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격과 틈새의 종말

듣고 배운 것 01_ 영화와 1인 미디어 (장기홍 교수_동아방송예술대)

by 고갬동

“주체로 서 있다는 착각”

대중들은 자신들의 욕구가 그 스스로 그 안에서 발현됐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그 주체된 욕구에 의해 자본주의의 다양한 산업들이 잉태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착각 혹은 세뇌라고 말하는 철학자들이 있다. 바로 아드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이다. 이 두 철학자들은 문화 산업이 대중을 욕망하게 만들었고 문화 산업이 자본주의란 체계의 존속을 위해 대중을 노동자와 소비자로만 존재하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쉽게 생각해보자. 원주민들에게 신발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양의 자본가들은 원주민에게 신발의 필요성이란 니즈를 주입시켰다. 이윽고 원주민들은 신발이 없으면 안될 것 같은 욕망과 신발을 신어 문명화의 길을 걸어야겠다는 선망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원주민들은 서양이 만들어낸 자본의 체계에서 이와같이 허구된 선망 아래 욕망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체계 아래서 그 스스로 신발을 욕망했다는 착각으로 끝없는 소비자와 그 소비를 위한 노동의 굴례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문화 산업은 그 허구된 선망과 욕망을 행복이란 가치로 애써 포장한다. 사람들은 문화 콘텐츠를 통해 행복이란 가치를 주입 받고 그 주입 받은 행복을 소비하기 위해 노동한다. 이것이 아드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말하는 착각이다.


이렇듯 문화 산업은 대중을 선동하고 순응하게 만든다. 여기서 문화 산업이 만들어내는 콘텐츠는 대중이란 집단을 표적으로 두는데, 그렇기에 이 문화 산업의 콘텐츠는 대중을 순응하게 만드는 낮은 수준의 콘텐츠를 제작하는 양상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낮은 수준은 (1) 대중이 깊은 성찰을 하지 못하고 표면적인 즐거움만 누리게 하는 것 (2) 새로움이 없고 기존의 코드, 클리셰를 반복하여 익숙함에 길드려지게 하는 것을 말한다.


“견디지 못할 가벼움”

사유의 공간은 깊은 성찰을 만들고, 깊은 성찰은 사회의 변혁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기존의 체제는 변혁보단 유지를 원한다. ‘보수성’이다. 그렇기에 체제는 대중을 끝없는 소비자로 만드는 것 외에도 성찰을 차단하는 ‘견디지 못할 가벼움’에 익숙해지게 만든다. 견디지 못할 가벼움은 쉼으로 연결된다.

체제는 과거 사유와 경외의 존재였던 문화와 예술을 ‘쉼’을 얻어내는 존재로 바꾸어놓았다. 자본주의는 대중들에게 과밀한 노동을 요구한다. 그리고 여기서 얻어낸 피로를 대중 문화로 풀어내게 한다. 또 그 대중문화를 통해 선망화된 허구에 과밀한 노동의 댓가를 지불하게 만든다. 즉 대중 문화는 선망의 욕구도 만들어내지만, 쉼의 존재로서 대중에게 다가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쉼은 속도와 클리셰로부터 발생한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콘텐츠는 대중들로 하여금 사유할 기회를 주지 못한다. 즉 감정과 정보만 전달한다는 것이다. 대중은 사유할 필요가 없기에 가만히 수용자로서 받아드리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받아드려지면서 대중은 (1) 주체로 사유의 기회를 잃고 (2) 욕망을 사유할 기회를 잃는다. 그렇게 사유할 기회를 잃으니 체계에 순종하고 욕망을 사유할 기회를 잃고 주워진 감정과 정보를 소비하는 것에 자신들의 시간을 받치게 되는 것이다.


똑같은 클리셰는 쉼만을 준다. 우린 흔히 클리셰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고 새로운 감각을 원한다고 착각하지만, 대중은 되려 새로운 시도 – 그러니까 아방가르드함이나 전통적 내러티브의 양식에서 벗어난 문화에 극도로 적대적이다. 대중은 산업이 그들을 가두어둔 내러티브와 양식 안에서 새롭다고 우릴 착각하게 만들 코드들을 선망할뿐이란 것이다.


대중이 가벼운 것을 원하는 것은 노동에 피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쉼은 대중에게 죄책감을 심어준다. 그렇기에 대중 문화는 대중에게 다시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을 마련한다. 문화 산업은 그렇게 부품화된 인간이 끝없이 노동하게끔 만드는 최면술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쉼만을 주면, 대중들은 반발할 것이다. 대중들도 그것의 가벼움을 눈치챌 것이란 말이다. 그렇기에 문화 산업은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콘텐츠들에서 쉬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만든다. 대중들은 그렇게 찾기 쉬운 의미들을 발견하고 그것에 만족한다. 그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의미는 되려 체계가 확립한 사회를 보존함에 있어 유익한 보수적 가치들일뿐이다. 더욱이 쉽게 찾아지는 의미들엔 사유가 없다. 즉 체계는 쉽게 찾아지는 의미와 가치들을 되려 더욱 강하게 주입시켜 대중들을 식민화시킨다.


“착각을 심어주는 체계”

이러한 현상을 아드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재밌는 공식으로 이야기한다. A(정)과 B(반)의 합이 C(새로운 변혁)가 아닌 A(정)을 유지케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A에 노동을 대입하고 B에 쉼을 대입해보자. 노동과 쉼은 체제의 유지를 가져다준다. 즉 이 체계는 변증법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끝없이 우릴 노동자와 소비자의 굴례에 빠져들게 만든다.


굴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행복(산업이 만든)을 살 수 있다는 착각도 있겠지만 이 시스템이 가지는 무작위성에서도 도출된다. 프로듀스 101 같은 프로그램은 보통의 존재가 스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평범한 식당은 매체의 조명 아래 맛집으로 변모하고 인스타에 툭하고 올려진 누군가의 사진과 챌린지 영상은 그녀 혹은 그를 스타로 만든다.


극단적 이성화는 산업과 미래를 체계화 했지만, 그랬기에 대중들은 우연과 무작위성도 되려 열광했다. 나한테도 희망이 있다는 착각,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도 열심히 노력하면 이러한 행운이 찾아올 수 있다는 착각은 대중으로 하여금 시스템을 긍정하게 만듣다. 그렇기에 문화 산업은 경품추첨과 같다. 참여를 안하면 손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체계는 결국 대중을 일하게 만들고 굴복하게 만들기 위해 문화 산업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 산업은 그 자신들의 콘텐츠를 빠른 속도와 클리셰로 구성하여 대중들에게 보수성의 설정된 감정, 정보, 가치를 주입하고 행복에 대한 거짓 욕구를 불러일으켜 말미엔 충실한 소비자로서 위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순응과 순종을 넘어 인간성의 소멸로”

이러한 아드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주장은 폴 비릴리오의 질주학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더욱 풍부해진다. 폴 비릴리오의 질주학은 속도가 시간과 공간의 연결지점으로 작용하며 사회의 다양한 결과들을 잉태시킨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속도가 곧 권력의 도구가 되어, 누가 더 빠르게 움직이고 정보를 얻느냐에 따라 권력이 집중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속도의 관점에서 역사, 사회를 바라보는 폴 비릴리오는 문화 산업이 주도하는 매체의 발전과 진보가 속도를 통해 모든 존재들을 비현실화시켰다고 보았다.


산업 혁명 이후 등장한 철도와 자동차는 거리의 축소와 공간을 재편에 영향을 미쳤다. 거리의 축소가 실질적으로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을 늘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기 시대에 대중매체는 다른 양상의 거리를 축소시켰다. 정보공간의 확장으로 인류는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을 가상의 영역으로까지 늘렸다. 나아가 공간에 방해받지 않는 범인류적인 지구촌화가 이를 통해 탄생하였다. 그러나 비릴리오는 앞선 철도와 자동차와 달리 전기로 인한 거리 축소가 공간 확장이 아닌 소멸이라고 보았다.


홍익대 건축학과의 교수인 유현준 교수는 가난할수록 현실적 공간이 아닌 매체적 공간으로 도피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즉 현실에서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이 적으니 – 값이 드니 문화 산업이 제공하는 매체의 공간으로 피난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이 매체의 공간은 어쩌면 가난한 자들의 대안적 공간처럼 보이지만, 되려 이 디지털한 영토는 해방의 공간이나 집단지성의 공간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전자적 판옵티콘으로 기능할 것이다.


일례로 카톡은 우리의 일상에 이미 깊숙이 침투해있다. 영토-거리와 상관없이 타인과 관계하게 해주며 그것이 끝없이 체계가 우릴 감시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카톡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이 카톡이 나를 공동체에 소속하게 만든다. 다른 말로는 나의 존재가 소멸되고 계속해서 공동체 안에서의 나로써만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빠른 속도의 기술 발전은 비현실적인 가상의 공간에 인류가 발디딜 수 있게 만들었지만, 그 가상의 세계 또한 속도의 권력을 쥔 체계의 소유이기에 그곳에서조차 대중은 순종되고 체계화된다. 내가 나로써 서있는 영토는 점차 디지털 공간에 의해 침해 받아 수많은 광고와 콘텐츠로 소비자로 가다듬어진다. 그리고 카톡이란 거리의 가속화로 끝없이 노동자로서 간섭받게 만드는 것이다.


속도의 권력을 가진 사람은 공간의 권력을 만들어낸다. 속도의 권력을 가진 체계는 공간의 권력으로서 대중을 디지털 세계로 몰아내며 기존 공간에서 탈영토화시킨다. 디지털 공간으로 내몰린 대중은 끝없이 소비자로 길들여지고 노동자로 감시받으며 존재의 비현실화에 가까워진다.


“디지털 산보자의 한계”

시각 기술과 통신 기술의 결합은 새로운 지각적 체험을 이끌어냈고 이는 새로운 콘텐츠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마치 처음 기차를 탄 사람들과 도시를 산보자처럼 걸어다니던 사람들이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를 만들어냈듯이 디지털 산보자들은 속도에 의한 콘텐츠, 즉 숏폼 콘텐츠를 만들어냄에 이르른 것이다.


속도가 권력으로 자리잡은 지금, 숏폼 콘텐츠들은 빠른 시간 안에 감정과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즉 문화 산업이 주최하는 콘텐츠들의 목적은 원인과 결과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비릴리오는 속도가 절대적이 될 때 사람들이 느끼는 감각과 사고가 마비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디지털 영토는 공간을 점유하지 않기에 수많은 콘텐츠들을 어디서든 점유하고 소비할 수 있게 만들었다. 콘텐츠가 획일화되어 한 공간에 모였기에 사람들은 빠르게 그것들을 소비할 수 있게 되었고 점차 그것들에 익숙해지며 더 자극적인 콘텐츠들을 추구하게 되는 악순환이 발생하게 되었다. 새롭고 더 빠르며 자극적인 콘텐츠에 점차 익숙해지며 이전의 자극이 무감각해지고 더 큰 자극을 위해 더 빠르고 짧은 콘텐츠를 추구하는 악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비릴리오는 이러한 흐름이 인간의 감각과 인식 능력을 마비시켜, 더 이상 어떤 경험도 깊이 있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로 이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말은 앞서 아드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이야기했듯이 문화 산업이 대중으로 하여금 주체로서 판단하고 사고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과 연결된다. 속도과 공간을 지배하고 권력을 낳는 만큼 빠른 정보 전달이 권력의 우위를 가져가기에 사람들은 주체로서의 판단할 수 있는 여유의 시간보단 정보 획득만 관심을 가진다는 주장이다. 더불어 이미 마비된 감각과 인식 능력은 대중으로 하여금 자극적인 감정만 찾게 만든다. 이는 대중으로 하여금 주체로서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행위이며 더 이상 어떤 경험도 깊이 있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속도의 가속화가 사고 과정의 축소로 이우지면 핵심만 전달되기에 맥락이 생략되기 십상이고 이를 통해 정보와 사건이 깊이 이해되고 반추되는 기간이 줄어 오해와 편견이 증가하는 현상 또한 이러날 것이다. 그렇기에 점차 타인에게 자신의 주체를 의탁하는 경향성이 대중들 사이에서 짙어질 것이고 쉽고 선동될 가능성이있다. 이렇듯 앞서 아드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이야기했듯이 대중들은 주체보단 소비자이자 노동자로서 충실이 체제 유지에 헌신하는 객체로써 존재하게 될 것이다.

Picture from_ withaview.ai

필명_고갬동 (gogamd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