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손절”이라는 말은 거의 생활어가 됐다.
불편하면 끊고, 피곤하면 멀어지고, 상처받느니 혼자가 낫다는 태도는 꽤 합리적으로 들린다.
실제로 관계를 줄이면 고통은 줄어든다.
불안도, 실망도, 설명해야 할 책임도 함께 사라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다음에 남는 감정은 행복이라기보다 공허에 가깝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많은 상태는 사실
고통이 잠시 멈춘 상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불안이 줄어들면 편안해지고, 편안해지면 우리는 그걸 행복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편안함은 의미를 만들지 않는다.
조너선 하이트는 『행복의 가설』에서
인간의 마음을 ‘코끼리와 기수’에 비유한다.
감정과 직관이 코끼리고, 이성은 그 위에 올라탄 기수다.
우리는 이성으로 삶을 설계한다고 믿지만,
실제로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건 대부분 감정과 관계, 습관 같은 비합리적 요소들이다.
그래서 하이트는
행복이 의지나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구조에서 부산물처럼 발생하는 상태에 가깝다고 말한다.
특히 그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건,
행복의 가장 강력한 조건이 성취나 자유가 아니라 관계와 헌신이라는 점이다.
의미는 늘 고통을 전제로 생긴다.
책임, 지속성, 타인의 기대, 되돌릴 수 없음.
이 네 가지는 모두 부담스럽고, 피곤하고, 때로는 아프다.
그리고 이 조건들은 거의 항상 관계 속에서만 발생한다.
그래서 관계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
오해, 실망, 조율의 피로.
하지만 이 고통은 파괴가 아니라 작동의 신호다.
관계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그 관계가 나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표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관계를 줄이면서도
완전히 ‘필요 없는 존재’로 사는 삶은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을 줄인 자리에 반려동물이 들어온다.
특히 고양이처럼, 적당히 거리감 있고 복종하지 않지만
그래도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존재.
이건 모순이 아니라 정직한 타협이다.
관계의 고통은 최소화하고,
의미의 최소 단위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택.
결혼도 비슷하다.
결혼이 좋게 느껴지는 이유는
완벽한 사람을 만나서가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구조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행복해지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도망치지 않겠다는 합의에 가깝다.
하이트가 말하듯,
행복은 쾌락의 총합이 아니라
관계와 헌신이 만들어내는 안정된 방향감각에 가깝다.
그래서 관계는 우리를 편하게 만들지는 않아도,
우리가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은 남긴다.
그래서 관계에서의 행복은 역설적이다.
고통이 사라졌을 때 생기는 게 아니라,
이 고통을 감내할 가치가 있다고 느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요즘 우리는 너무 쉽게 묻는다.
“이 관계, 나한테 도움이 되나?”
어쩌면 더 중요한 질문은 이쪽일지 모른다.
“이 고통은,
내 삶을 비워놓는 고통인가
아니면 의미를 만들어내는 고통인가.”
행복은 보호받는 상태가 아니라,
필요한 존재가 되는 상태에 더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