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기린 Nov 08. 2023

1. 배낭 하나 매고 날아간 태국

2023 동남아시아 방랑기

 4개월째 유니클로에서 파트타이머로 일을 하던 때다.


 야심 찬 포부와 함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0일간의 프랑스 여행을 마치고, 인천에 마련했던 작은 월세방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지도 4개월이 지났다. 

 이곳저곳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배낭을 들쳐 매고 누가 봐도 청춘이구나 싶은 삶을 살 것이라는 과거의 기대와는 다르게 너무도 익숙한 풍경 속에서 주 4회 출퇴근을 하며 기대와는 다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모아놓은 돈을 세계 여행에 투자하기에 나의 담력은 생각보다 작은 모양이었다. 상상과는 큰 폭의 차이 때문일까, 벗어나지 못한 루틴 한 일상의 영향 때문일까 감정은 날이 갈수록 메말라 갔고, 활활 타오르던 열정은 급속도로 꺼져가고 있었다. 


 거대한 이상은 목표를 쫓아가는 데 중요한 랜드마크가 되기도 하지만, 높은 실체를 마주해 넘지 못할 것 같은 한계를 느끼는 순간에는 감당하기 힘든 좌절로 변모하기도 한다. 퇴사를 마음먹은 당시의 거대한 이상은 겁 없이 프랑스로 떠날 패기를 주었고, 길을 잃을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는 그것은 나를 지치게 했고,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게 만들었다.


 사라진 목표로 길을 잃은 나는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의지도, 새로운 목표를 찾아낼 열정도 생기지 않았다. 내 안을 가득 채우던 삶의 목표가 흐려지자 거대한 구멍이 생겼고, 그렇게 그 구멍은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둠으로 메꿔졌다. 정다운 인사를 건네는 동료에게 미지근한 온도의 태도로 답을 하게 되었고, 선을 넘고자 하는 따듯한 대화에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또 다른 선을 그었다. 누군가 밝게 웃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공감의 동요가 일지 않았고, 그렇게 나의 하루에 웃는 얼굴은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느끼지 못하는 우울이라는 감정이 몸을 웅크리게 했고, 죽음이라는 개념이 친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삶은 무엇이며 죽음은 무엇일까, 죽는 게 두려운가와 같은 철학적인 질문부터 지금 죽어도 아쉽지 않겠다는 삶의 미련을 버리는 자세가 생겨났다.

 자의적인 선택으로 삶을 마감할 용기는 없었으나, 운명이 이끄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다. 매일 삶의 마지막을 생각하는 것이 익숙해졌고 심지어는 운전을 하다가 '핸들을 갑자기 돌려버리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남에게 피해 주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기에 이에 대한 자책을 시작했고, '혹시 생각으로 끝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이 우울로 무뎌졌던 감각에 작은 사이렌이 되었다. 

  죽음이라는 개념과 친해지고,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의지가 없는 무기력으로 가득해도 여전히 맛있는 게 좋았고, 해와 달이 인사하는 석양의 시간이 좋았기에, 반려견 초코와 산책을 하는 시간이 행복했고, 친한 친구들과 만나 밥 한 끼 하는 게 즐거웠기에 지금 나의 상태를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스스로를 덮고 있는 <우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감정이 사라진 '나'를 돌아보게 되었고, 삶보다는 죽음이라는 단어와 더 친하게 지내고 있는 '나'를 직면하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지금 우울증에 걸린 것은 아닐까 싶어 네이버 검색창에 '우울증 자가 진단'을 검색했다. 


 적은 문항의 답을 다 하고 나니 우울증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나 스스로는 이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울증 전조 증상인가 보다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상태를 극복하지 않는다면 '우울증이 아니다'라는 결론이 '우울증이다'라는 결론으로 바뀔 것이라 확신했다. 순간의 작은 사이렌을 놓치면 안 된다고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다음 여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배낭 하나만 매고 찾아가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고,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나라를 찾았다. 동남아시아를 돌고 싶었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의지가 조금씩 피어났다.


 태국과 라오스를 가고 싶었고, 태국에서는 방콕에 잠깐 머물다 이전부터 가고 싶었던 치앙마이를 여행하고 싶었다.


 태국식 쌀국수를 먹고 싶었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대화하고 싶었다.


 라오스에서 길거리 바게트 샌드위치를 먹고 싶었고, 블루라군에서 생각 없이 물에 뛰어들어 수영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 때 친해진 한 친구와 통화를 했다. 성격부터 취향까지 나와 비슷한 게 많은 친구로 이것이 우리가 짧은 시간 가까워질 수 있던 이유였다. 그런 친구에게서 대화 속 숨어있는 내 것과 비슷한 어두운 구멍이 어렴풋 보였다.

 본능적으로 이 여행에 친구를 초대했고 몇 가지 이유로 태국에서는 나 홀로 여행을, 베트남에서 친구를 만나 함께 여행을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태국행 티켓을 예매하고, 비행을 기다리는 남은 기간 동안 무채색으로 흐려지던 내 삶에 다시 한번 색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죽음을 생각하던 시간은 여행 가서 뭘 먹을까로 채워졌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 거실에 앉아 넷플릭스만 보던 시간은 여행에서만 특별히 할 수 있는 활동을 찾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어둠과 공허만이 가득하던 거대한 구멍은 점차 다채로운 색상으로, 무언가를 향한 기대와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기대감으로 메꿔지고 있었다.


 그렇게 2023년 5월 18일

 나는 가득 채운 40L 배낭과 대한민국 국기가 붙어 있는 검은색 가방을 앞뒤로 매고 

 또 다른 시작을 만들어 낼 태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작가의 이전글 7. 2022 프랑스 여행 마무리_사진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