐 존엄을, 자연은 정복의 대상과 탐구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 시기 또한 신 중심적인 사고나 신 중심주의는 아니었습니다. 신은 단지 인간의 욕망을 이루어주는 명분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국교는 이기적인 권력 집단을 수호하는 사상으로 전락하고 예수 또한 기복적으로 이해됐죠. 당연하게 무지의 시간 또한 두려움으로 받아들여졌던 자연이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 점차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고대와 중세는 각각 자연과 신 중심적인 사고와 지각 체계였지만 실질적인 원리의 발전의 동기는 이기심과 권력욕이었습니다. 그것들에 의해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대항할 자신감을 얻습니다. 이렇듯 진보의 원동력이 되었던 이기심은 폐쇄적인 이기심이었습니다. 권력층만이 자연과 중세의 야훼에게 권력을 승인, 합리화 받는데 사용됐기 때문이죠.
이렇듯 지금 것 문명의 진보의 원료였던 폐쇄적 이기심은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민사회로 넘어가며 자연스레 합의에 의한 건전한 이기주의로 바뀌게 됩니다. 계몽주의의 도래이죠. 계몽은 인간이 자연과 신을 통하여 구태여 자신을 지각할 필요성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렇게 주체는 이성을 통해 자신을 인지하고 스스로를 신격화한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자연을 전능적 주최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죠. 그 결과 신은 죽고 자연은 사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건전한 이기주의는 다음과 같은 폭력성을 도출해냅니다. 이성의 절대화는 비이성의 억압을 만들어냈고 이는 이분법의 탄생을 의미했습니다. 이 이분법적인 분류로 서양 중심주의가 되고 백인 우월주의와 이성적이라 믿었던 남성우월주의는 탄생시킵니다. 그리고 권력을 쥔 다수고 이성을 무기로 정상이 되고 마거릿 대처와 그 시대 영국 보수당의 말처럼 가난한 이들과 소수자들의 가난과 차별을 비이성적인 그들의 삶에서 기인시킵니다. 나아가 이성 중심적 사고는 과학 지상주의와 자국 우선주의에 바탕한 제국주의와 우생학이 탄생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근대는 합리적 이기주의에 바탕된 이성의 폭력이 지배한 시대였습니다.
근대를 주도한 건전한 이기주의는 앞서 설명한 그 자체의 폭력 아래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의무주의, 공리주의, 이기주의, 나아가 도덕감정론 등 근대의 일원적 규범 윤리학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특히 공리주의의 본질이 집단 이기주의라는 점, 의무주의 역시 최소한의 자기중심주의를 지키려는 인간의 보편적 이기주의였단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이성이 목적에 대한 도구를 찾는 능력 이상과 이하도 아님을 확인시키며 이성의 양면성을 더욱 부각합니다. 이러한 양면성을 무기력감으로, 즉 비이성적 것들인 성과 폭력을 부각시키기 시작합니다. 이성의 광기와 무의식의 원시적 본능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죠.
이내 인간은 그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에 있어 신체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몸 중심주의의 도래입니다. 이성 중심주의는 비이성적인 것들, 즉 몸과 감성, 욕망, 쾌락, 성과 광기 등의 지배된 시대로 변화됩니다. 따라서 주체는 파편화되고 비이성의 패러다임이 형성되죠, 더불어 이와 같은 이성의 해체는 서양의 몰락과 동양 중심의 세계 개편을 의미하며 남성에서 여성 중심적, 인간에서 자연중심적, 다수에서 소수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이성의 몰락은 통일이 아닌 해체로서 유일성이 아닌 다양성과 타자성을 선호하게 됐습니다. 다윈주의와 상대주의의 일반화가 되었으며 그럼으로 원하는 대로 삶을 향유하려는 자유주의와 주관적 도덕론이 점차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합리적 이기주의는 꽤나 실용적이고 가치 있어 보입니다.
Part 3.
그러나 이성을 대신한 몸 중심주의는 사고하지 않는다고 김봉규 작가는 말합니다. 이는 감정적이며 충동적이고 욕망하며 발전된 양태로 성욕과 온갖 욕망을 해소합니다. 평등과 존중이란 이름으로 실행되는 맹목적인 다양성은 여전히 이분법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도덕적 선인 것 처럼 행동하며 우월성을 가집니다. 또한 관계는 피상적이고 말초적이며 맹목적입니다. 아드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이론처럼 사람들은 간격과 틈새를 종말 시키고 사고하길 포기하며 소비자이자 향유자로서 감각만 하길 원합니다. 폴 비릴리오의 질주학에 따르면 이제 인간은 스스로 영위할 공간조차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간은 더욱 단순해졌습니다.
이런 합리적 이기주의는 인간이 세우고자 했던 가변적 도덕성에 기인합니다. 가변적 도덕성은 앞서 말씀드렸듯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도덕성을 말합니다. 절대적 도덕성의 기틀이 사라지고 주관의 도덕이 자리 잡히자 인간의 가변적 도덕성에 꽃을 피운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주관이 곧 도덕이자 진리인 것입니다.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은 이러한 이기적인 인간들에 의해 “신은 죽었으니 마음껏 원하는 대로 사세요”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바뀌었습니다. 니체가 무덤에서 들으면 통탄할 노릇입니다. 도덕은 이제 절대성에서 벗어나 이기적 개인의 삶의 영위를 위해 – 자신들의 욕망과 이에 바탕한 정체성을 이루어내기 위해 가변적으로 바뀝니다. 개인의 주관이, 즉 이기적인 개인의 주관이 진리이며 존중받는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본주의와 같은 선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오늘날의 인간 궁상에 아주 적합한 이데올로기일 것입니다.
철학자 키르케고르와 헤겔의 통찰을 빌리자면 이러한 자유로움은 소피스트들과 낭만주의자들에게서 기인합니다. 소피스트 프라타고라스는 만물이 척도라는 말을 했습니다. 헤겔에게 이것은 각 개인이 자신만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상대주의와 연결됩니다. 소크라테스는 상대주의의 시초라고도 불리지만 사실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헤겔과 키르케고르가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선이 주관적 진리와 연결되지만 그 자체로서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봤습니다. 핵심은 그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개인이 이성과 비판적 성찰로서 스스로 획득해야한다고 본 것 입니다.
이를 조금 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친구는 델포이의 신탁에서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여사제는 없다고 대답했죠. 그 이야기를 들은 소크라테스는 당혹스러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소크라테스는 한 사람 한 사람 지혜롭다고 여겨졌던 이들에게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스스로가 대단한 전문가인 것처럼 행세했을 뿐 사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상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가닿았습니다. “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달리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더 지혜로운 것이구나!” 그렇기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종교적 의무로서 무지를 깨닫게 도와주는 담론을 진행했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주관적 진리를 취하여 삶을 영위하는 소피스트들과 달리 객관적 진리 안에서 주관적 진리를 취득하였습니다. 이 주관적 진리는 소크라테스가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어리석고 무지한 이들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는 부조리 속에서도 지켜야 할 가치 있는 진리였습니다. 그렇기에 우린 소크라테스의 상대주의를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와 같은 선상에 둘 수 없습니다. 소피스트들은 자의적이고 이기적인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비판적 성찰을 사용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 도구가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진리에 도달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헤겔은 이를 주관과 객관의 통일이라고 불렀습니다. 개인은 사고와 이성을 통해 자신 안에서 진리 또는 보편적 윤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고와 이성은 다른 이성적인 사람들에게도 도달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헤겔은 소크라테스가 ‘우연적이고 가변적 내면에 반대하고 보편적이고 참된 사유의 내면에 동의’하며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일 뿐만 아니라 사고로서의 인간이 만둘의 척도라도 말했다고 합니다. 그럼으로 이 진정한 양심을 일깨웠다고 말했죠. 즉 소피스트들은 주관성이 개인의 우연성, 즉 감정, 변덕, 기분 등을 의미하기 때문에 상대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생각이 보편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또한 우리를 다른 사람 및 ‘객관적’ 진리와 연결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죠.
마찬가지로 낭만주의자들은 객관적 이성의 가치보다 주관적 감정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내가 가진 합리적 능력 안에는 특별한 사람으로서의 나에 대한 어떤 특별하거나 독특한 것이 없고 모두가 공유하는 능력일뿐이기 때문이다.”
반면 낭만주의자들은 진짜 자아가 나오는 곳이 감정과 느낌뿐이라고 본 것입니다. 헤겔은 소피스트와 마찬가지로 낭만주의자들도 상대주의자로 간주하고, 전통에 대해 그들이 공격하는 것은 오직 자기만족감에 자극받는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정의, 도덕, 선 등과 같은 모든 결정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것은 결국 교육 받은 사고를 지닌 나야. 왜냐면 나는 분명 이 분야의 대가이니까. 나에게 무언가 유익한 것처럼 보인다 해도 나는 그것을 쉽게 전복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 그것들이 지금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한에서만 나에게 진실할 수 있기 때문이지”
낭만주의자들은 자신의 관점이 더 이상 스스로에게 맞지 않을 때 언제든 자기 뜻대로 바꿀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개인은 스스로 진리에 도달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진리가 각 개인에게 독단적이거나 상대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진리를 희생하면서까지 개인의 진리에 대한 자기만족적 즐거움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만하게도 자신의 관점이 다른 사람의 관점보다 우월하다고 믿지 않습니다. 낭만주의자들과 달리, 소크라테스는 수용된 관습과 전통을 공개적으로 조롱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헤겔은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에 대해 “말하는 태도요, 즐거운 경주”라고 결론짓습니다. 단지 농담인 것처럼 모든 것을 다루는 낭만주의자들의 “풍자적 조소 혹은 가식”과 대조적이죠.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성을 감정과 감각이란 용어로 정의합니다. 그러나 헤겔은 이러한 요소는 동물과도 공유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감정과 감각은 우리 모두의 속에 있는 인간적인 요소임을 확인해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공유된 이념, 문화, 문명이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성 능력이라고 헤겔은 보았죠. 더불어 이성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우리를 통일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합리적인 존재를 인식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키르케고르와 헤겔은 소피스트와 낭만주의자가 가지는 이기적 도덕성, 이기적 주관성, 가변적 태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감정과 주관/기분에 반대되어 이성에 의해 보편타당하게 존재하는 도덕, 가치가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완곡한 절대주의자의 양상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보면 헤겔과 키르케고르를 완전히 오독한 것이죠. 그러한 가치가 이성과 비판적 사고를 통해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지며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건전한 도덕, 이상이 주관적으로 취해지며 진리로 체득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이를 더 알기 위해 아포리아에 대한 키르케고르와 헤겔의 입장을 알아봐야 합니다.
Part 4.
아포리아는 어려운 문제와 난제를 뜻합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아포리아는 치장된 껍데기 지식이 무너진 혼돈의 상태, 즉 무지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에 대한 헤겔과 키르케고르의 입장은 갈립니다. 헤겔은 소크라테스가 대담자들의 견해에 모순을 찾아내 혼란에 빠트리는 것에 멈춘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헤겔은 부정을 넘어선 변증적 긍정을 원합니다.
헤겔은 존재와 무존재의 모순을 예로 들었습니다. 하나가 있으면 다른 하나는 없습니다. 그러나 헤겔은 이러한 개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무의 개념 없이는 존재의 개념을 생각할 수 없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는 반드시 다른 하나를 암시하고 따라서 고립이 아닌 하나의 더 높고 복잡한 개념을 도출합니다. 변증법적으로 말이죠.
어떤 것이 생겨날 때 존재가 되고 똑같이 소멸하여 있지 않을 때도 무가 됩니다. 이런 식으로 처음에는 풀 수 없는 모순처럼 보였던 것에서 긍정적인 개념이 등장합니다. 모순에서 발견되는 혼란과 고립은 단지 단계이며 결국에는 긍정적인 변증법적 결과를 도출합니다. 부정의 개념은 긍정적 전개를 위한 토대입니다. 그렇기에 헤겔은 소크라테스가 긍정적 발전을 암시하지 않은 것에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그러한 아포리아를 긍정합니다. 아이러니와 무. 분명하게도 키르케고르는 그러한 무지한 혼돈이 새로운 긍정적인 시작을 야기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또 활용했습니다. 그렇지만 헤겔과 달리 소크라테스가 그 무지에서 시작해 자신의 철학과 도덕을 확립시키지 않은 것에서 있어서도 긍정했는데 이유는 키르케고르가 받아드려지는 내적 진리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일기 AA>라는 청년 키르케고르의 저서에서 발쵀된 문장입니다.
내가 소위 객관적 진리를 발견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혹은 철학자들의 체계를 통해 성공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런 점에서 국가의 이론을 만들 수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가 거주한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떠받치고 있을 뿐이다.
키르케고르는 객관적 진리를 거부하는데 이는 그가 소크라테스처럼 진리가 그 자신 안에서 발견되어야 함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인인 그가 기독교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은 꽤나 신선합니다. “기독교가 나와 나의 삶을 위해 더 깊은 의미가 없다면, 수많은 분리된 사실을 설명한다 한들, 기독교의 의미를 제시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는 다음의 맥락과도 맞습니다. 일부 교회 공의회가 결정한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이것은 이 사실과 개인의 관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소크라테스처럼 키르케고르는 더 깊은 진리를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주관적 진리라고 믿습니다.
나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히 하는 것이다. 내가 알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운명을 이해하는 문제고 신이 내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는 문제다. 문제는 나를 위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고 내가 기꺼이 살고 죽을 수 있는 사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키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의 부정을 긍정했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아포리아는 관습처럼 혹은 진리처럼 내려오는 전통과 문화의 절대성을 무너트리고 무비판적으로 권위에 의해 받아들여진 타인의 지식을 걷어내는 데 도움을 주는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적어도 개인이 치열한 고민과 고뇌로 스스로의 주관적 진리를 탈취해야 한다는 키르케고르의 입장에서 말이죠. 이것이 키르케고르와 소크라테스가 가지는 주체적인 진리 탐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타난 키르케고르의 생각은 구체적으로 발전됩니다. 이 작품의 서두에서 그는 ‘객관적 이슈’는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역사적 기록, 자료 등과 같은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은 기독교에 대한 객관적인 진리입니다. 대조적으로 주관적 진리도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와 개인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키르케고르에게 있어 기독교에 대한 개인적이고 내적이고 주관적인 관계에 대한 문제는 정립될 수 있는 모든 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보다 훨씬 중요하고 더 깊은 진리입니다. 이러한 주관과 객관에 대한 성찰은 소크라테스의 사고 혁명에서 출발한 것이죠.
다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필자는 ‘성 자기 결정권’에 대한 도덕적 논의의 단계에서 우리 사회가 채택한 자본주의의 한계를 깨달으며 도덕적 비판의 무용에 대해 깨달았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도덕성은 사실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속에서 개인의 입맛에 맞게 상대주의적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했고 그러한 오늘날의 시대를 합리적 이기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발견했죠. 그렇기에 우린 헤겔과 키르케고르가 발견한 소크라테스의 아포리아로 상대주의와 낭만주의가 가지는 한계점을 말하며 오늘날의 가변적 도덕성, 상대주의적 태도의 한계와 무책임성에 관해 이야기해 .
대신 키르케고르와 헤겔의 주장을 바탕으로써 보편성이 개인에게 주관적 진리로 다가왔을 때 발견될 수 있는 의 진중함에 대해서 논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필자는 낭만주의자와 소피스트처럼 개인의 기호 혹은 영위를 위해 언제든 그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상대주의적인 태도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키르케고르가 주장하는 “기꺼이 살게 하고 죽게 만드는 진지한 고찰”과 달리 몸의 즐거움과 선호에 따라 가변하는 합리적 이기주의와 상대주의의 다양성은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의 가변적 진리가 개인에게 기인한다는 사실은 개인에게 이롭겠지만 단체엔 해롭습니다. 물론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전통과 권위의 절대주의 또한 키르케고르와 소크라테스가 저항한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무익함과 별개로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자본주의는 주관의 ‘선’이라는 미명 아래 가변적 도덕관의 명분으로 끝없이 개인의 이기적 욕망을 허용하고 용납할 뿐입니다. 나아가 진중한 토론과 치열한 성찰 없이 개인의 기호에 따라 확립되는 진리는 사실 따지고 보면 개인의 사투가 아닌 무질서한 타인의 이데올로기입니다. 키르케고르와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개인에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솔직하게 오늘날에 자리 잡은 다양한 가변적 도덕성과 다양성들이 개인에게 얼마만큼 진중한 성찰과 고뇌에서 나온 것인지에 대해서도 부정적입니다. 오늘날의 다양성은 소크라테스의 아포리아에서 시작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여 가변적 도덕성으로 권위를 가지고 자본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울타리 안에서 자유롭게 활개 칠 뿐이라고 느껴집니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다양성에 대한 진중한 성찰은 없지만 대신 다양성에 대한 엄격하고 근엄한 존중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번 벨라가 떠오릅니다. 벨라는 프로이트의 성기기가 떠오르는 캐릭터입니다. 성에 대해 눈을 뜨고 그 성에 대한 무긍무진한 욕망밖에 없는 캐릭터입니다. 우리는 이 캐릭터가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바탕으로 삶을 영위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어떠한 측면에서 그녀는 동물과 같이 성적 욕구를 채울 뿐입니다. 영화가 묘사하는 그 모습이 유아적인 양태일 뿐 이는 비단 우리 사회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적 자기 결정권이란 미명 아래 진지한 숙고 없이 몸의 욕망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더 이상 숙고 받지 못하는 이유는 주관이 진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동물처럼 영위할 자유까지 얻게 됐습니다.
그렇다고 필자가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주관의 진리성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는 절대성에서 기인하는 전통과 보편의 도덕이 무너지는 역사적 흐름 앞에서 당연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주관적 진리의 태도가 진지한 숙고, 즉 아포리아적인 상태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는 것에 우려감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방식의 태도가 사회와 공동체에 지극히 이롭지 못함에 강한 유감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진지한 숙고가 없는 도덕이 되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문명과 문화, 사회에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이러한 변덕스러운 주관성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Part 5.
아포리아와 같은 무지함에서 시작하여, 모든 규정된 규범과 개인의 욕망을 제거하고 0에서 부터 나에게 진리인 것을 찾는 건 어쩌면 대안처럼 보입니다. 합리적 이기주의와 달리 이성이 사용되지만, 합의에 의한 건전한 이기주의와 달리 절대성의 질서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렇듯 우린 변심에 따라 가변적으로 변할 수 있는 기반보단 확고한 절대성 아래 주관적 진리를 획득해야 합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필자는 공동체를 유지시킬 수 있는 건전한 도덕 안에서 주관적인 진리를 사투하며 사고, 토론하여 주체적으로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필자는 인류의 도덕이 그 기원을 찾는 황금률을 긍정합니다. 더불어 황금률에 기반을 둔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긍정합니다. 설령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이데올로기를 통한 유토피아가 오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절대적 보편 가치의 존재는 개인에게 주관적 진리를 찾아나가는 데 긍정적인 푯대가 되어줍니다. 나아가 인류가 납득할 수 있게 해주죠. 이것이 진리 탐구에 도움이 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문명과 사회를 유지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긍정성은 필자가 인류를 문명과 공동체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체적 진리 탐구는 육체의 본능을 따르지도 않고 절대적인 도덕성에 노예가 되지도 않습니다. 나를 긍정할 수 있는, 날 죽게도 하고 살게도 하는 보편의 가치를 주관의 틀로 획득하여 개인을 긍정하게 합니다. 소크라테스와 같이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지만 개인의 사명엔 목숨과 삶을 겁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 또한 분명히 존재합니다.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묻습니다.
“윤리적인 것에 목적론적 중지가 있을 수 있을까?”
이는 개인의 주관적 진리가 공동체 보편의 가치에서부터 출발했어도 충돌한다면 어떻게 될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헤겔은 윤리, 법, 전통적 관습, 종교적 관습 등 공공 사회 질서의 상호 연결된 요소를 문화로 보았고 윤리적 의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자기의 이기적인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행동입니다. 즉 자신이 보편적 가치 아래 획득한 주관적 진리를 행함에 있어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이 문제에 자신만의 예시를 가져옵니다. 성경 속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외아들로 민족을 이끌 위대한 족장이 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모리야 산에서 그를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합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는 감정적인 배반만 다양한 윤리적 문제를 야기한다고 키르케고르는 말합니다.
보편 윤리에 따르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살해 그 자체는 잘못이며 불법입니다. 또 집단의 중요한 차기 리더를 죽이라는 명령은 공동체의 보편 윤리 또한 무시하는 행위이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야훼의 계시를 받는데 그 계시는 그가 민족의 윤리를 지배하는 일반적 규정, 관행, 전통을 이 한 경우에는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윤리의 중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아브라함은 윤리를 중지하고 더 높은 어떤 것에 근거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윤리는 더 높은 텔로스나 목적을 위해 중지되기 때문에 이를 목적론적 중지라고 합니다.
헤겔의 주장에 따라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며 이 보편적인 명령보다 높은 것은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내면의 주관적 진리를 따르고 싶기에 아브라함과 키르케고르의 직관은 두 가지로 분열됩니다.
이러한 분열에 대해 키르케고르는 가명의 저자에 기대어 윤리적 중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견해를 옹호하고자 합니다. 대신 키르케고르는 이 일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거나 납득시키고 열거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는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아브람의 침묵’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이 이 행동의 동기에 대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다고 결론짓습니다. 그가 단지 야훼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한 것이기에 정당했음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도 없고 그 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신앙의 문제로 귀결하기에 이런 종류의 논쟁은 시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지극히 사적인 그 어떤 것입니다.
믿음은 한 개인에 관한 것이지만 언어는 보편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믿음을 말로 표현하려고 시도한다면 필연적으로 보편적인 것으로 설명하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설명은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왜곡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자신이 느낀 공포의 전율과 절망, 그리고 자기 긍정을 전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단순히 행동으로 그 명령을 따르며 그것에 대해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자신의 부족에 체포되어 사형이 언도된다고 하여도 소크라테스가 그랬듯 기꺼이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에게는 보편적인 법과 의무를 무시함으로써 초래될 수 있는 결과보다 개인적이고 전달할 수 없는 자신을 긍정하는 믿음이 중요했습니다.
어떤 측면에선 논리실증주의자들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전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침묵하라”라는 격언으로 유명한 비트겐슈타인은 종교, 신념, 감정 등등 보편적 언어들로 표현되었을 때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해 침묵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만 가닿았던 논리실증주의자들과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비언어적인 것들을 긍정하며 성찰하고 표현하며 살아내라고 했었죠. 그것들의 가치를 격하시키는 것이 아닌 그것들이 삶을 구성하는 것에 긍정했었습니다.
이러한 키르케고르의 성찰은 이란 저서를 통해 제시되는데 사실 정치 철학이나 윤리에 대한 담론이기에 보다는 살아냄에 대함과 종교적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이 책의 유명한 구절인 “믿음이란 말하자면 단독자가 보편자보다 높다는 이러한 역설이다”는 아브라함의 경우와 같은 개별자가 보편적인 것, 즉 관습과 보편적인 윤리보다 우선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 다르게 말하면 보편적 윤리를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개별성에 근거한 모든 행동을 악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연달아서 떠오른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키르케고르는 종교적 신념에 의해 인신 공양을 하거나 정치적 이유로 테러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긍정할까요. 이는 키르케고르가 아브라함을 바라본 시선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신앙의 모순적이고 불합리한 성격을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믿음은 전적으로 내면에 있는 것이기에 아브라함이 침묵한다는 점을 키르케고르를 탐구합니다. 창세기 22장 1절~14절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괴로움을 시편의 다윗처럼 토해내길 주저하고 저자 또한 아브라함의 변명을 서술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시점으로 읽히는 문자는 철저히 배제됐고 오직 사건에 대한 서술뿐입니다. 그 사건에 대한 서술도 사실상 계시와 실행만 있을 뿐 아브람과 이삭이 제사의 장소로 떠나는 과정도 생략됐습니다. 아브라함은 희생 제물인 아들 이삭에게조차 침묵했는데, 사람들은 이 단락에서 저항하지 않는 이삭의 성숙함을 논하기 바쁘지만 키르케고르가 주목한 것은 문자로써 서술되지 않은 아브라함의 공포와 전율입니다.
이는 테러리스트들이 공리적이고 이념적인 이유로 자신들의 행동을 변론하는 것과 달리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는 데 사용할 수 없습니다, 테러리스트나 여타의 사람들과 달리 변명과 정당화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행동엔 공리주의를 위한 고려가 없으며 그 점에서 현대 테러스트와 달리합니다. 이는 단순히 야웨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한 것으로 따라서 어떤 신앙적 측면의 정당화나 방어도 찾을 수 없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종교적 믿음을 변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론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역설이라 말하며 ‘불합리한 덕목’으로 아브라함이 행동한다고 말합니다. 믿음을 역설로 이해하는 것은 “부정적인 개념” 즉 구체적이고 긍정적인 내용을 갖지 않고 오히려 상황을 열어두는 개념을 불러왔습니다. 역설로서 믿음의 이해될 때 있은 해결보다는 탐구와 성찰의 여지를 남겨둡니다. 이는 다분하게도 소크라테스적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고 주장하기에 어떤 긍정적인 교리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침묵하며 받아들였습니다.
Part 6.
물론 이러한 ‘목적론적 중지’는 또 다른 형태의 이기주의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실존을 위해 보편의 도덕을 뛰어넘을 수도 있고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설령 그들이 침묵하고 법치주의의 엄벌을 감내한다고 해도 그럼에도 다른 이들의 눈에는 여전한 폭력으로 보일 것입니다.
저 또한 여기서 다시 한번 비도덕성을 마주합니다. 결국 키르케고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인류 보편의 이기주의가 반복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책을 읽으면서도, 글을 쓰면서도 커다란 낙담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책들을 읽으며 배웠던 것은, 거기서부터 키르케고르와 소크라테스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 그 자체가 아포리아이기 때문이죠. 부정은 시작입니다.
을 통해 존 스튜어트가 강조하는 아이러니를 깨닫기 전, 필자에게 있어 키르케고르의 철학은 ‘절망’과 ‘극복’이 메인 키워드였습니다. 개인적으로 키르케고르가 뱉어낸 문장 중 가장 제게 마음에 닿았던 것이 있다면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시저처럼 되는 것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야심가가 있다고 해보자. 그는 시저처럼 되지 못할 때 절망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의미가 있다. 그가 자신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시저처럼 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러니까 시저처럼 되지 못해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시저가 아닌 자신에게 절말하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드는 자아가 그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존재가 된 셈이다.” (죽음의 이르는 병. 키르케고르 저, 358쪽)
키르케고르는 절망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어렸을 적 자신이 신을 저주했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이것이 ‘죽음’의 결과로써 도출될 것이란 공포감에 살았습니다. 그의 아들 키르케고르 또한 그러한 절망감과 죄책감 속에 살았는데 이 가문의 흐르는 절망감과 죄책감은 우연하게도 실질적 죽음으로 나타났습니다. 키르케고르와 그의 형 크리스티안 키르케고르를 제외한 나머지 형제자매들이 모두 일찍 죽은 것이죠. 이렇듯 우연한 죽음의 발현은 키르케고르로 하여금 ‘죽음’이라는 형태의 절망에 집착하게 만들었습니다. 나아가 이 절망은 죽어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이 최대의 위험일 때 사람은 생을 원합니다. 그러나 죽음이 희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위험이 증대된 그때 키르케고르는 죽음조차도 희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죠. 그렇기에 평생의 사랑 올센과 파혼을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죽음’이라는 절망에 사로잡힌 키르케고르는 한때 종교를 부정하게도 했고 방탕한 심미적 상태를 살게도 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키르케고르가 획득한 개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
키르케고르는 심미적 즐거움이, 즉 합리적 이기주의의 태도가 삶을 긍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한 듯합니다. 만약 그가 이러한 것들에서 즐거움과 자기 긍정을 얻을 수 있었다면 평생의 사랑이었던 올센과 결혼을 진행했겠죠.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집안에 드리웠던 죽음이란 실체적 절망은 올센과의 삶에서 그가 자기 삶의 긍정을 얻는 것에 방해가 됐습니다. 키르케고르의 생각에 그가 올센과의 결혼을 지속한다면 절망 속에 긍정 받고자 하는 자신의 집착이 되려 올센을 망가트릴 수도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키르케고는 뼈를 깎는 고통으로 파혼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 그 두 번째 단계에 이르죠. 바로 이데올로기적 실존입니다.
앞서 <키르케고르 입문>을 읽은 탓인지 제가 읽어 내려간 키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를 통해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긍정을 얻어내고자 한 것 같습니다. 헤겔의 철학을 바탕으로 했지만 그처럼 긍정의 언어로 변증을 결과를 쌓기보단 키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와 같이 산보자로서 진리를 광야에 외치고자 한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미치광인 같이 여겨지고 소크라테스처럼 불편한 사람으로 여겨질지라도 키르케고르는 당시 덴마크의 교구를 비판하며 이데올로기적인 자기 긍정을 얻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즉 불의와 비정의에 대해 소크라테스의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통해 실존을 획득하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계승한 키르케고르는 지금 필자와 같은 논리적 모습에 봉착했겠죠. 앞서 언급한 ‘목적론적 중지’가 그것일 것입니다. 보편적 진리라는 기원에서 출발한다고 보아도 주관적 진리의 체화와 믿어냄이 중요한 키르케고르에게 있어 자기 모순성에 당착한 것입니다. 여기서 키르케고르는 ‘부조리한 믿음’이란 믿음의 도약을 발견해 냅니다.
Leap of faith : 신앙의 도약은 차마 믿을 수 없는 부조리한 믿음을 믿어냄을 통해서 말하고 변명할 수 없는 진리를 체득해 내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자기 부정성이라고 보는 편이 더 간략한 해설이겠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 모리야 산으로 이삭과 함께 걸어가며 수많은 생각을 해냈을 것입니다. “내가 들은 것이 진정 하나님이 맞나?” “하나님은 분명 이삭을 크게 쓰신다고 하셨는데” “이거 사탄 아니야?” 아마 이 수많은 물음들에 하나님은 침묵하셨을 것이고 아브라함은 끝없는 되물음 속에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가장 쉬운 선택은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인륜적으로나 공동체적 도덕으로나 편한 선택지였겠죠. 그러나 아브라함의 치열한 고뇌와 사투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과 이삭에게 침묵하는 것에 방점이 있었습니다. 지금 것 자신을 긍정해 왔던 대단히도 부조리하고 부도덕한 선택을 하게 됨은 불의하게도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즉 지금 것 자신이 태도로서 체화해 왔던 이데올로기적 실존이 신앙적 실존으로 도약하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실존적 긍정은 왜 필요한 것일까요. 키르케고르의 대표적 절망은 죽음이었습니다. 즉 키르케고르는 세상이 유한성에 갇혀있다는 사실에 절망했습니다. 나는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될 수 없고, 나는 영원히 노동자이자 노예로서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 야훼의 나라는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없으며 나는 죽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며 내 욕망을 늙어 움직일 수 없을 때에도 불타 자신을 괴롭힐 것이란 사실을요. 그렇기에 키르케고르는 살아낼 긍정성을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절대자에게서 오는 유일한 긍정성 빼고는요.
절대자이자 권능자에게서 오는 긍정성은 유한한 키르케고르가 찾고자 하는 긍정성과 차원이 다릅니다. 절대자인 야훼가 키르케고르에게 주는 실존적 긍정은 키르케고르가 그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에 상관없이 항상 키르케고르를 비춥니다. 유한한 세계에 종속되어 있는 키르케고르와 달리 야훼는 절대적 시간성 아래에서 죽음으로 절망하는 키르케고르를 긍정합니다. 실질적 죽음이 그 삶을 가렸던 키르케고르 입장에선 그 절망의 그림자로부터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무한한 긍정성인 절대자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즉 신 앞에 단독자로서 서 있기를 갈구한 것이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긍정성은 그 스스로가 이념적으로 택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목적론적 중지’가 발생합니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을 넘어 지금 이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당신을 나의 삶에 체화하겠다는, 믿어내겠다는 비합리적 선택을 견뎌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변명이 없는 침묵 속에서 말이죠. 유한적 세계와 죽음이란 절망적 상태에서 키르케고르는 신앙의 부조리한 도약을 통해 존재론적 긍정을 받았습니다. 물론 키르케고르에게 있어 존재론적인 긍정은 신앙이었겠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다른 형태가 될 수 있겠죠. 이데올로기나, 혹은 더욱 형이상학적인 관념론일 수 있습니다. 혹은 실천 철학일 수도 있죠. 그러나 결국엔 키르케고르에게 있어 이러한 신앙의 도약 없이는 실존을 경험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부조리함을 견뎌내는 것이 실존의 척도입니다.
Part 7.
핵심은 부정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벗어나 절대자를 통한 무한한 ‘실존적 긍정’을 위해 ‘목적론적 중지’를 선택하고 침묵했습니다. 그러한 단독자 키르케고르를 긍정하는 필자는 목적론적 중지에 대한 그의 침묵을 인정하며 그의 개념에 긍정의 변명을 더 함을 멈추고 부정 그 자체로 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키르케고르의 목적론적 중지에서 제가 발견하는 ‘부정의 개념’에 감격은 멈출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는 키르케고르의 목적론적 중지에 비단 실존적 이기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자기 부정성입니다. 작가 김봉규는 이 자기 부정성에 대해 재밌는 예시를 듭니다. 바로 여성의 출산입니다. 작가 김봉규는 인간이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기심이 이타성에 의해 짓눌릴 때가 있는데 그러한 순간이 바로 여성만이 누릴 수 있는 생명의 잉태라고 설명합니다.
태아는 기생충처럼 여성에게 영양분을 빼앗아 갑니다. 허기짐에 배를 발로 차기도 하고 때론 여성이 겪는 입덧의 원인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여성은 태아의 존재로 일상생활의 큰 어려움을 겪고 이전과 같은 몸매와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절망 또한 그녀와 함께합니다. 그리고 여성은 출산의 과정에서 겪을 고통 또한 두려워하죠. 그러나 그럼에도 여성은 태아를 위합니다. 태아를 존재의 일원칙으로 둡니다. 이는 이기적 존재에서 자기부정을 통한 이타적 존재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를 모성애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필자는 그 자기 부정성에서 사랑을 발견합니다.
논리적 정합론과 대응론을 결합해 논리적 사실을 탐구하는 스피노자의 방식처럼 사랑에 대해 논해봅시다. 사랑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일단 사랑은 ‘사랑하는 것’이란 동사이며 동시에 ‘누군가’라는 대명사를 목적으로 둡니다. 이 ‘누군가’는 대명사라 개별 현상의 접근이 아니기에 ‘사랑하는 것’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누군가는 일단 누군가 자체로 의미 변화 없이 바꿀 수 있습니다. 그다음 ‘누군가 자체’는 ‘누군가 전체’를 뜻합니다. 부분은 자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죠. ‘나’라고 할 때는 일단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일부만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이죠. 그래서 얼밀한 언어로 ‘나는 너의 성격이 좋아’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나는 너의 성격을 사랑해’라고 말할 수는 없죠.
분석의 일차적 결론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 전체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말은 완전히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사랑에 대한 명확한 보편은 없고 개별만 존재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최소한의 규정은 가능합니다. 일단 포괄적으로 보면 ‘그 존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행복이 모르니 행복하게 해주는 것 안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필요조건을 하나만 선택해 보면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겠죠. 그러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최소한 한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어떠한 존재든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며 이는 누군가의 전체를 그대로 받아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 불가능해 보입니다. ’나‘에 에고가 존재하는 한 ’나‘의 타자성은 틀림없이 ’타인‘의 타자성과 충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이란 자기 부정입니다.
여기서 필자는 다시 한번 키르케고르의 부조리 이론을 떠올립니다. 즉 실존적 존재를 위한 부조리한 도약은 불가피한 목적론적 중지를 끌어낼 수밖에 없는데 그것 중 하나의 양태가 자기 부정, 즉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긍정적인 언어가 아닙니다. 나를 죽이는 가시이고 치명적인 독입니다. 혹자는 필자의 이러한 해석이 종교인으로서 필자의 자기방어적 긍정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이러한 전개가 키르케고르의 목적론적 중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실존적 부정을 쟁취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세 가지의 목적론적 중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는 존재가 증명 불가능한 ’야훼‘을 믿는 부조리, 두 번째는 원죄론에 입각한 죄성을 받아들이는 부조리, 마지막으로는 그 죄성을 이겨내기 위해선 타인을 용서해야 한다는 부조리가 그것입니다. 그것들에 대한 부조리를 받아들여 믿음의 도약을 끌어내면 키르케고르가 얻었던 단독자에게서의 무한한 긍정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이는 그 자체로서 예수를 받아들이는 단계와 같습니다. (1) 예수의 실현에 대한 믿음은 부활이란 부조리를 믿어내는 것이며 (2) 예수의 부활은 원죄론의 죄성을 받아들이는 부조리이며 마지막으로 (3) 타자성을 받아내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죽여내는 사랑이란 부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는 결국 ‘예수의 사랑’을 인간이 받아들이는 과정으로도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철학의 단편>은 소크라테스를 등장시키지만 소크라테스로 대표되어지는 것은 헤겔풍의 사변철학이다. 문제는 신앙이며 그 대상은 예수그리스도다. 영원한 신이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배리(背理)이며 역설이다. 이성은 그것에 대해 좌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성이 좌절하는 바로 그곳에서 신앙이 시작된다. 그런 역설적인 진리는 객관적으로 인실할 수 없다. 그것은 이성의 입장에서 보면 불확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성으로 보아서 불확실한 것이라면 그야말로 믿는 수밖에 없다. 신앙이라는 주관적 정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주관적 정열의 대상이 되는 것이 주관적 혹은 주체적 진리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키르케고르는 ‘주체성이 진리다’라는 역설적인 말로써 간결히 표현하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 中 키르케고르 저)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사로써 죽이려고 했던 행위는 거대한 메타포로서 성부가 성자를 죽이는 야훼의 목적론적 중지로 바라볼 수 있겠죠. 마치 “아버지 어디 계십니까”라고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던졌던 물음에 야훼가 차마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요. 야훼가 견뎌냈던 아들의 죽음, 즉 그 부조리는 인간을 긍정할 수 있는 그 자신의 실존으로 연결됩니다. 인간은 그 부조리를 믿어냄으로 신의 부조리한 사랑을 실천하고 예수를 추구할 수 있게 됐죠. 이에 야훼는 이기적인 세상에, 절망한 이들에게, 키르케고르와 필자에게 이렇게 명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오른 뺨을 맞거든 왼뺨을 내밀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온유하며 오래참고 자기를 부인해라”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기에..”
정리하고자 합니다. 키르케고르는 합리적 이기주의로 표현될 수 있는 상대주의와 낙관주의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해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객관적 진리로부터 스스로 체화하는 주관적 진리에 대해 논했는데,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목적론적 중지에 대해선 실존을 위한 침묵과 결과론적인 순응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목적론적 중지는 자칫하면 실존적 이기주의로 변모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키르케고르는 그 자체로서의 실존을 위해 이 목적론적 중지에 대한 긍정적인 첨삭을 포기합니다.
대신 필자는 이러한 목적론적 중지에서 발견되는 부조리와 부정성에서 기독교적 이타성과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자기 부정성으로 도출되는 사랑이란 개념은 키르케고르가 이야기했던 목적론적 중지에 이기심이 있다는 사실을 뒤덮지는 못하겠지만, 어쩌면 합리적 이기주의로 가득 찬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칸트의 정언 명령을 되살리고 인간이 존재로서 긍정 받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키르케고르가 기독교를 절대적 진리로서 긍정만 한 것은 아닙니다. 키르케고르 또한 니체의 말처럼 노예의 도덕으로 점철된 수구적 기독교에 대항하고 타인의 신앙으로 실존을 얻으려는 사람들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죠. 오히려 키르케고르는 종교를 부정합니다. 공의회의 공언이 자신에게 필요 없다고도 말하고 교회의 가르침에 저항하며 제멋대로 굽니다. 그러나 그런 키르케고르도 가슴 깊이 간직한 격언이 있다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존질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는 사랑을”
이 글이 결국 기독교 변증으로 끝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저는 신앙이라는 것이 변증되리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변증은 이성이고, 키르케고르가 말했듯 신앙은 부조리이기 때문이죠. 핵심은 객관적 진리로부터 도출되는 체화된 주관적 진리입니다. 그러한 주관적 진리 속에서 보편의 가치에 대항 되는 부조리에 ‘목적론적 중지’를 선택하고 말할 수 없는 가치에 대해 침묵함을 선택했을 때, 그것에서 도출되는 끝단의 가치가 자기부정을 넘어 사랑임을, 그 사랑이 이기주의의 역사를 끌어낼 수 있는 것임을 이야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아니 거기로 글을 쓰다 보니 가닿아진 것 같습니다.
결국 자기 부정성은 종교에 미치고 부조리를 침묵으로 받아들이는 정도 자기부정의 ‘믿음의 결단’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이 부족하고 장황하기만 한 글을 읽는 이들에게도 권유하고 싶은 것은 키르케고르가 말했던 “우리를 기꺼이 살게 하는, 반대로 우릴 기꺼이 죽게 만드는” 주관적 진리를 찾고 실존적인 결단을 이루어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문명과 공동체를 유지하고 결국엔 우리 자신을 기꺼이 유한한 굴레 속에서 끝내 실존하고 절망에서 무한히 긍정 받는 것에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죠.
Picture from_ withaview.ai
필명_고갬동 (gogamd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