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치열하게 기적을 추구해야 하는가’

영화 이야기 05_ 히로카즈의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 몰라 기적>을 보고

by 고갬동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을 유신론적 실존주의적 시점으로 읽으며.


허지웅 칼럼리스트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을 평론함에 있어 “기적이란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말로 운을 뗐다. 그러면서 이 영화는 “가족이 멀리 떨어져 해체되고 서로의 삶에 개입되지 않더라도 그들이 서로를 염려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가족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적’의 형식을 빌어 역설하는 영화”라고 소개했다. 상당부분 동의하지만 필자는 이 영화에서 ‘기적에 대한 믿음’이 가지는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 기적에 대한 믿음이 순례의 여정으로 이끌었으며 그 믿음이 여정 이후의 삶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영화가 다루는 ‘기적’의 방식이 키르케고르가 기적을 설명하는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고 보는데 이를 바탕해 영화를 유신론적 실존주의적 시각으로 읽어내며 기적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영화명은 <기적>으로 칭함)


‘기적을 상실한 사람들’ 남다은 평론가는 화산이 분화하는 장소가 영화의 배경이라는 점을 근거로 <기적>이 재해로 비롯된 열도의 트라우마, 즉 상실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에 동의하며 영화 속 캐릭터들이 세대에 걸쳐 모두가 상실을 가졌음을 재확인한다. 코이치와 류노스케 그리고 그들의 부모는 가족의 해체라는 상실을 경험했다. 그들의 할아버지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자신의 본질을 상실하고 순례의 길에서 만났던 노부부는 딸의 상실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실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자인 야스퍼스가 이야기한 한계상황(죽음, 생존경쟁, 죄, 고통)으로도 해석된다. 그러한 상실 중에서도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상실은 영화를 통해 확연히 대비된다. 먼저 부모 세대는 자신들의 상실을 이유로 부모로서 역할을 유기한다. 가령 이혼이란 상실 아래 형제의 아빠는 ‘아버지’이길 거부하며 쓸모 없는 인간의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 (물론 아버지가 역할을 상실한 그 가장에서 류노스케는 행복하게 지내는 듯 하다. 그러나 이 또한 일시적인 상황이며 본질의 유통기안처럼 부모 역할의 상실이 찾아낼 류노스케의 절망은 언제든 발현 가능하다) 형제의 엄마는 상황을 비관하며 6개월간 마땅한 직업 없이 때론 술을 마시며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유기한다. 뿐만 아니라 배우로서 실패한 후 술집 마담이된 메구미의 엄마는 딸과 그 꿈을 폄하하고 유의 아버지는 끝없이 파칭코에 다니기만 한다. 남다은 평론가는 이들이 ‘지극히 이기적이거나 무심하고 무력하며 사회적 자의식 따위는 없어 자식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삶의 가치를 물려줄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잃어버린 세대라고도 불리는 <기적>의 부모 세대가 대해 버블 경제라는 경제적 재난과 더불어 고베 대지진, 동일본 대지진 등 사회적 상실의 경험을 겪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가고시마의 화산재에 익숙해진 사람처럼 사회적 트라우마로서 상실을 경험한 이들은 상실이란 상태에 함몰되어 익숙해졌지만 그렇기에 변화를 꿈꾸지 않는다.

반면 오사카 출신인 코이치는 공기 중의 화산재에 불편함을 내비치며 또 다시 일어날 ‘재해’ ‘죽음’ 그것으로 연결되는 상실의 재현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다. 그리고 그 스스로가 가지는 상실을 끝없이 해결하려 노력하고 욕망한다. 이는 한계 상황 속에서 되려 실존을 자각하고 포괄자를 추구하라는 야스퍼스의 유실론적 실존주의 철학과 맞물린다. 영화 속 코이치 화산재로 표현되는 재해와 죽음의 상징이 한계상황으로 다가왔을 때 이에 절망하지 않고 한계상황이 이끌어내는 본질의 상실을 자신의 실존을 자각하는데 바탕하고 실존을 추구하는데 활용한 것이다. 자녀 세대들은 부모들와 달리 각자가 가진 상실을 해결한다. 메구미는 아역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달리기를 잘하고 싶은 렌토는 달리기 연습을 하고 이치로와 같은 야구선수가 되고 싶은 오타 신은 야구 연습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성취되지 않는 상실의 한계상황 속에서 아이들은 ‘기적’을 알게되고 저마다의 상실의 만족이란 목적을 위해 기적을 향한 순례를 행동하게 된다.


‘부조리함에서 도출되는 자기긍정’ 그러나 이들이 순례하는 기적의 정체는 너무나도 농도 얕은 농담일뿐이다. 그들이 믿는 기적은 신칸센이 서로 달려오다 스쳐 지나가는 첫 순간을 목격함으로 성취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후에 아이들이 기적을 마주하는 순간 특별한 연출적 환상이나 미장센적 의미를 더하며 기적을 성취시켜주지 않는다. 서사적으로도 이전과 다름 없이 똑같은 삶의 반복 뿐이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아이들은 목표의 좌절, 즉 또다른 상실과 분노를 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어린 순례단은 그렇지 않는다. 필자는 이부분에서 키르케고르가 성찰하는 기적에 대한 시각이 발현된다고 생각한다. 부조리한 기적임에도 기적을 믿는 순례는 실존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세계를 무한한 세계와 유한한 세계로 나눈다. 무한한 세계는 영원하며 가능성의 세계이며 반면에 유한한 세계는 시간에 한정되며 필연성의 세계이다. 인간의 영혼은 이러한 무한성의 세계, 즉 영원하며 가능성을 믿지만, 마치 사랑이 영원하며 페미니즘과 사회주의가 만들어 낼 이데아적 세상을 꿈꾸지만, 사실 우리의 육체는 시간의 필연성에 갇혀 변질과 욕심, 죽음이란 한계를 맞닥뜨린다고 이야기한다. 본질(직업, 꿈, 가치관 등)을 추구하지만 이는 실존(주체되는 나의 현실)을 앞서지 못하고 결국 무너진다. 국가적 재난을 경험한 <기적>의 부모 세대는 이러한 본질의 상실을 누구보다 절실히 경험했기에 실존 앞에서 방황하게 된 것이다. 규정하는 본질은 매번 상실되기에 우린 자유를 선고 받지만 그 자유는 자기 파괴의 욕구도 포함한다. 그렇기에 절망하는 인간에겐 자기긍정을 위한 기적이 필요하다. 마치 상실을 기차의 기적으로 해결하려던 아이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기적은 그 자체로서 부조리하다. 왜냐면 기적은 주관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객관적 진리와 주관적 진리가 그것이다. 객관적 진리는 ‘5+2=7’과 같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증명이 가능한 진리다. 반면 주관적 진리는 내면으로부터 온다. ‘신은, 영원한 사랑, 도덕은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은 내적 믿음이며 과학적 방법론의 해석도 불가능하다. 이는 부조리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것을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그것을 믿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주관적 진리가 참이라 본다. 실존자가 자각함의 주체로 받아들이는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본 것이다. 그렇기에 기적은 제자리에서 하는 텀블링과 같다. 사실 제자리에서 텀블링을 하는 행위는 제 삼자의 입장에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행위다. 그러나 제자리를 한 바퀴 돈 사람의 입장에선 그렇지 않다. 그 사람에겐 이전과는 같을 수 없는 전율이 있다. 그것이 기적이다. 그러나 이 기적은 단지 이루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라는 태도로는 실현되지 않는다. 키르케고르가 자신의 실존을 여타의 본질에서 찾지 않고 치열하게 권능자를 추구하며 얻어내려고 했던 것은 권능자가 그 자체로서 절대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실존이 흔들림 없이 긍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존재를 치열하게 믿었기 때문이다. 부조리함에도, 그 결과가 부조리함에도 믿어내는 그 자세를 바탕해서만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기적은 자신의 주관적 진리 채득과 함께 실존의 긍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아이들은 절망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기적의 순례길을 떠났다. ‘가족이 함께하게 해주세요’ ‘아빠가 하는 일이 잘되게 해주세요’ ‘그림을 잘 그리게 해주세요’ ‘배우가 되게 해주세요’ ‘빨리 달리게 해주세요’ ‘마블이 살아나게 해주세요’ ‘아빠가 파칭고 가지 않게 해주세요’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확연하게도 변했다. 영화는 기적의 결과에 대해 네 가지 분류로 보여준다. (1) 기적이 일어나지 않음 (2) 기적을 바탕하여 행동함 (3) 기적이 일어남 (4) 기적을 믿음으로 스스로 변화함이 그것이다. 그중 우리는 (1) 기적이 일어나지 않음과 (2) 기적을 바탕하여 행동함 (4) 기적을 믿음으로 스스로 변화함을 살펴보려고 한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신이다. 그는 강아지 마블의 되살남을 빌었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장 직접적인 부조리다. 그러나 신은 언덕에서 내려와 무덤가를 지나며 마블을 담담히 집 앞에 묻어주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부분에서 영화는 줄곳 아이들 곁에 카메라를 두던 방식을 벗어나 무덤을 걸치고 후경으로 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필자는 감독이 그간 구성해오면 카메라 연출적인 연속성을 포기하며 임펙트를 남기고자 했던 것이 죽음이란 키워드와 부조리한 기적을 마주한 신의 실존이라 본다. 분명하게도 카메라는 분노하는 아이의 모습이나 실망하는 아이의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실망도 분노도 하지 않았다. 죽음을 전경에 둔 이 아이는 마블과 자신을 연결지었던 본질을 보내주기로 다짐한다. 신에게 종속되었던 마블, 신의 주인으로서 주어졌던 본질을 벗어나게 된 것이다. 죽음 앞에서 자기존재를 자각하게 된다는 유실론적 실존주의자 야스퍼스의 말처럼 기적을 순수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추구한 이에게 남는 것은 성장을 통한 자기 긍정이다. 그렇기에 분노 혹은 실망과 상실의 감정이 도사리는 무덤의 전경 속에서 후경의 신은 담담히 실존의 성장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적을 바탕해서 행동하는 것은 배우가 되게 해달라고 했던 메구미와 그림을 잘 그리고 싶던 하야이 칸나다. 둘은 기차가 스쳐 지나가고 곧 바로 그 변화를 채득하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메구미는 순례를 바탕해서 자신을 집에 가서 기존에 자신의 꿈을 막았던 어머니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칸나는 늘지 않은 그림 속에서도 끝없이 노력함을 암시한다. 이는 감독이 기차가 지나가는 순간 몽타주 시퀀스로 일상의 순간들을 보여준 것과 연관성을 가진다. 기적의 찰라인 믿는 기차가 지나가는 순간 감독이 일상의 순간들을 몽타주로 보여준 것은 그 기적이 현실에 바탕되고 기원되며 놓여져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조리한 결과로 기적은 실패한 듯 보이지만 그 결과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메구미와 칸나는 끝까지 기적의 성취를 믿으며 추구했던 두 캐릭터는 현실을 살아간다. 이들은 순례의 과정을 진지하게 수행하고 기적을 굳게 맞으며 채득한 주관적 진리로 현실 속에서 실존하며 살아간다.


마지막으로 코이치다. 코이치는 본래 “가고시마 화산이 폭팔하여 가족들이 모여살게 됨”을 꿈꾸었다. 그러나 영화는 여러번 주변인들의 입을 통해 그 꿈의 이기심과 화산 폭팔로 다시 생길 상실에 대해 코이치에게 이야기한다. 이에 고뇌하는 코이치에게 동생과 가졌던 한밤중의 대화는 허지웅 칼럼리스트의 말했듯 ‘가족이 멀리 떨어져 해체되고 서로의 삶에 개입되지 않더라도 그들이 서로를 염려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가족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반대편의 기차가 서로를 향해 엇갈릴 때 코이치는 침묵함으로 기존에 자신이 염원했던 기적을 거부한다. 대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염려한다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기적을 꿈꾼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또 다른 상실을 외치기 보단 서로의 삶과 세계를 지키는 방향을 선택한다. 새로운 주관적 진리를 선택한 것이다. 그렇기에 코이치의 기적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렇듯 절망에 빠진 아이들은 저마다 스스로 경험하고 선택하여 주관적 진리를 발견했다. 그들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음에 어떤 불평도 하지 않는다. 대신 이를 체화하고 바탕하여 현실을 살아간다. 이러한 결론은 사실 순례의 초입부 감독의 연출을 통하여 보여준다. 바로 코스모스 밭이 나오는 장면이다. 코스모스 꽃봉우리에 있는 씨를 찾으며 아이들은 과거 그 공터에 살던 사람들에 대한 과거를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내 카메라는 떠나간 아이들의 목소리만 빈 화면에 담아낸다. 폐허가 된 공터, 그 상실의 과거로 점칠된 장소에서 세계 혹은 우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코스모스 씨앗을 찾는 아이들은 기적을 순례하기 위해 떠난다. 그들이 가져간 또다른 세계, 우주의 씨앗들은 기적에 설래는 아이들이 꽃 피울 또다른 현실일 것이다. 분명하게도 영화가 급격한 기적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처럼 코스모스가 피워낼 세계와 우주는 즉각적인 시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꽃 피울 기적은 믿음만 있으면 그 오랜 시간을 견뎌 분명히 꽃 피울 것이다. 이 장면이 비어있는 공간 속에 아이들의 대화만 존재하며 끝나는 이유는 아마 영화는 분명하게도 그 세계의 꽃 피움을 보여주지 못하지만 그 너머에서 아이들은 끝까지 기적을 추구하고 맛보게 될 것이란 점을 이를 통해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게 그들은 절망에서 빠져나왔고 새로운 삶에 대한 동기를 찾아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이들이 기적을 추구하고 믿었기 때문이다. 훗날 아이들이 또다른 절망과 상실에 빠져들어도 그들은 어제와 같이 또 다른 기적의 순례를 떠날 것이고 그 기적이 기적처럼 성취되든 부조리하게 성취되지 않든 그 안에서 또 다른 주관적 진리 속에서 실존을 긍정할 것이다.


‘이미 실존자인 이들에 대하여’ 짚고 넘어가야 될 부분이 있다면 류노스케와 형제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류노스케는 기적이 이루어졌고 형제의 아버지는 절망한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형제의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유기했지만 그 자신을 이혼의 상실에 유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세상이, 전통이 부여한 ‘부모’라는 본질에서 절망은 겪었지만 이혼이란 제도로 이를 탈피하며 그 자신의 감정과 현실에 온전히 집중했다. 자신의 현실에 집중하는 이러한 시각은 세상이 만든 본질에 의해 자신을 다루는 것이 아닌 그 자신과 온전히 관계 맺는 시각, 즉 실존적 주체로서의 현실에 시선을 두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도출되는 ‘이혼’은 절망과 좌절이 담보한다. 이는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기도 하며 야스퍼스의 언어로는 한계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절망과 좌절은 실존의 결단을 촉구하게 한다. 그 실존의 결단이 ‘인디밴드의 보컬’로서 그 자신의 갈망과 실존을 찾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형제의 아버지는 실존주의적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그런 형제의 아버지는 류노스케를 하나의 실존적 인격으로 보았다. 그렇기에 강압적 교육관이나 규율보다는 자유로움 속에서 그를 키웠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반증하는 장면은 류노스케가 여행을 위하여 형제의 아버지에게 지원금 반을 내어달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류노스케가 엄하게 앉아있는 반면 형제의 아버지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무릎을 꿇고 경청하고 있다. 이러한 존중과 인정은 타인을 본질의 대상으로 가두지 않고 실존의 대상으로 존중하였을 때 나올 수 있는 모습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에서 감독은 다다미 쇼트와 롱테이크를 가져감과 동시 두 인물의 시선 높이를 일치시키면서 실존적 대상인 두 인물의 위치를 동등하게 유지시킨다.

이러한 실존적 존중을 받아온 류노스케는 ‘기적’의 순간에서 타인의 소원, 즉 코이치가 요구한 가고시마 화산의 폭발보다는 실제로 자신의 현실에 있는 문제를 감각한다. 이는 가족이란 본질, 형제라는 세상의 본질에 치우치는 것이 아닌 그 자신의 감정과 현실에 온전히 집중하는 형태다. 자신과 온전히 관계 맺는 시각, 즉 실존적 주체로서의 기적을 소망함으로써 그는 그 자신이 마주한 그 만의 절망 ‘아버지의 실패’를 어루만진다. “아빠가 하는 일이 잘 되게 해주세요” 그리고 영화가 그 소망을 현실로 보여주었을 때 우리는 실존주의자의 긍정이 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정리하고자 한다. <기적>의 부모세대는 절망에 빠져있다. 사회가 자신들에게 부여한 역할을 유기하고 그저 그 절망에 익숙해지는 것으로 어떻게든 아픔을 회피하려고할 뿐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니다. 그들은 주체적으로 변화를 찾으려 했고 그 기적은 그들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인간은 절망을 떨쳐낼 수 없다. 절망을 견딜 뿐이다. 그리고 그 절망의 견디는 방법은 주관적 진리를 채득함으로서 발현된다고 키르케고르는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 그 주관적 진리가 신이라는 절대자로부터 오는 무한한 존재 긍정이었다면 아이들에게 있어선 일어날지도 모르는 기적을 주관적 진리로 받아드리며 순례를 바탕하여 그 삶의 태도를 일구어나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바탕하면 <기적>은 허지웅 칼럼리스트가 말했듯 ‘기적의 형식을 빌린 영화’가 아니다. 기적 그 자체를 치열하게 그리고 순수하게 추구하며 얻어낸 성취에 대한 영화이다. 그러면서 류노스케와 코이치 그리고 아이들이 상실을 체우기 위해 떠난 순례의 여정에서 우리가 왜 부조리에 부딪히며 끝내 주관적 진리를 획득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으로서 이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키르케고르의 유신론적 실존주의라는 철학의 사유로 읽었을 때 진면목을 드러내는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형 인디 음악이 뭐야?”라는 류노스케의 질문에 코이치가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음악”라는 형제의 대화는 인디 음악을 하는 아버지가 실존주의적 성향을 띈다는 점에서 감독이 우리에게 형제의 아버지처럼 끝없이 더욱더 열심히 실존을 추구하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필명_고갬동 (gogamd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