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04_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를 보고 느낀 것들
영화 <미나리>가 가진 강점을 혹자가 물어볼 때, 나는 많은 것을 설명하기 보다 '폴'이란 캐릭터를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하곤 한다.
지금도 자주 읽는 책 <영화 언어>는 살아있는 캐릭터가 좋은 시나리오로 가는 척도라고 한다. 살았는 캐릭터란, 일명 향단형 - 방자형 캐릭터처럼 주인공을 위해 혹은 서사적 전개를 위해 존재하는 캐릭터와 달리 적은 불량일지라도 극안에서 독립된 개체로서 살아있는 캐릭터를 말한다.
폴이 그렇다. 폴은 제이콥의 가족을 위해 그러니까 그들의 미국 정착기를 극적으로 꾸미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극적으로 불편함을 주는 캐릭터다. 그가 서울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행색에 일명 예천불지로 불리는 예수쟁이로 비추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와 같은 이미지를 불편히 여기고자 하는 이들에겐 그의 작은 비중이 불행 중 다행으로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한술 더 떠서 이 영화는 제이콥의 가족과 조여정 배우님이 연기하신 순자의 융화 과정만으로도 꽉 찬 느낌이 들기에 이 폴이라는 캐릭터의 존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인은 그런 미움받는 폴에게서 정감을 맡는다.
폴은 한국 전쟁 참전 용사라는 전사가 있다. 그 전사는 폴과 제이콥의 가족에 공통분모로써 그들을 묶어준다. 그렇기에 제이콥 밑에서 일하는 폴의 모습이 서사 전개에 있어서 '황인 밑에서 일하는 백인'이라는 시대적 아이러니를 선사함과 동시에 도움의 주체가 바뀐 상황을 일구어 역설감을 주기도 한다. 더불어 그 전사가 폴의 어눌하며 이질적인 성격을 이해하며 그 캐릭터를 음미할 기회를 만들어 준다. (담백한 이 영화의 시점이 그러한 사고의 공간을 제공 하며 시너지를 일으킨다)
"왜 이 사람의 행색은 이럴까, 왜 이 사람의 행동 양식은 이럴까.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 거지?"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한국전쟁에서 경험한 일련의 죽음이 그를 만들었다고.
살아남은 죄책감. 목도한 수많은 죽음들. 그의 손에 묻은 핏자국들에 대한 죄책감까지. 이 경험은 본토의 사람들, 즉 평범한 미국인들과 폴과의 괴리감을 만들 것이고 이러한 정서적 이질성 속에 그는 외톨이로 고립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폐, 부조화, 거리낌. 그것에부터 나오지 않았을까. 불행 중 다행히도 여타의 참전 용사의 레퍼토리와 다르게 그런 폴이 선택한 것은 마약 혹은 분노가 아닌 종교였다. 자신에 과거를 마주할 때마다 그는 자신을 종교적 믿음에 맡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본인은 폴에게 감정이 이입되기 시작했다.
이런 추측이 확신으로 굳어진 것은 십자가를 메고 흙 밭을 걸어가는 신(scene)에서였다. 그를 발견한 동네 아이들은 그런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웃는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골고다의 예수가 떠올랐다. 십자가를 메고 언덕을 오르는 예수 - 조롱당하는 예수.
그런 의미에서 본인은 괴상한 기도문으로 순자를 치유한 폴이 이상하게만 보이지 않았다. 감독이 은유적으로 한인교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장면을 통해 그 성격을 확고히 할 수 있다 생각하는데 힐난과 혼란에 쌓여있는 한인교회가 아닌 예수는, 허름한 창고 푸른 수풀들 사이에 있음으로 간접적인 비판을 한것이 아닐까
감독의 이러한 연출은 캐릭터에 대한 깊이를 더하고 음미의 계기를 폭발시킨다. 그는 왜 폴을 통해서 왜 예수를 떠올리게 할까. 불편함과 불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캐릭터에게 왜 이런 의미를 부여하는가.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는 폴. 그 과거를 용서하기 위해 혹은 용서 받기 위해 스스로 자신만의 십자가를 지는 그. 처음에는 불편하고 꺼려지기만 했던 그의 모습이 달라보이기 시작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가복음 8장 34~38절
순례자의 모습. 스스로 감내하며 속죄의 삶을 살아가는 그의 모습. 보통의 미친 사람으로 치부되던 그에게서 친밀함을 느껴진다.
그 순간 본인은 이 영화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메인 서사속 서브 텍스트. 그러나 종속되지 않는 - 방해하지 않는 그 텍스트. 실제 우리 삶은 서로가 서로에게 조연과 주연의 역할을 품앗이한다. 즉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장치가 아닌 주체로서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객체라는 점이다. 제이콥네 가족의 이야기에 조연으로 나온 폴. 이 둘의 주조연에 위치가 바뀌어도 어색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 영화가 캐릭터를 다룸에 있어 핍진성을 선사하는 부분이 아닌가.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적 담백함과 느긋한 시선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이 핍진성은 강한 강점일 것이다) 그렇기에 본인은 이 영화에 더 몰입되고 끝이난 지금도 잔향을 씹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찬사 끝에 이제 글을 줄여보려고 한다. 사실로서 [미나리]의 작품적 찬사는 이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아니 어쩌면 본인이 아주 작은 부분만 표면 위로 꺼낸 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본인이 이 글을 쓴 이유는 아주 작은 이야기가, 보잘것없는 이의 이야기가 때론 그 작품의 가치를 드높일 수 있다는 점을 되새김질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런 자세로 살아내길 바람이다.
필명_ 고갬동 (Gogamd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