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건져 올린 것
오늘 학교에 도장을 판매하시는 분이 왔다. 예전에는 선생님들이 도장을 많이 구입하곤 했는데 요즘은 도장 찍을 일이 많지 않아서인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올해로 학교생활을 마감하는 나는, 도장을 새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오래 써서 뚜껑이 깨지고 잘 찍히지 않는 도장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올해만 무사히 넘기기를 바라며 지내오고 있었는데 오늘 돌연 마음이 바뀌어 새 도장을 하나 구입하기로 했다. 문득 이제 앞으로 이런 도장을 구입할 일이 없을 텐데 그렇다면 이 도장이 나의 마지막 학교생활의 기념품이라 생각하니 영 찝찝한 기분이 들었고 자기에게 도장을 파면 이후에 좋은 일이 생긴다는 사장님의 너스레가 마음에 들었고 여차 저차 해서 망가진 도장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제대로 된 도장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불현듯 들었던 탓이다.
내 도장을 본 사장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요즘 누가 이렇게 다 망가진 것을 쓰고 있느냐며 혀를 차신다. 거기다 요즘은 한자보다 한글 이름을 새기는 것이 대세라고 하신다. 하긴 이 도장을 만든 지 10년도 더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사실 크기와 가격에 비해 도장이 한 일은 어마어마하다. 일 년에 네 번 있는 정규 고사에 이름을 박기도 하고 각종 문서와 아이들의 집으로 갈 성적 통지표에도 얼굴을 내밀었고 그 중요한 성적을 확인할 때에도 함께 했다. 늘 그렇듯이 내용을 확인한 다음 마지막에는 힘주어 도장을 누르곤 했다. 그러므로 도장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나를 대신하여 나의 존재를 각인하는 표지물이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도장을 찍다가도 도장이 가지는 의미를 되새기고 도장과 나의 인연을 생각하면 일순 숙연해진다. 도장의 삶이 곧 나의 삶이었기 때문이리라.
조침문(弔針文)에서 바늘을 잃고 애통함을 토로했던 유 씨 부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온다.
도장에게 영혼이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 주인인 나를 대신해 수십 년 자기 몸을 눌러 마모되기까지 몸을 불태울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 역시 영혼까지 끌어모아 이 자리까지 왔으니 도장과 나의 생이 닮아있는 것은 아닌가.
도장은 소모품이기 때문에 평생 가는 것이 아니다. 처음 교사가 되어 제일 먼저 한 일이 도장을 새기는 것이었다. 그때 유행하던 도장은 긴 뿔 모양으로 이름을 두 자만 새기만 되는 작은 타원형 모양이었고 하도 써서 한 귀퉁이가 마모된 이후에, 도장이 완전하게 찍히지 않게 돼서야 그 소임을 다했다. 다음 도장은 길이가 좀 더 짧아지고 이름 석자를 다 넣을 수 있는 크기로 바뀌었다. 나무에 새기던 도장이 플라스틱 재질로 변하면서 도장의 색깔도 진회색에서 붉은색으로 또 파란색으로 변모해 갔다. 한글에서 한자로 다시 한글로 글자체가 달라지고 크기와 모양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본연의 임무는 달라지지 않았다.
많은 아이들이 나를 지나쳐 갔다. 그들과 무언가를 공유하길 원했던 나는, 끊임없이 아이들이 과제로 써낸 글을 읽으며 도장을 찍어 주었다. 나의 도장은 학생들의 생각을 읽었고 지지하였으며 마침내 그들을 이해한다는 표식을 남겨주었다. 한해에 직접 가르친 학생이 평균 120명이라고 해도 지금껏 4,000명 이상의 학생이 나의 도장과 만난 셈이다. 나에게 도장은 그들에게 나의 마음을 전달하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공책에 찍힌 도장은 그들에 대한 내 사랑의 표현이기도 했다. 얼글을 맞대고, 손을 잡아주고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 도장을 찍고 느낌을 적어 주었고 아이들은 도장을 통해 내 마음을 읽었다.
지난 세월을 함께한 다섯 개의 도장을 앞에 놓고 잠시 감회에 잠겨 보았다. 왜 망가진 도장들을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간직했을까. 언제 만들었는지 정확한 시기조차 알 수 없는 도장들을 앞에 놓고 그들이 어루만진 아이들의 생각을, 그 파편들을 가늠해 보았다. 창의적인 생각에 놀라 기뻐하며 찍은 도장도 있었고 어른스럽고 예의 바른 말투가 의젓한 아이도 만났고 저마다 다른 얼굴처럼 생각도 달라 감탄하며 찍은 도장도 있었다. 도장을 버리지 못한 것은 어쩌면 그 속에 배어있는 아이들의 따스한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장을 어루만지면 그 추억들이 일어나 나에게 안겨오는 느낌이 들었던 탓이다.
윤흥길의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서 구두는 사내의 삶의 원천이고 발판이었다.
다섯 개의 도장을 앞에 두고 나는 그 사내의 구두를 생각한다.
내 생애를 관통하여 간 도장, 아니 ‘나의 구두’에 대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