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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기린 May 04. 2023

1. 청춘에 대한 열망이 낳은 충동

2022 프랑스 방랑기



갑작스럽게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맹랑하게 사표를 던지고 떠난 여행.

그곳은 프랑스였다.




 여느 때처럼 평범하던 어느 날.


 힘차게 울리는 알람을 끄고, 주섬주섬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점심으로 먹을 도시락을 부지런히 준비해 현관문을 나섰다. 길게 뻗어 있는 복도를 지나며, 나와는 또 다른 하루를 보내게 될 이웃들의 아침을 숨겨놓은 여러 문들을 지나치는 그 순간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재미없어...'


 이제 막 대학교를 졸업한 20대 초중반의 아직은 무르익지 못한 풋풋한 미소를 띠고 있어야 할 나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즐거움도, 슬픔도, 짜증도 그 무엇의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지루함의 무표정.

 그렇게 출근을 하고 가끔 답답할 때면 찾아가는 회사의 옥상 정원으로 나왔다. 그리곤 목적 없는 시선을 던지며 생각했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내가 원해서 가는 길인가, 떠밀리듯 가고 있는 길인가'. 답은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무런 목표도, 목적도 없이 의무감으로 나서던 출근길, 어떤 흥미도, 호기심도, 열정도 생기지 않는 업무들, 그저 퇴근시간만 바라보며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는 시간들까지. 나는 지금 미래에 대한 불안감, 부모님의 기대, 주변 사람들과의 비교, 기타 여러 가지 것들에 떠밀려 그냥 그렇게 걷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 익숙한 장소에서 새삼스레 와닿은 현실은 청춘에 대한 열망의 불쏘시개가 되어버렸다.


 자리로 돌아와 항공권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저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여행의 기회를 기다리며 지루한 삶을 보내기엔 인내심이 부족했다. '지금은 기회를 기다릴 때가 아니라 만들 때다'라는 맹랑한 생각으로 정해진 목적지 없이 여러 항공사의 항공권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눈에 띈 한 문장.

<유럽 노선 증편 기념 프로모션>


 홀린 듯 프로모션 창을 누르고 운항 스케줄을 살폈다. 그렇게 이 클릭은 청춘에 대한 열망의 강력한 불길이 되었다. 한번 커지기 시작한 불길은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물을 뿌려봐도 진화는 커녕 잡을 수 있을 테면 잡아보라는 듯 날뛰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2022년 10월 20일 파리로 향하는 아시아나 항공 비행 편에 나를 위한 좌석 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여행의 목적지를 프랑스로 정한 데엔 큰 이유가 없다. 나는 이전부터 유럽 여행에 대한 의지가 있었고, 마침 아시아나에서 유럽 노선을 증편했다. 그리고 마침 증편 기념 프로모션을 발견했고, 우연히 파리의 에펠탑 기사가 떠올랐다. 에펠탑이 부식되고 있다는 내용의. 덕분에 늦기 전에 에펠탑을 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겼고, 그렇게 프랑스는 나의 목적지가 되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어이없는 우연의 혹은 의도된 의식의 흐름으로 나의 방랑은 시작되었다.


 프랑스 여행이 확정되는 순간, 회사에서의 마지막도 결정됐다. 그리고 몰아치는 후폭풍. 갑작스레 틀어진 경로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대와 두려움 그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럴 때면 옥상 정원으로 달려가 프랑스를 여행하는 나를 그렸고, 도서관으로 달려가 다른 사람의 용감한 삶을 들여다봤다. 삶에 용기가 필요할 때 다른 사람의 용감한 삶을 들여다보는 것 그 자체만으로 좋은 응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때 깨달았다.

 그렇게 퇴사 당일이 되었다. 그간의 고뇌가 무색하게 너무나 상쾌한 아침이었다. 문 밖을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고,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그 어떤 출근길보다 당차고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사실 회사 생활은 처음이었던 나에게 <사직서 제출>이라는 임무는 쉽지 않았다. 사직서를 적어 내려갈 때의 당돌한 모습은 막상 사직서를 제출해야 할 때 보이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때와는 차원이 다른 사직서의 무게에 사회초년생은 짓눌리고 말았다. 사회에서 나를 감싸주던 회사라는 울타리, 하고 싶은 것을 즐길 수 있게 해 주던 월급, 어른들의 걱정 섞인 오지랖으로부터의 방패. 이 모든 것들은 '사직서'라는 종이 한 장으로 모조리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를 수 없었다. 나는 이미 프랑스행 티켓을 예매했고, 10월 20일 한국을 떠나야 한다. 취소 시 수수료를 물어야 한다는, 평소였다면 불만이 가득했을 이 조항 덕분에 나는 사직서를 내야만 했다. 단순히 종이 한 장 내는 일에 수천 번의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나서야 발을 옮길 수 있었고, 미친듯한 심장박동을 숨기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그리고 뻔뻔한 몸짓으로 사직서를 넘겼다.



 퇴사 다음 날, 출근하던 습관 덕에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부지런히 준비한 도시락, 북적북적한 지하철,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없는 평일의 아침을 느긋하게 시작하려고 했던 나의 계획은 틀어졌지만 왜인지 기분이 좋다. 오랜만에 갖는 무책임한 아침에 앞으로 무엇을 하게 될지, 어떤 사람이 될지 무엇 하나 예상되지 않는 불확실의 두려움은 존재감이 없다.

 오랜만에 향긋한 티를 우린다. 좋아하는 재즈를 틀어놓고 여행 에세이를 펼친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시원한 겨울의 공기를 느끼며, 따듯하게 우려진 티를 한 모금 마신 후, 에세이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천천히 음미한다. 지금만큼은 이 7평 남짓한 작은 월세 방이 세계 최고의 휴양지 못지않다. 어느덧 점심때가 되었다. 냉장고에 사뒀던 채소들로 파스타를 만든다. 별다른 레시피 없이 좋아하는 재료를 듬뿍 집어넣고, 토마토소스로 맛을 낸다. 검증된 레시피도, 철저한 계량도, 순서도 없는 무질서의 요리였으나 꽤 맛있다. 밥을 먹었으니 소화를 시키기로 한다. 평소에 자주 입던 옷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이 동네에서 내가 가장 애정하는 장소를 향하기로 한다. 신나는 pop을 틀고 얌전히 리듬을 느끼며 도서관에 도착했다. 왜인지 오늘따라 조용하지만 치열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들 사이에 앉아 여유롭게 독서를 시작한다. 수많은 토끼 사이에 한 마리의 거북이가 되는 기분은 생각보다 재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마트에 들른다. 목적 없이 들어간 마트는 최고의 박물관이다. 1시간이 넘도록 수많은 먹거리를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씻고, 또 다른 영화를 보니 하루가 갔다. '오늘'은 퇴사를 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사직서를 내기 전까지는 <사직서 제출>이라는 행위에 대한 걱정으로, 사직서를 낸 후에는 <경로가 틀어진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기대보다는 걱정이 더 많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막상 겪은 '오늘' 하루는 저번주 주말과 별다를 게 없었다. 직장을 그만둔 무직의 월요일은 회사에 속한 직장인의 토요일이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내가 살던 일상이었다. '오늘'을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우며 생각했다.


'별 거 없네'


 이렇게 또 한 번 느낀다. 뭔가 엄청나고 특별해 보이는 일도 막상 마주하면 별 게 아니라고. 그러니 괜한 두려움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걱정은 굳이 사서 하는 게 아니라고. 내 삶에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만 같던 퇴사도 평일을 주말로 바꿔주는 것 외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졸린 얼굴에 허탈한 미소가 번진다. 오늘따라 꿈을 꾸고 싶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시공간을 뒤흔드는 가능한 비현실적인 꿈으로.


 그렇게 기다리던 10월 20일. 북적이는 출근길의 지하철이 무서워 계획보다 1시간 정도 일찍 집을 나섰다.  커다란 배낭과 캉골 백팩을 앞뒤로 메고 여행자의 기운을 잔뜩 내뿜으며. 부지런히 출발한 덕분에 인천공항에 여유롭게 도착했다. 카운터를 확인하고 셀프 체크인과 셀프 수화물을 보낸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 오랜만에 만난 인천공항을 둘러보기로 한다. 다양한 언어,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 어디론가 떠나고 어디선가 도착하는 대한민국의 출입구. 설렘이라는 감정이 가장 농축된 곳. 그 안에 내가 속해있다.

 ‘비행’이라는 단 하나의 혹은 ‘여행’이라는 두 개의 교집합을 갖는 불특정 다수 사이에서 나 홀로(혹은 나와 같은 누군가와) 다정한 소속감을 느낀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에서 오는 설렘과 긴장을 느끼며 거대한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좌석 확인 도와드리겠습니다:)”




 승무원들의 친절한 목소리를 들으니 실감이 난다. 나 정말 떠나는구나. 처음 떠나는 장거리 여행에 헤드셋부터 다운로드한 14개의 영상, 양치도구, 충전기까지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제 수십 개의 국경을 지나치는 아시아나 oz0501 항공편 안에서 앞으로의 유일한 계획인 프랑스 여행을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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