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남는 것은 과정의 맛
나는 딱히 똑똑하지 못하다. 남들은 내가 야무진 똑순이인줄 알지만(진짜입니다) 이해와 탐구엔 영 재능이 없다. 수험생 때 왜 나는 죽어도 수학 30번을 풀 수 없는 것인지 억울해서 머리를 치며 울었다. 아무리 머리를 써도 같이 사는 과학고 출신 수학영재에게 보드게임을 이길 수 없어 할 때마다 분조장 모드 발동.
운도 별로 없다. 그 어떤 것에도 당첨이나 추첨이 되어본 적이 없다. 가능성이 50% 미만이라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면 될 정도다. 찍은 건 웬만하면 틀린다.
그래서 난 남들보다 배로 노력해야 했다. 남들은 80점 받을만큼 공부하면 80점 받는다던데, 나는 80점 받을 생각으로 공부하면 60점을 받는다. 그러니 150점을 맞을 만큼 공부해야 100점을 받을 수 있었다. 아주 꼼꼼하게 강박적으로 공부하는 내 모습은 나의 능력치와 운빨에 대한 신뢰 부족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이해가 안 되면 뇌를 학대하듯이 암기해서 때려 넣었다. 나를 못 믿고 또 못 믿어서 10회독은 해야 시험장에 들어갔다.
이렇게 부단히 노력하는데도 안 되는 것들이 많았다. 즉, 내 인생엔 불합격이 꽤 많았다. 1n년 전 수험생활 2년 동안 내 인생의 모든 불합격 글자를 다 봤다. 나는 이렇게 죽도록 하는데 재수학원 앞 편의점에서 맥주나 마셨던 걔는 너무 쉽게 대학에 가는 것 같아서 억울했다. 심지어 인생 성적을 받을 만큼 수능을 잘 봤는데도 원서영역을 말아먹어서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대학에 갔다. 운이 드럽게도 없다. 마음 한 구석에 남은 학벌 콤플렉스는 여전히 내 열등감을 쿡쿡 건드리곤 한다.
작년 이맘때쯤 4달을 바쳐 공부한 대학원 시험에서 또 불합격이라는 글자를 봤다. 그 시험을 누가 그렇게까지 공부하냐는 말을 들을 만큼 또 열심히 했고, 시험도 만족스럽게 봤다. 성적 외에도 당락을 결정하는 다른 변수가 많은 시험이라 떨어졌다....라고 자기 위안을 해본다.
근데 요상하게도, 수능 때만큼 별로 억울하지 않은 거다. 나 같은 울보가 결과를 보고 울컥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게 몇 년 만이야. 지루했던 교직생활에 엄청난 리프레시였다. 이만큼 했던 나 멋쥐다!" 하고 말았다.
결과에 쿨해진 이유는 내가 단순히 30대가 되어서가 아니라, 과정의 맛을 알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값진 결과의 맛도 좋지만, 결국 나에게 남는 것은 과정이라는 것을 드디어 이해한 것.
불합격에 점철된 삶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타임라인은 그저 노력에 점철된 삶이었던 것이고, 결과 없이 쌓았던 노력은 결국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긍정적인 영향과 큰 자기효능감을 주었던 거다. <이까짓 합격과 불합격이 중요한 게 아니다. 후회 없이 열심히 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런 노력은 결국 나에게 소중한 경험 자산이다!> 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결과와 무관하게 어쨌든 나는, 해냈다.
아주 더디고 티가 나지 않지만 나는 결과 없이 결과를 내고 있다. 이런 내 모습이 아주 멋지게 느껴지고 마음에 들어서, 느끼하고 토할 것 같지만 오늘은 한껏 셀프 칭찬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