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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기린 Jun 14. 2023

5. 삶과 일의 균형(1)

2022 프랑스 방랑기

 파리에서 낭트로 넘어가는 당일. 나와 J는 여유롭게 아침을 맞았다. 전날 늦게까지 파리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느라 퉁퉁 부어버린 발과 다리를 위해 새로 방문하게 될 그곳에서의 오늘 하루는 최대한 여유롭게 시간을 흘려보내기로 했다.


 낭트행 프랑스 기차에 탑승한다. 이제는 기억창고 사진으로만 남아있는 어린이집 다니던 꼬꼬마 시절 당시 딱 한 번 타본 기차 이후 오늘이 두 번째다. 얼마나 타보고 싶던지... 생의 두 번째 기차를 프랑스에서 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좋다.

 우리는 Ouigo라고 쓰여있는 기차를 타고 2시간 30분가량 달려 낭트에 도착할 예정이다. Ouigo는 프랑스식 KTX인 TGV의 오래된 차체로 운영된다. 즉, 우리네 아버지가 회사 정년퇴직 후 치킨집 사장님으로의 삶을 이어나가시는 것처럼, 나이 먹은 TGV가 은퇴 후 Ouigo로 활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Ouigo는 TGV와 같은 속도임에도 훨씬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사회초년생 여행객이었기에 비싼 만큼 쾌적한 TGV 대신 조금은 노후됐어도 여전히 정정한 은퇴 기차를 선택했다.


 표에 적혀있는 자리를 찾아 앉으려고 봤더니 이어폰을 꽂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프랑스에 온 지 고작 며칠밖에 안 된 나는 표에 적힌 숫자와 좌석에 적힌 숫자가 같음을 확인하고도 내가 잘못 찾아온 건가 하는 혼란에 빠진다. 30초 정도 주춤주춤 하다가 그 반대에 앉아계시는 푸근한 풍채에 50대로 보이는 아저씨에게 표를 보여줬다.


"여기가 제 자리 맞나요?"


아저씨는 친절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맞아요. 근데 다들 그냥 앉아서 여기에 앉으면 될 거예요."


 아저씨는 비어있는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셨다. 세 좌석 중 정 가운데 자리, 그 옆에는 나에게 친절한 미소를 보이며 설명해 주신, 좌석 하나로는 답답할 것이 확실한 푸근한 풍채의 아저씨가 계신다. 내 자리에 앉아있는 저 남자는 아마도 좁아진 자신의 자리를 버리고 비어있던 내가 탔어야 할 빈자리를 낚아챈 게 분명하다.

 한국이었다면 이어폰을 끼고 외부 소음을 차단한 그 남자의 어깨를 굳이 툭툭 쳐 이곳은 내 자리라며 표를 눈앞에 들이밀었을 테지만 이곳은 프랑스이다. 제대로 아는 것도 없는 나라에서 이 행동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굳이 불편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나는 아저씨 옆에 앉는 걸 선택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옆 자리 아저씨를 밀치게 되는 좁아진 좌석 덕분에 나는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려 낑낑거리는 대신 창밖으로 지나치는 순간의 풍경들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약 2시간 30분이 지나고 낭트역에 도착했다. 프랑스의 서쪽으로 달려왔을 뿐인데 훨씬 썰렁해진 기온에 날씨의 과학을 몸소 체감하며 숙소로 향한다. 숙소에 거의 다 와갈 무렵 얇은 빗줄기가 얼굴을 훑기 시작했다. 예전에 SNS를 돌아다니다 봤던 프랑스 인들은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글이 떠오른다. 프랑스에 왔으니 나도 그들을 따르겠다는, 사실은 우산을 꺼내기도, 쓰고 다니기도 귀찮아서 기억해 낸 합리화로 내리는 빗방울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다행히 비가 그리 세게 내리지는 않는다.

 

 숙소에 도착해 한국에서부터 싸 온 한식으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 나온 나와 J는 발길이 닿는 대로 무작정 걷기 시작한다. 여기서만큼은 정말 별다른 계획 없이 그저 시간이 흐르는 대로 이곳을 즐기기로 다짐했다. 멀리서도 보이던 웅장한 옛 성에 방문해 지극히 유럽스러운 작은 공원에서 줄 없이 신나게 뛰어다니는 강아지를 지켜보고, 한국에서는 관심도 갖지 않던 화방에 방문해 잘 알지도 못하는 미술 용품을 이것저것 구경하고, 맛있는 디저트가 당겨 구글 지도에서 평점 높은 베이커리를 찾아 레몬 타르트와 초코 에끌레어도 먹었다. 그렇게 골목골목을 다니던 우리는 무언가 생소한 풍경을 마주한다. 평일임에도 문이 닫혀 있는 여러 상점들과 식당들이 골목 여기저기에 자리하고 있던 것이다. 오후 4시에서 5시로 넘어가는 한창 영업을 하며 활짝 열려있어야 할 문들이 꽉 잠겨있었다. 우리는 오늘이 이들의 휴무일인가 추측하며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의문은 리옹에 도착했을 때 풀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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