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알 수 없는 덴마크
하루키의 글을 읽고 하이네켄을 마시게 된 이후로 메뉴판에서 맥주를 고르는 일은 늘 조금 설레는 일이 되었다. 어떤 맥주가 언젠가 내게 그런 멋진 장면을 가져다 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덴마크에서 두 번째 맥주를 고민하다 강렬한 하루에 어울리는 쌉쌀한 맛의 필스너 로얄 클래식을 시키고는 접시에 음식을 담으러 갔다. 덴마크에서 제대로 먹는 첫 저녁 식사는 뷔페였다. 덴마크는 돼지고기가 유명하다는 욱님의 추천에 따라 고기 위주로 접시에 담아왔는데 맛은 그럭저럭 평범했다. 아니 사실 좀 느끼했다. 돼지가 유명한 거지 요리가 유명한 건 아니니까 뭐.
(※하루키의 '하이네켄 맥주의 빈 깡통을 밟는 코끼리'라는 글이다.)
코펜하겐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아침부터 시작된 신세계 덕분에 머리 속에는 하루 종일 너무 많은 것들이 밀려와 나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씩 끄집어내어 부지런히 되새김질을 했다. 그러는 사이 나의 장점이자 단점인 '너무 진지한’ 모드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하 진지함 주의)
하루를 돌아보며 제일 흥미로웠던 부분은 역설적으로 평범한 덴마크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덴마크 사회가 가진 제도의 뛰어남과 달리 현실 속에서 구성원들이 보여주는 평범함 혹은 느슨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고민스러웠다.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평균적인 시민의식이 매우 높다 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떤 모습들을 보면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시민의식이 높은 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 문화도 반전이 있었지만 에프터스콜레에서 본 모습들도 그런 식이었다. 이렇게 뛰어난 공동체 교육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걸 보며 역시 사회 수준이 높다고 생각을 했지만, 막상 에프터스콜레를 선택하는 사람은 30% 수준으로 생각보다 낮다는 점도 또 놀라웠다. 이렇게 좋은데 왜 안 가는 것일까? 현장에서 들었던 설명으로는 단체 활동을 부담스러워하는 친구도 있고,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학비 때문이기도 하고, 그냥 빨리 진학하는 걸 택하는 경우들 때문이라고 했다. 다 이해가 가는 이유지만 그런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 겉에서 기대한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공교육이 그만큼 좋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여기도 아직 공동체 교육의 가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는 걸까. 우리가 밖에서 바라보는 덴마크의 모습은 저 30%의 사람들이 만들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동안 버스 안에서 오늘의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탐방을 같이한 일행분들 중에는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고 자연스럽게 선생님들의 소감을 들을 수 있었다. 한국의 선생님들은 에프터스콜레와 비교해 우리나라의 현실을 어떻게 보셨을지 궁금했다. 몇 분이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좋은 환경과 정부의 충분한 지원 속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점은 부러웠지만 우리에게도 이만큼의 열정과 철학을 가진 선생님들이 있다고 하셨다. 비록 가진 환경은 많이 부족하지만 노력한다면 우리도 이만큼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야기하셨다. 돈과 시간을 들여 지구 반대 덴마크까지 더 나은 교육을 찾으러 온 분들의 마음속에는 희망이 있었다. 이런 선생님들이 계시다는 게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오연호 대표님이 이야기를 받아 한국에서 만난 좋은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덴마크를 돌아본 책을 내고 전국에 강연을 하러 다니면서 우리나라 곳곳에 덴마크만큼이나 훌륭한 철학과 공동체를 추구하며 사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셨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 안의 덴마크’라는 주제로 그런 분들을 찾아가 만나고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꿈틀 버스'라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계신다고. 생각해보면 내가 있던 하자센터도, 유자살롱도 교육과 공동체에 대해 늘 치열하게 고민하던 곳이다. 분명 다른 곳에도 같은 사회를 보면서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머물러 있을까. 세상을 바꾸기엔 아직 수가 모자라서 일까?
나도 소감을 말하게 됐는데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횡설수설했다. 아직은 덴마크가 어떤 곳인지,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곳에는 훌륭한 시민을 길러낼 수 있는 학교와 교육이 존재한다는 거고,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곳에 쉽게 참여할 수 있다는 거였다. 에프터스콜레 같은 과정들을 통해 사회를 이끌어 나갈 수준 높은 '핵심 시민'을 잘 키우는 것이 덴마크 사회의 비결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봤다.
우리도 노력하면 덴마크처럼 될 수 있겠지. 노력하면 된다는 말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 답 없는 사회가 바뀔 수 있다면 노력을 해야지 별 수 있나. 호텔에 도착해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호텔방에 숨겨진 덴마크의 힘을 보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