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틀랜드를 펼치며

대륙의 중심에서 밀려난 삶들

by Y One

하틀랜드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땐,
대륙의 한가운데, 중심부.
모든 방향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은 자리.
하지만 이 책에서 하틀랜드는
중심이 아니라 고립된 곳이다.
대륙의 심장부이면서
정치와 자본, 보호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장소.
이 역설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중심에 있지만, 중심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삶.

이 아이러니는 사소한 장면에서 가장 또렷해진다.

사라진 5센트.

아버지는 아이를 바라본다.

혹시 네가 가져간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스친다.

그리고 곧바로 찾아오는 현타.

그는 안다.

이 의심이 아이 때문이 아니라

가난이 자신에게 심어놓은 감각이라는 걸.


이 장면이 오래 남는 이유는

가난이 인간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기 때문이다.

돈의 부족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해 먼저 향하는 불신.


아이에게 전해지는 것은 가난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불안과 죄책감의 공기다.

아무 잘못이 없어도 눈치를 보게 되는 몸의 기억.

이 기억이 축적되면, 아이는 묻게 된다.

"왜 우리는 아직도 여기 있는가."


이 지점에서
힐빌리의 노래는
전혀 다른 지도를 그린다.
힐빌리의 노래에서 하틀랜드는 통과 지점이다.
빠져나와야 할 곳, 탈출해야 할 과거.
그 서사의 중심에는 이동한 사람이 있다.
떠났고, 올라갔고, 시스템 안으로 진입한 개인.
그래서 이 책은
중심부를 이렇게 재정의한다.
“중심으로 가고 싶다면,
먼저 여기서 나와야 한다.”
문제는 이 재정의가
너무 매끄럽다는 점이다.

힐빌리의 노래가 널리 읽힐수록
하틀랜드는 더 이상 질문의 장소가 아니라
설명의 대상이 된다.
왜 나가지 않았는지,
왜 여전히 남아 있는지.
그 시선은
아버지가 아이를 의심하던 그 순간과 닮아 있다.
조건이 아니라 선택을 묻는 시선.
중심에 있으니 더더욱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판단.

하지만 사라 스마시는
그 판단을 거부한다.
하틀랜드에서 떠나지 못한 삶은
실패한 삶이 아니다.
중심에 있었지만 보호받지 못한 삶이고,
중요했지만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삶이다.

아버지가 아이를 의심한 장면에서도
누가 옳고 그른지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조건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에서 하틀랜드는
게으름의 상징도, 무능의 증거도 아니다.
중심에 있으면서도 버려진 자리다.
그래서 이 책의 질문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발전은 왜 늘 중심부를 통과하면서도
그 중심의 사람들을 남겨두는가.
왜 대륙의 심장에 사는 사람들은
늘 주변부처럼 취급되는가.
하틀랜드는 그 질문을 크게 외치지 않는다.
5센트를 둘러싼
아버지의 흔들린 시선 하나로
조용히 드러낼 뿐이다.

인류는 분명 발전해왔다.
대륙의 중심까지 철도는 뻗었고,
시장도 도달했다.
하지만 그 발전이
아버지가 아이를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을
만들어주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아이에게 전달되는 불안을
정말로 줄였는지도.
하틀랜드라는 이름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완성된다.
중심에 있었기에 더 철저히 방치된 삶들.
그리고 그 삶을 탈출 여부로만 판단해온 우리의 시선.


하틀랜드는 묻는다.
인간은 어떤 조건에서
비로소 인간다워질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말해온 발전은
그 조건을 정말로
대륙의 중심까지 확장해왔는지.

이 책을 덮고 나면
하틀랜드는 더 이상
지도 위의 한가운데가 아니다.
우리가 외면해온 질문의 중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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