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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 멀리 반짝이는 별 Feb 11. 2020

한국의 영화감독이 미국 영화사를 새로 쓰던 날

봉준호의 아카데미 주요 부문 수상에 관한 단상

아주 드물게, 어느 분야에서 소신 있는 한 사람이 그 분야의 기준점을 제시하는 경우가 있다. 결정적인 순간에 극적으로 연출되는,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목도하는 가운데에 부조리함이 전면에 드러나는 그런 경우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김연아가 소치 올림픽에서 선수생활 내내 겪어야 했던 참담하리만치 심각했던 피겨 스케이팅의 불공정한 구조, 편파 판정의 끝을 완벽한 경기를 통해 만천하에 드러냈을 때 우리 모두는 가슴 아팠다. 김연아는 분명 뛰어난 실력으로 경기를 지배했지만 현장에 있던 심판들은 시스템의 심각한 오류를 방패삼아 공정성을 무시한 채 다른 이에게 메달을 건넸다.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지만 2014년 금메달리스트는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이지, 김연아가 될 수 없었다. 여전히 아쉬움이 큰 결과이지만 김연아는 이로써 피겨가 여태 불공정한 관행 속에서 운영된 종목임을 전 세계에 알렸다. 


올해 봉준호는 김연아와 또 다른 의미에서 위업을 달성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각본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한 것이다. 외국어로 제작된 영화가 작품상을 수상한 최초의 경우라며, 동양인으로는 이안 감독에 이어 두 번째 수상이라고, 언론은 앞다투어 그렇게나 떠들어대며 봉준호의 업적을 칭송하고 있다. 참 대단한 일이다. 필자는 비영어권 영화가 깐느, 베니스, 베를린 같은 국제영화제도 아닌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게 되리라고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놀라웠다.


사실 필자와 같은 할리우드 영화 애호가들은 <기생충>이 아카데미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할 것이라 쉽게 기대했을테지만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아카데미협회가 비영어권 영화에 작품상을 주는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하의 영화평론가 이동진마저도 <기생충>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고 고백했다. 하물며 <1917>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했기 때문에 아카데미 주요부문 수상이 확실시된다고 예상할 만했다.


피겨의 부조리함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아카데미는 편향적인 영화제로 손꼽혀 왔다. 봉준호가 ‘지역(local)’ 영화제라고 폄훼하는 우스갯소릴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아카데미의 지난 91년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 수상작(또는 수상자) 면면은 예외 없이 백인 우월주의에 빠져 있었고 백인 남성 중심적이었으며 유태인들의 안목에만 기대어 근엄한 주제의 작품들에만 표를 던진 탓에 뻔한 영화들의 주요 부문 석권이 늘 불보듯 뻔했다. 분명히 뛰어난 영화는 따로 있는데도 자신들의 테마(theme), 이 나라의 테마를 따르지 않았다며(‘이 나라의 테마’란 표현은 마틴 스콜세지와 스파이크 리가 나눈 1990년대 말 어느 잡지 인터뷰에서 따왔다. 이들은 늘 아카데미에서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었고 그 같은 소외감으로 ‘우리가 이 나라의 테마를 다루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수상하지 못하나 보다)’라고 말했다) 압도적인 영화들은 미뤄둔 채 두 번째, 세 번째쯤에 위치하는 영화들을 작품상, 감독상 수상작으로 선택했다. 그래서 마틴 스콜세지의 <분노의 주먹>은 로버트 레드포드의 <보통사람들>에 밀렸고, 우리들에게 영화의 교과서로 군림하는 오손 웰즈의 명작 <시민 케인>도 존 포드의 <분노의 포도>에 밀렸다. 이 밖에도 수많은 예시들이 있고 그중에는 이번 봉준호의 수상 소감으로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르락내리락했던 거장 마틴 스콜세지가 가장 많이 언급될 수 있다. 이렇게 아카데미 영화제는 그들에게 불편하다 싶은 급진적인 영화들을 모두 수상 대상에서 제외시켜버렸다.


그런 아카데미가 92번째 시상식에서 변방의 동양인 남성 감독 봉준호에게 작품상과 감독상을 안겼다는 사실은 판타지에 가까운 결과다. 이건 절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났다. 아카데미 투표권자의 층위를 다양화시키면서 이 같은 결과가 나왔다는 분석도 있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이 시점에서 투표권자 분포도를 바꾸려고 했을까. 흑인 여성이 회장이어도 백인 중심의 후보 군만 뽑아댄다는 비판을 받던 아카데미였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절대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지키고자 했던 집단이다. 이들이 갑작스럽게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90년도 넘게 똑같은 선택을 반복하던 집단이 이제 와서 갑자기 달라지겠다니. 아마존 프라임이나 넷플릭스와 같은 OTT 중심으로 작금의 영화 관람환경이 재편됐다 하더라도 할리우드는 그 옛날부터 전 세계 극장을 공략하는 영화 공장이었다. 매체만 바뀌었을 뿐, 이들은 언제나 전 세계 영화팬들을 보유했고 달러를 벌어들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OTT를 통해 수많은 전세계 변방의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어 관객들에게 선보인다는 사실이다. 할리우드가 아닌 다른 국적의 영화들을 전 세계 관객들이 손쉽게 관람할 수 있게 되면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게 되었다. 할리우드도 이를 분명히 인식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느 영화제에서나 골칫거리였던 넷플릭스는 또 다른 의미에서 전 세계 관객들에게 다양성의 의미를 전파하게 되었고 할리우드가 이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영화인들끼리 마켓에서 영화를 사고팔며 찾아가지 않으면 보기가 쉽지 않았던 영화제용 변방 영화들이 넷플릭스를 통해 편안하게 중심권으로 안착하는 상황은 영화 관람환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봉준호가 단순히 다양성 환경 때문에 상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다. <기생충>은 정말 잘 만든 영화였다. 봉준호는 워낙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고 개인적으로 한국 감독이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는다면 그 첫번째는 박찬욱이 아니라 봉준호여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독창성, 작품성을 오락성, 장르적 속성에 녹여내어 관객들과 제대로 소통하는 감독으로 봉준호는 세계에서 손꼽힐만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봉준호는 아카데미에서 무시를 당했어야 했을 수도 있다. 이 점이 또 한 번 놀랄만한 지점인데, 정말 뛰어난 감독들도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여전히 작품상이나 감독상을 받아본 적이 없고 IMDB 역대 영화 순위 10위권 내에 늘 포진해 있는 <성난 12명의 사람들>이나 <네트워크> 같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시드니 루멧도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5번이나 지명됐지만 한 번도 상을 받지 못했다. 자신의 뛰어난 작품에서 수상하지 못하고 그보다 못한 영화에서 수상하는 경우들도 많았다. 마틴 스콜세지가 그랬고 배우들 중에는 그 경우의 수가 훨씬 많다. <기생충>은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그 외에도 이 작품을 보며 만족하고 즐거워하며 감동받은 관객들이 많았고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현재 그 어떤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이야기, 새로운 이야기와 캐릭터들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 작품으로 작품상과 감독상을, 시의적절하게 수상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인정받았고 또 제때 인정받은 셈인 것이다.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은 한국영화가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지난 25년사를 그대로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 영화를 재능있게 만들 참신한 인재 양성을 위하여 국가 차원에서 만든 영화교육기관 한국영화아카데미가 배출한 그 인재가 바로 봉준호이다. 그리고 이 작품 배급사인 CJ는 1995년 무렵부터 할리우드 드림웍스와 손잡고 본격적인 영화사업을 가동했다. 그 책임자가 바로 수상소감으로 이번에 논란을 빚은 이미경 부회장이다. CJ는 그동안 한국영화를 미국에 소개하는 가교 역할을 많이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인맥과 노하우가 쌓였을 것이고, 전략적인 오스카 랠리도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자연스러운 영어 번역을 가미한 자막 역시 큰 역할을 했다. 씨네 21에서 전문 기고가로 오랫동안 한국영화와 동고동락을 했던 달시 파켓은 자신이 잘 아는 언어를 이 작품 자막으로 잘 덧대었고, 그 결과 이 영화는 언어를 뛰어넘어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좋은 노하우가 없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좋은 노하우가 있어도 좋은 작품이 없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시행착오를 거쳐 얻어진 값진 정수(essence)였고, 봉준호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의 영화 역사를 완전히 새로 쓸 수 밖에 없는 요인이 되었다.


이제 아카데미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보자. 봉준호는 미국인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동양인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도 받지 못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수상자가 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영화사를 작성했다. 아무리 존경해도 비영어권 영화에는 절대 상을 줄 수 없다는 게 아카데미의 입장이었다. 최초 비영어권 영화로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의 제목이 <기생충>이라니. 여태 <늑대와 춤을>, <용서받지 못한 자>, <브레이브 하트> 등 참 거창한 제목에만 의미를 부여했던 아카데미는 겨우 ‘기생충’이라는 제목을 단 변방 영화에 작품상과 감독상을 주었다. 할리우드 제도권에서 전혀 멀어져 있는 영화, 아시아에서도 참 작은 남한에서 온 이 영화가 꿈의 공장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영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은 몹시도 급진적인 변화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래서 작품상 시상자도 70년대 정치운동가였고 현재도 환경운동가로 활약 중인 진보의 끝판왕 제인 폰다였다. 이 정도면 단순히 올해의 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처음에 김연아의 사례를 들며 한 사람의 뛰어난 재능, 소신 있는 움직임이 한 분야의 부조리함을 드러낸다는 말을 했다. 제인 폰다가 봉준호에게 아카데미 작품상을 안겨주면서 아카데미 영화제의 민낯, 전 세계 박스오피스를 빨아들이면서도 절대 권력으로 백인 우월주의에 빠져 있던 아카데미가 이제는 더 이상 그 옛날의 아카데미일 수 없다고 선언한 셈이 됐다. 정직하게 그 어떤 것도 베끼지 않고 오로지 관객과 영화만 생각하며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던 영화감독 한 사람이, 그것도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로 영화를 만든 감독이 100년이 넘는 영화사를 장악한 할리우드 대표 영화제 아카데미에서 최고상을 받음으로써 이 모든 패러다임은 재편되고 다시 시작됨을 보여주게 됐다. 절대적인 권력으로 전 세계 박스오피스를 지배했던 할리우드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92년 만에 처음으로 비영어권 변방 영화에 수여함으로써 그 권력을 내려놓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흑인 영화가 상을 받는 경우에도 다시 백인 중심이 되어 영화제는 결코 스스로를 바꾸는 법이 없었지만 올해부터는 다르다고 해야 한다. 언어가 달랐고 피부색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할리우드 제도권에 속한 영화가 아니었다. 그런 영화에 작품상과 감독상을 줬다는 것은 이제 아카데미도 달라질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헤게모니가 어느 정도 무너진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도 심한 해석이 아니다. 이미 프랜차이즈물과 코믹스 원작 영화로 연명하는 할리우드에서 뛰어난 예술가들을 끌어오고 꿈의 공장을 지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변방의 영화들을 인정하는 일임을 그들도 아는 것이다.


내년부터 아카데미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올해만큼의 결과를 내놓기 위해 그들은 또 다른 결단을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올해가 한순간의 꿈이었고 한편의 쇼에 불과했다며 대놓고 비웃는 결과를 내놓더라도 앞으로는 분명 다를 것이다. 봉준호라는 한 사람의 영화광이 미국 영화사, 그리고 세계 영화사를 새롭게 썼다. 김연아의 완벽한 경기는 우리를 가슴 아프게 했지만 봉준호의 걸작은 통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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