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를 마친 리 대리는 오랜만에 대학 동기인 주 과장을 만나러 갔다. 주 과장은 기계공학과를 나와 개성공단 내 H자동차에 입사했다.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입사했지만, 주 과장의 진급은 더 빨랐다. 노조 때문이었다. 직급이 낮으면 현장 내 작업자에게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으니까. 리 대리는 주 과장의 빠른 진급이 부러웠지만, 정작 주 과장은 그를 보며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며 투덜거리곤 했다. 두 사람은 지글지글 익어가는 삼겹살 앞에서 평양소주를 먼저 나눴다. 리 대리는 연거푸 원샷하는 주 과장에게 소주를 따라주며 물었다.
"요새는 별일 없고?"
주 과장은 따라준 소주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잔을 다시 내밀었다.
"말도 마. 오늘도 생산량 못 채울까 봐 조마조마했지 뭐야. 신규 라인 안정화도 아직 안 끝났는데 벌써 기존 라인 생산량과 맞추라잖아. 말이 돼?"
개성공단 내 규모로 보면 S전자보다 H자동차가 더 컸다. 반도체는 남한의 전략 기술로 지정되어 있어, 가장 높은 기술이 요구되는 제품이자 공급망에 차질을 일으킬 수 있는 규모의 공장을 북한에 세우긴 어려웠다. 하지만 자동차는, 특히 내연기관 자동차는 그보다는 유연했다. 해외 수요도 여전히 많았고, 전기차보다 사람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당에서도 고용자 수가 많다는 점을 좋아했다. 사측에서도 남한 내 비싼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어 삼자가 만족하며 개성공단 내에 강력하게 추진했다. 하지만, 어디나 잡음이 있기 마련이었다. S전자처럼 H자동차 직장인들 역시 개성공단으로 가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특히 노조는 과거 피격 사건과 개성공단 폐쇄 조치를 이유로 높은 위험 수당과 유사시를 대비한 추가 수당을 요구했다. 몇 차례 진통과 협상 끝에 어느 정도 수당이 추가되었고, 개성공단에 H자동차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전에 말한 신규 라인 말이야. 한 달 전에 완공됐다면서 벌써 생산량을 맞추라고?" "그래. 후공정도 아직 안정화 중이라 힘들다고 말했는데, 기존 후공정에 밀어 넣으라고 하더라. 될 리가 있나? 그래서 타 라인이랑 조율하느라 매일 싸우고 있어." "후공정이 못 받쳐주면 어떻게 앞에서 밀어내라는 거야. 너희 현장 사람들이 또 폭발하는 거 아니야?" "폭발하지. 지금도 벌써 죄 없는 나한테 불평, 불만 다 쏟아내고 있다니까. 웃긴 건 뭔지 알아? 당에서 낙하산으로 내려온 무식한 총괄 본부장이 자꾸 '조국의 영광을 위해 생산량을 늘리라'고 하는 거야. 현장은 못한다고 아우성인데, 중간에 낀 나만 완전히 엿된 거지."
대부분 현장 노동자는 북한 사람이었지만, 현장을 지휘하고 조율하는 반장이나 조장급은 다 남한에서 온 노조 사람들이었다. 현장 운영은 노하우가 있는 남한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더 본질적인 이유는 남한 노조가 북한 사람에게 강요 같은 지시를 받기 싫어하는 데 있었다. 북한에서는 당이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기에 이 부분에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요즘도 너한테 지X하는 거야?" "안 하는 날이 없어. 나한테만 그러면 다행이지. 저번 주에는 부품 공급 업체 사장한테 전화해서 일 똑바로 하라고 했더라. 거기 사장은 어이가 없었지. 하하하. 여긴 서열이 확실하다고. 당 간부, 그다음 남한 노조, 그 아래가 나 같은 북한 엔지니어와 작업자들. 그냥 나는 하수인일 뿐이야. 예전에는 당 간부도 자기 밑으로 봤지만, 이제는 본부장한테 찍소리도 못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지. 그 사건 이후로 본부장이나 다른 간부들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어."
그 사건이란 당 간부와 노조 사이의 마찰이었다. 남한 신문에도 대서특필될 정도로 큰 사건이어서 공단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