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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고와디디 Oct 18. 2021

헌 귀 줄게, 새 귀 다오

첼로 입문기 <이 나이에 기어에 첼로를 하겠다고>



올 것이 왔다.

첼로를 시작하고 반년이 좀 못 됐을 무렵인가. 처음에는 내가 첼로로 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악보를 읽고 운지를 하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는데 몇 달 지나자 그 고약한 것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욕심’     

아아, 모든 화를 부르는 그것.

욕심이 생기면 일단 조급해진다. 그리고 예전에 만족하던 것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니 행복하지 않다. 만족해야 행복한 건 당연한 이치다.

하루는 레슨에 가서 그런 마음을 토로했다.  

“선생님, 제가 연주하는 소릴 듣기가 힘들어요. 제가 들어도 제가 내는 소리가 너무 별로예요.”

그러자 선생님의 한 마디.

“지금 스즈키 1권이잖아요.”

“네?”

“이제 스즈키 1권 하고 계시잖아요. 어떻게 소리가 벌써 좋아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나는 아직 불가능한 걸 원하고 있었다. 이것이 성인이 악기를 시작했을 때 종종 생기는 문제라고 했다. 나이 다 들어서 악기를 시작했다면 그 사람은 클래식 음악에 관심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세계 최고 수준의 연주자들의 연주만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몇십(네, 그렇게나 많이) 년을 살아오며 그런 음악만 들어온 거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악기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초보자들의 소리를 매일 듣고 계시겠지만(존경합니다.) 나 같은 일반인은 CD로 녹음된 최고 연주자들의 연주를 들을 기회밖에 없다. 잘 못 하는 사람, 혹은 평범한 사람의 연주를 들을 기회는 거의 전무하다. 그런 사람이 음반을 내는 일이 별로 없을뿐더러 내가 사서 듣지도 않겠지. 첼로를 좋아하다 보니, 미샤 마이스키가 내한할 때마다 여건이 되면 직접 들으러 가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가 첼로를 시작하기 전까지 들은  첼로 연주들은 못해도 국내 최고 수준 이상이었고 내 귀는 있는 대로 드높아져서 내 의식 속에 첼로의 소리란, 응당 세계 최고 수준의 연주로 입력돼 있었던 것. 로스트로포비치, 미샤 마이스키, 요요마, 못 돼도 첼로 듀오 투첼로스의 수준의 첼로 소리만 듣고 살던 그 귀가 이제 겨우 몇 달 배운 (게다가 재능도 없는) 소리를 매일 들으려니 그 고충과 좌절감이 이해가 된다.      

아이들은 클래식 음악을 들으라고 해도 듣지도 않을 거고, 어떤 것이 듣기 좋은 소리이고 나쁜 소리인지조차 알지 못한다고 한다.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 그래서 아이들은 첼로에서 간혹 삑삑 젓가락으로 식판 긁는 소리가 난다고 위축되지도 않고, 어떻게든 좋은 소리를 내려고 기를 쓰다 자세를  망가뜨리지도 않는다는 . 그야말로 (대개는) 영혼 없이 선생님이 자세를 잡아 주는 대로, 활을 그으라고 하는 대로 (기계처럼) 쭉쭉해나가는 것이고, 무엇보다 중간에 좌절하며 자학할 일도 없는 거다.       

어찌 보면 이 세상 모든 슬픔은 자신이 가진 것과 원하는 것,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것이리라. 내 귀가 익숙해 있던 건 내가 가진 것이 아니었다. 남의 것이었다.

일단 내 위치가 어디인지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했다. 냉정하게, 아니 좀 야박할 정도로 말하자면, 내 손과 팔이 내 귀의 수준에 도달하려면 내 귀가 음악을 들어온 3,40년의 세월은 노력해야 공평한 것이리라. 뭐야, 그럼 그때 나는 파, 파, 팔십? 구, 구, 구십?

오우, 노오!!!     

그래서 레슨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나는 신께 빌었다.

“제게, 아이의 막귀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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