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툭’
한 피조물이 얇은 막을 찢고 나와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다 자란 어른의 몸을 하고 있습니다만 ‘움직임’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느리고 서투릅니다. 천천히 몸을 움직입니다. 처음에는 사지를 비틀어 봅니다. 손과 발을 꿈틀거린 다음, 팔과 다리를 움직이고, 기어가는 동작을 합니다. 이 동작을 천천히 반복한 후 바닥에서 일어나 앉고, 신체를 다 세운 다음 무거운 발걸음을 한 발자국 떼어 놓습니다. 정적 속에서 섬세하고 힘겨운 동작이 오랜 시간 이어집니다. 아기가 태어나 걷기까지의 과정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이 장면은 경이로워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이 장면의 주인공은 메리 셸리가 1817년에 쓴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입니다. 소설 탄생 200년 후 영국 국립극장이 이 소설을 무대에 올렸고, 첫 장면에서 이 탄생을 다루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영국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소설 속 ‘괴물’을 연기했어요. 영화관에서 비디오로 촬영된 영상을 보았지만 그 첫 장면이 전달하는 감동과 전율이 대단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영국 문학사에서 가장 외롭고, 가장 인상 깊은 등장인물입니다. 소설을 읽기 전에는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다’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확히는 ‘프랑켄슈타인’은 피조물을 만든 박사의 이름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창조를 위해 탐구하고, 마침내 생명을 만든 후 버리고, 그 피조물은 외로움으로 창조자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로 요약됩니다.
<프랑켄슈타인>의 생명 창조 주제는 최초의 공상 과학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답니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이 발전한 21세기에 더 조명을 받고 있죠. 괴물 탄생 200년 동안 많은 비평이 쏟아졌지만 메리 셸리를 기억하게 하는 ‘창조성’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소설의 시작은 생명 창조입니다. 이 행위는 인간이 가지면 안 되는 창조주 신에 대한 오만한 도전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자신이 창조한 생명체를 돌보지 않고 버리는 행위는 무책임입니다. 이 행동들은 죄로 이어집니다. 그 죄는 복수라는 결과를 불러오죠. 창조자의 반대편에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창조된 ‘피조물’이 있습니다. 이 피조물은 외로움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구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창조자와 피조물의 이야기를 전하는 또 다른 인물 월터가 있습니다. 모두 메리 셸리가 창조한 남성들입니다. 여성 작가의 이름으로 출판이 어려웠던 19세기 영국, 과학 지식, 출산한 아이를 잃은 모성의 고통, 당대 유명한 시인 남편, 그리고 유명 문필가 부모님. 이 모든 요소가 메리 셸리 내면에서 어우러져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로 이어진 이야기를 이어가 보려고 합니다.
“착상이 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혼돈에서 만들어진다는 것, 그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소재는 우선 주어져야 한다. 그것은 어둡고 형체가 없는 내용을 제시할 수는 있으나 내용 자체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발견과 발명에 관한 모든 것에서, 하다못해 그것이 상상력에 속하는 부분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콜럼버스와 그의 달걀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발명은 대상의 가능성을 포착하는 능력에 있다. 그리고 대상에 연관된 아이디어를 주무르고 빚어내는 능력에 있다.” 창착에 관한 메리 셸리의 화두였고, 소설이 탄생하기까지 메리가 붙잡고 있던 사유였습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한 여성이 자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며, 자기만의 공간에서 무엇인가를 창조해 내는 여성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녀의 시간과 공간과 사유가 만들어 낸 특별한 창조물이 <프랑켄슈타인>이라는 문학으로 탄생했으니까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름의 모양이 인생과 같음을 알 수 있어요. 구름은 날씨, 온도, 바람에 따라 매 순간 모양이 변해요. 언제 바라보는지 그때에 따라 보이는 모습도 다양하죠. 비가 오는 날에 구름이 보이지 않을 때조차도 특징이 있고, 오전 10시 전후로 화창한 하늘은 정말 선명해서 좋아요.” ‘하늘과 구름’ 그림을 그리는 한 분이 들려준 말입니다. 그녀는 넓은 하늘과 구름 속에 기억, 꿈, 희망, 시간, 현재를 담아 표현하는 화가입니다. 넓은 하늘 공간, 머물지 않고 흐르는 바람, 그리고 자유로운 구름. 하늘과 구름은 생각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고 현실이 되기도 하고 때론 내면을 비춰 주기도 한다고 했어요.
이 분은 저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었습니다. 20대 학생들 사이에 앉은 그녀는 마흔 즈음으로 긴 생머리에 청바지를 입은 조용한 모습이었습니다. 매 학기마다 나이가 많은 학생분들은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어느 날 그분의 이메일 주소가 눈에 띄었습니다. 영어로 ‘천재’와 ‘엄마’를 조합한 주소가 특별해 보였거든요. 그녀에 대해 더 알게 된 건 그녀의 졸업작품 전시회였습니다. 미국 텍사스주 맑은 하늘의 구름을 다양하게 표현한 그녀의 그림은 문외한의 눈에도 아마추어 이상의 멋진 작품이었어요.
그녀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한국을 떠나 11년간 미국 텍사스에 머물렀다고 했어요. 자녀들은 모두 잘 성장해서 미국 최고 학부에 입학했고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11년 간의 긴 공백으로 한국에 아는 사람들이 없었고, ‘뭐라도 하려면 움직이고 시작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미술대학에 들어가기로 결심했고, 그림 그리기를 이어갔다고 했습니다. 낯선 미국 생활 속에서 자녀 교육에 정성을 쏟으면서도 매일 그곳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구름을 보았고, 입학이 어려운 미술 스튜디오에도 당당하게 합격하여 그림을 계속 그렸다고 했어요. 자녀들이 잘 성장해 주었지만, 낯선 시간 속의 고단함을 그림으로 잠시 잊기도 했을 것 같아요. 그녀의 구름 속에는 긴 시간 관찰한 다양한 사유가 담겨 있습니다.
졸업 후 시간이 흘러 오랜만에 다시 연락이 닿았고 새로운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이번에는 우리나라 유명 미술 대학의 대학원 진학 소식을 전했습니다. 올해 초에는 작품이 인정을 받아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대기업 회장실에 걸리는 영광도 얻었다고 했어요. 그녀는 계속해서 ‘구름’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간의 소식을 들으며 연신 ‘멋있다’를 반복하며 듣던 제가 조심스럽게 여쭤봤어요. ‘고교 시절 그림 실기 ‘양’의 성적이었던 재능 없는 저도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 “그럼요. 모든 사람은 아티스트예요. 우선 하늘을 자주 올려 다 보고 구름을 많이 보세요. 기본기를 오래 닦고, 기본에 충실하고, 물감을 사용할 때도 기본을 잘 지키면 누구나 그릴 수 있어요. 누구나 할 수 있어요.”라고 격려했고, 인상 깊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저는 매일 한 번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메리 셸리의 탄생과 혈통은 진부함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1797년 태어나보니 아버지는 윌리엄 고드윈, 어머니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였죠. 당대 화제의 중심에 자주 섰던 두 사람이었죠. 아버지 고드윈도 18세기 영국 사회에서 무정부주의 철학자로 이름이 나 있었지만, 어머니 울스턴크래프트가 쓴 <여성의 권리 옹호>는 현대 여성주의 이론의 기초가 될 정도로 영향력이 오래 이어진 인물입니다. <딸들의 교육에 대한 생각>은 당시에도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부모님 영향이었겠죠. 메리는 어릴 때부터 책을 읽고 글을 쓰는데 관심을 가졌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탄생과 죽음은 메리 셸리 삶에 두려움과 아픔을 준 주제였습니다. 어머니 메리 울스톤크래프트가 자신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산으로 인한 열로 사망했어요. 그리고 메리 셸리도 어린 나이에 세 아이를 낳았지만, 갓난아기를 키우기 어려웠던 환경 때문인지 세 아이를 잃었고, 아픔이 컸습니다. 그녀의 탄생이 어머니 죽음의 원인이었고, 그녀의 출산도 죽음으로 이어졌기에 ‘탄생’이나 ‘출산’이 죄책감이고 고통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계속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어머니가 남긴 여성에 대한 진보적 사상은 메리에게 이어졌습니다.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교육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여성은 태생적으로 남성에 비해 열등한 것이 아니라, 교육의 기회가 없어서 열등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주장했죠. 그리고 여성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지성을 키우고 정신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상상력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이 상상력은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에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을 출간 당시 메리 셸리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당신처럼 아주 어린 여자가 어떻게 그렇게 소름 끼치는 착상을 하고 이야기로 만들어 냈는가?” 였다고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메리의 상상력이었죠. 어려서부터 글쓰기보다 더 즐겨했던 것이 ‘상상하기’였다고 합니다. 그 상상은 속상할 때는 피난처가 되고, 한가할 때는 즐거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상상력이 혼돈 속에서 여러 재료를 끌어 모아 그녀만의 창작물을 낳게 한 겁니다.
메리 셸리의 삶과 창작에 또 다른 영향을 준 사람은 남편이었어요. 두 사람이 부부가 되기까지의 시간도 만만치 않았어요. 메리의 남편은 18세기 영국 낭만주의 3대 시인 중 한 사람인 퍼시 비시 셸리입니다. 바이런, 키이츠와 함께 정말 유명한 시인이죠. 그는 메리의 아버지 고드윈을 존경하며 그 집을 몇 차례 방문했고, 그 과정에서 메리와도 친분을 가지게 되었죠. 귀족 집안 출신인 셸리는 당시 결혼을 한 상태였고, 그 결혼 생활은 사랑 없이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메리가 가진 부모님의 배경이 퍼시 셸리에게 매력적이기도 했지만, 메리가 가진 여러 매력에 많이 끌렸어요. 메리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 집을 나와 셸리와 사랑의 도피 여행을 떠납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많은 말들이 이어졌고, 셸리 집안에서도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며, 생활비를 끊기도 했어요. 지원이 중단되자 두 사람은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야 했어요.
1816년 여름에 비가 많이 내렸는데 이 여름이 메리 셸리 인생에서 중요한 창작의 시작이 됩니다. 열아홉 살이었던 메리는 남편으로부터 바이런을 소개받았어요. 퍼시 셸리, 바이런과 함께 스위스 제네바 근처 빌라 디오다티에 묶었죠. 바이런이 ‘우리 각자가 괴담을 쓰는 겁니다.’라고 제안했어요. 이 제안이 <프랑켄슈타인> 창작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해 여름 날씨는 습하고 흐리고 비가 끊임없이 내렸어요. 비가 내려 여름 시간이 심심하니 우리 무서운 공포 이야기나 합시다 라는 제안을 한 거죠. 당대 유명 시인 답죠. 메리는 공포이야기를 잘 만들고 싶었고, 계속 형체가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려고 노력했어요. 비는 내렸고, 빌라에서의 여름 시간은 메리에게 또 다른 기회도 제공했어요. 셸리와 바이런이 나누는 철학적 대화들, 나아가 당시 회자되던 전기로 죽은 생명을 살리는 갈바니즘, 생명 원리와 본질, 생명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을 만들어 조립하면 생명의 온기가 부여될 수도 있다는 대화를 경청하는 기회가 주어졌거든요. 그 대화를 계기로 메리의 상상력은 날개를 달았고, 자신이 창조한 ‘소름 끼치는 존재’와 그 ‘존재’를 들여 다 보며 경악하는 한 학생에 대한 구체적인 영상을 떠올리게 됩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이렇게 탄생하였습니다. 소설에 보면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피조물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뼈, 혈액순환, 관절, 해부학 등 신체 생리학적 원리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창조에 응용된 과학 지식 외에도 화학, 현미경 술, 자기장, 다윈의 진화론 등도 설명이 나오죠. 계기는 계기였을 뿐 혼돈의 소재를 구체적인 이야기로 만들어 낸 건 메리 셸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생명 창조의 개념은 소설의 원래 제목에도 나와 있습니다. 온전한 제목은 <프랑켄슈타인 : 현대의 프로메테우스>거든요.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명령으로 인간을 창조한 뒤, 제우스 몰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벌로 코카서스 산에 묶여 독수리가 간을 쪼아 먹으면 또 새로 돋고 또 쪼아 먹는 영원한 형벌을 받습니다. 이 프로메테우스의 그림은 한 번쯤 보신 적 있을 거예요. 이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는 소설 속 빅터 프랑켄슈타인입니다. 빅터는 피조물을 창조하고, 피조물에 대해 경악하고, 생명체에 대한 돌봄의 책임을 지니지 않고 버립니다. 그 피조물에서 파생된 비극이 빅터의 삶을 북극까지 내몰고 죽게 합니다.
‘고딕’이란 양식은 메리가 <프랑켄슈타인>을 담은 그릇입니다. ‘고딕’은 중세 성의 건축양식에서 유래했습니다. 드라큘라가 나오는 어둡고 공포스러운 분위기의 성이 고딕 양식 성이고, 그 이야기가 고딕 문학입니다. 중세의 건축물이 주는 폐허 같은 분위기가 공포라는 소설적 상상력을 이끌어 냈다는 의미에서 ‘고딕’이란 이름을 붙인 겁니다. 18세기 말 당시 고딕 소설 양식이 유행했지만, 고딕소설 방식은 여성인 메리가 자신의 재능과 자신의 이야기를 담기에 알맞았습니다. 당시는 여성의 이름으로 소설을 펴내기도 어려웠습니다. 고딕소설은 가부장적인 가치 속에서 펼치기 어려운 여성의 재능을 보여주기 좋은 그릇이었습니다.
고딕 소설은 분위기가 어둡고, 실제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초자연적인 사건을 다루고, 죽음을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독자들이 살고 있는 당대 현실적인 공간을 벗어나 진행되는 이야기여야 하고, 실제 만날 수 없는 인물 이야기인 경우가 많습니다. 당대 실제 살고 있는 사람들과 차이가 있었죠. 실제 만나기 어려운 인물들인 거죠.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 고딕이기 때문에, 소설의 장소, 풍경, 날씨 같은 환경 요소도 ‘고딕’스럽고, 인물도 초자연적이며, 죽음도 자주 나오는 겁니다. 내용은 두려움과 공포감이 주를 이루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외롭습니다. 사회로부터 떨어져 고뇌합니다. 자신의 행동과 결정이 악의 상태로 빠지고, 고통을 겪습니다. 주인공은 지구를 돌아다니거나 방랑자가 되어 영원한 포로가 되어 형벌을 받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이 모든 요소를 품고 탄생한 것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은 당시 영국 독자가 모르는 곳에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스위스, 몽블랑 산, 스코틀랜드 외딴섬, 북극처럼 당시 <프랑켄슈타인>의 공간은 월턴 선장의 북극에서 보내는 편지로 시작하고,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로 이동합니다. 빅터의 이야기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작합니다. 스위스 잉골슈타트 대학에서 생명 창조의 열망을 품고 생명을 창조하죠.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소식을 듣고 다시 고향 제네바로 돌아오고, 스위스 알프스 몽블랑에서 자신의 피조물과 만납니다. 이후 독일을 거쳐 잉글랜드를 지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를 경유한 후 북쪽 오크니 섬에서 또 다른 생명체 창조에 몰래 착수합니다. 소설의 공간이 잉글랜드로 특정되지 않아요. 프랑켄슈타인 속 공간은 스위스 제네바와 알프스, 독일을 거쳐 영국 중부에서 스코틀랜드, 외진 작은 섬, 마지막에는 북극에서 끝을 맺습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3부로 구성됩니다. 1 부에서는 북극 항해 모험을 떠난 월턴 선장의 편지로 시작합니다. 소설 속에는 대표적인 인물이 세 사람이었죠. 월턴 선장, 빅터 프랑켄슈타인, 그가 창조한 피조물 이렇게 셋입니다. 월턴 선장은 북극 항해 모험을 떠나 항해 중인 인물입니다. 그 항해 도중 빅터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소설이 시작되죠. 월턴 선장은 시를 쓰기도 했지만 지금은 배에서 자연과학 공부를 하고 아무도 하지 않은 모험을 시도 중인 인물입니다. 미지의 세상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떠나왔다는 점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생명 창조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사회에서 벗어나 혼자 연구에 몰입하는 아웃사이더 같은 모습이죠. 월턴과 북극, 월턴과 빅터가 소설의 시작과 끝부분을 이어줍니다.
월턴 선장의 편지 글 이후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애정 가득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전기학과 수학을 독학한 후 대학에 입학하여 미지의 힘을 탐사하고 창조의 은밀한 신비를 세상에 펼치려는 결심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2년 동안 혼자 연구에 몰두하여 생명의 원인을 밝히고, 무생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기능을 밝혀낸 후, 마침내 생명 창조에 성공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행복하고 우수한 생명 창조 가능에 대한 믿음을 멈추지 않고 연구하여 드디어 ‘피조물’이 탄생합니다.
피조물의 탄생은 아무도 이루지 못한 원대한 희망에서 시작되지만, 어두운 재료들로 만들어집니다. 빅터는 납골소에서 구한 뼈로 골격을 세우고, 시체를 훼손하여 아름다운 외모의 특징들만 골라냅니다. 이어 비례가 맞도록 팔다리는 구성하고 생명의 전기를 흐르게 하여 피조물이 탄생합니다. 아름답게 짜 맞춘 피조물은 쭈글쭈글하고 누런 피부를 가지고, 이 피부는 근육과 동맥을 가리고, 윤기 있는 검은 머리칼이 있지만, 눈은 진주처럼 희고, 새까만 입술과 대조를 이루어 섬뜩합니다. 빅터에게 공포와 역겨움을 안겨주는 형상이 됩니다. 이 피조물이 처음 관절을 움직일 때는 빅터에게 ‘상상 못 할 악마’가 되어버립니다.
2부는 이 피조물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셸리의 소설 속에서 이 피조물을 가리키는 용어는 다양합니다. 이 피조물을 창조한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피조물, 악마, 오우거 여러 명사로 부르지만, 정작 이 피조물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없습니다. 메리 자신도 ‘이름 붙일 수 없는 존재’라고 하기도 했으니까요. 존재한 적 없는 존재에 대해 붙일 수 있는 이름이 마땅하지 않은 거였죠. 소설 출간 이후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이 피조물의 이름이 많이 고민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피조물을 만든 프랑켄슈타인의 이름을 괴물의 이름으로 알게 된 거죠.
버림받은 피조물은 돌봄 없이 버려진 아이의 이미지입니다. 빅터의 부모님은 빅터에 대해 “ 자신들이 탄생시킨 존재에 대한 의무를 깊이 새기고 있는 데다, 그들에게 삶의 이유가 되었던 적극적인 애정까지 쏟아부었”습니다. 하지만 빅터는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보자마자 혐오스러워하고 경악합니다. 그래서 버려버립니다. 이 피조물은 부모를 잃고 혼자 성장하는 아이입니다. 학습 능력이 뛰어나고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연민을 자아내는 존재입니다. 단순히 잔인한 복수를 저지르는 괴물이 아니라 인간과 유사한 특징을 많이 지니고 있죠. 혼자서 다양한 감각을 구분하고, 외부 상황이나 사물을 식별하는 능력이 없고 발성도 어려웠지만, 감각을 통해 하나씩 새로운 지식을 천천히 습득하는 모습은 아기가 태어난 후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고 세상에 대해 하나씩 배워가는 과정과 정말 비슷합니다.
특히 가난하지만 행복한 드라세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사랑받고 배려받고 싶은 욕구를 가지는 부분은 연민이 느껴집니다. 우연한 기회에 문자를 습득하여 독서를 통해 인간의 역사, 정부, 종교, 전쟁, 덕목, 종교, 본성, 인간사회 구조, 부의 특징과 계급에 대해서 논할 때는 놀랍습니다. <실낙원>, <플루타르크 영웅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인간 삶에 대한 통찰을 하고 인간 사회를 이해합니다. 모두 괴물이라고 하는 이 존재는 독서를 통해서 이성적이고 지적인 존재로 바뀌는 이 부분이 인상적이고 모순되기도 합니다.
피조물에게 고립과 단절과 외로움의 고통을 주는 것은 피조물의 정신이 아니라 겉모습입니다. ‘온갖 생물보다 더 흉측한 모습’으로 나옵니다. 이 외모가 결국 절망의 원인이 되죠. 이 감정으로 인해 복수의 마음이 싹트게 되고요. 피조물이 오랫동안 관찰하는 그 행복한 가정의 아버지는 앞을 보지 못하는 노인인데, 이 피조물과 친구처럼 소통하며, 다정한 관계를 맺습니다. 이 노인은 앞을 보지 못하고, 피조물의 외모를 볼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이 피조물이 다른 인간과 비슷한 평범한 외모였다면 인간 사회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창조자로부터 버림받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끊임없이 다정한 태도를 원하고 어울리고 싶은 욕구를 표현하는 장면은 안타깝습니다. 결국 혼자 신뢰한 가족으로부터 거부를 당하면서 복수의 다짐을 하죠. 자신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찾아갑니다.
이 피조물의 ‘괴물’ 성은 고립, 애정 부족, 소외에서 독버섯처럼 뻗어 나옵니다. 소설 속 인간 가족들은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부모님의 사랑, 애정을 주는 친구, 연인의 사랑, 가족 간의 사랑, 보호와 호의가 자주 나옵니다.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모든 것이 부재하는 존재는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피조물뿐입니다. 그에게는 가족, 공감, 배우자, 사랑, 호의, 이 모든 것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오히려 공격과 배척만 받고 소외당하죠. 이러한 애정의 부재와 소외가 괴물 같은 모습으로 이어져 창조자에 대한 파멸을 가져옵니다. 자신을 창조한 빅터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고 복수를 시작합니다.
피조물은 자신의 창조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만든 이여, 당신은 나를 미워하고 멸시하고, 나를 죽이려 하고 있소. 나에 대한 의무를 다 하시오. 나는 당신의 정의를, 너그러움과 애정을 받아 마땅하오.” 이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고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창조자와 피조물을 서로 쫓고 쫓기는 사이가 되어버립니다. 그칠 줄 몰랐던 탐구욕과 연구의 결과로 탄생한 생명 창조에 대한 결과로 여러 비극을 경험합니다.
소설 속 ‘괴물’은 혼자 있는 시간이 차고 넘치므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세상’을 갈구하며, 프랑켄슈타인 박사에게 자신과 똑같은 피조물을 다시 만들어 달라고 애원합니다. 자기만큼 흉하고 소름 끼치는 여자, 자기를 거부하지 않을 배우자, 같은 종의 똑같은 약점을 지닌 그런 존재를 다시 창조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창조를 여행을 다시 떠납니다. 제네바를 떠나 잉글랜드를 거쳐 스코틀랜드 북쪽 외딴섬에서 같은 작업을 반복하지만 최종 순간 망가뜨립니다. 이 마지막 결정은 피조물을 분노하게 하고 빅터의 사랑하는 약혼자를 해하게 합니다. 결국 두 존재는 서로 쫓고 쫓기는 숙명의 존재가 됩니다.
두 존재의 추격전은 드넓은 북극까지 이어집니다. “나의 지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는 살아있고 내 능력은 완성되었다. 나를 따라와라 내가 찾아가는 곳은 북극의 만년빙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외로운 피조물에게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빅터 프랑켄슈타인 만이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고,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3부의 결말 부분 또한 비극적이지만 광활한 북극에서 만나는 두 존재 이야기와 소설의 결말은 슬프기도 합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무궁무진한 상상력과 분석력과 탁월한 응용력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생겨나고, 피조물에게는 외로움으로 인한 잔인한 선택을 하게 되거든요. “내가 완수한 그 일, 참으로 감각과 이성을 지닌 동물을 창조해 낸 업적을 생각하면 나 자신을 평범한 과학자로 볼 수 없었어. 그러나 내가 연구를 시작할 때 힘이 되어 주었던 그 생각은 결국 나를 먼지 구덩이 속에 밀어 넣고 말았네. 나의 모든 생각과 희망은 무위로 돌아갔고, 전능함을 갈망했던 대천사장처럼 나는 영원한 지옥에 묶인 신세가 되었어.”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끊임없이 알고자 하는 인간 욕망이 인간에게 축복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고, 현대에 이르러 인간이 창조한 과학 기술에 대한 윤리적인 성찰을 이끌어 내기도 하고, 단절과 소외가 초래하는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합니다.
하지만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19세기 작가, 메리 셸리가 잉태한 창조물, 죽음에 이르지 않는 성공적인 창조물로 읽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을 낳고 죽은 엄마나 자신이 잉태했지만 죽은 세 아이와는 달리 더 이상 마음 아프게 죽음을 맞아 사라지지 않는 성공적인 창조물이죠. 나아가 여성의 글쓰기가 흔하지 않은 시절 메리가 창조한 이야기가 21세기까지 성공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점도 돋보이죠. 소설 속 빅터의 상상력은 파국을 맞았지만, 실제 메리 셸리의 상상력은 문학사에서 유일무이한 작품을 탄생시켰고, 그녀의 창조력은 어떤 작가 와도 비교되지 못할 만큼 뛰어나거든요.
끝으로 두 ‘메리’의 상상력의 성공적인 결과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습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에서 딸 메리 셸리에게로 이어지는 여성의 상상력은 200년이 흐른 지금도 많은 여성들에게 영향을 주고 영감을 주고 있죠. 용감했으며 시대를 앞서 갔던 두 ‘메리’의 상상력은 창조의 원천이 되어 지금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죠. 어쩌면 우리는 모두 ‘아티스트’가 될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창조물을 잉태하고 창조하고 세상에 내놓는 책임감 있는 창조자가 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