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베이킹으로 보내는 나의 일년살이
한때 시간이 빠르게 흐르길 바란 적이 있었다. 친구와 다퉈서 학교 가기 싫었던 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소속이 없는 상태가 되어 외로웠던 날, 임용 합격 결과를 기다리던 날, 초임이라고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 얼른 고연차가 되고 싶었던 날....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러 버리길 소망했다.
한때 시간이 느리게 흐르길 바란 적도 있었다. 준비가 안된 발표를 앞두고 있던 날, 엄마에게 집에 와서 보자는 카톡이 와있던 날, 좋아하는 애와 단둘이 있던 순간, 너무 예쁜 아이들과 보내는 학기 종료 직전의 나날들... 조금만 더 이 시간을 잡아놓을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은 나의 소관이 아니다. 까칠한 성격의 ‘시간’은 절대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반골 기질이라도 있는 건지 오히려 빨리 지나가라고 하면 느리게 가고, 느리게 가리고 하면 천천히 가는 게 시간이다. 나는 이제 시간을 통제하는 것이 나의 영역이 아님을 알고 더 이상 위와 같은 소망을 빌지 않기로 했다. 다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근잘근 만끽하며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기로 하였다. 워터파크 유수풀에 둥둥 떠가는 것처럼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한다.
시간을 만끽하는 최고의 방법은 취미생활에 시간을 적용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집에서 취미로 빵과 과자를 굽는데, 취미 생활을 통해 시간을 맞이하다 보면 매년 매계절 매달 매일이 특별해진다. 애쓰지 않고 맞이하는 시간들은 나에게 이벤트처럼 다가온다. 베이킹을 통해 누리는 나의 일년살이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3월부터 일 년이 시작하는 것은 직업병......)
봄이 다가오면 옷차림이 가벼워진다. 3월은 새 학기가 시작되는 마음 무겁고 바쁜 시기이기에 디저트만큼은 가벼운 것으로 골라 만든다. 쉬폰케이크를 구워 사이에 가벼운 크림을 샌드하거나 마스카포네 크림으로 딸기 티라미수를 만든다. 향긋한 제철 쑥을 넣어 만든 구움과자도 아주 좋아한다.
4월은 딸기 가격이 뚝 떨어진다. 길에서 못난이 딸기를 한 바구니 사 딸기잼을 만들어두는데, 이렇게 만들어둔 잼은 요긴하게 쓰인다. 날씨가 풀리고 따뜻한 바람이 불면 비로소 제빵의 계절이 다가온다. 한껏 발효된 반죽을 둥글리다 보면 내 마음도 둥글어진다. 낙엽소시지빵, 소금빵, 단팥빵... 먹고 싶었던 빵들을 가장 많이 만드는 4월.
가족의 달인 5월은 나를 위한 디저트보다 감사한 사람들을 위한 디저트를 많이 굽는다. 부모님을 위한 과일케이크, 스승의 날 찾아오는 제자들을 위한 스모어쿠키, 응원의 의미로 잔뜩 만드는 휘낭시에(재물의 의미가 있다).
6월은 햇감자가 나온다. 햇감자를 한 박스 선물 받으면 그렇게 마음이 든든할 수가 없다. 감자를 넣고 반죽하면 아주 쫀쫀한 빵이 나오는데, 감자를 으깨 만든 샐러드를 그 사이에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면 정말 맛있다. 감자를 넣고 스콘을 구워도 좋고 포카치아나 베이글을 구워도 좋다. 날이 더워지며 복숭아가 나오면 요거트를 넣어 케이크를 굽거나 복숭아 콩포트로 타르트를 만든다.
여름은 베이킹과 사이가 좋지 않은 계절이다. 더워서 오븐을 돌릴 엄두가 나질 않는다. 묵직한 맛의 디저트들도 끌리지 않기에 7월에는 최대한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가벼운 맛의 과자를 굽는다. 블루베리를 듬뿍 넣은 머핀이나 레몬 마들렌 정도. 8월은 덥다는 이유로 넘어가기엔 아쉽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인 무화과가 나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무화과를 넣어 프레지에를 만들면 정말 예쁘다. 크림치즈와 궁합이 좋아서 무화과잼을 만들어 크림치즈와 곁들여도 좋다.
9월은 양파의 계절이다. 기본 빵 반죽에 햇양파를 듬뿍 얹기만 해도 맛있다. 명절 선물로 견과류가 많이 들어오면 오븐에 전처리한 고소한 견과류를 잔뜩 넣고 비스코티를 만든다. 어른들이 좋아하는 메뉴라 명절 간식으로도 좋다. 추석을 맞이해 고소한 땅콩 쿠키를 구워내면 가을의 냄새를 듬뿍 누릴 수 있다.
추석이 지난 10월엔 사과로 디저트를 굽는다. 캐러멜 사과를 듬뿍 넣어 파운드를 굽고 사과잼을 만들어 애플크럼블도 굽는다. 사과는 시나몬이나 땅콩과 조합이 좋으니 꼭 곁들여야 한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티라미수 또한 생각난다. 10월의 티라미수는 3월처럼 가벼운 맛이 아니다. 에스프레소와 깔루아를 듬뿍 적시고 카카오파우더를 한가득 올려 묵직한 맛으로 즐긴다.
11월엔 일 년 치 보늬밤 공사를 한다. 통통한 알밤을 사다가 밤의 겉껍질만 벗겨내고 하루종일 졸이고 식히는 것을 반복해 보늬밤으로 만들어낸다. 진공 상태로 여러 병을 보관하면 쫀득한 보늬밤을 일 년 내내 맛볼 수 있다. 보늬밤 자격 시험에서 탈락한 못난이 밤들로는 밤페이스트를 만든다. 휘낭시에나 파운드케이크에 페이스트를 넣으면 고소하고 부드러운 밤 과자가 된다.
12월은 홈베이커들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연말 시즌에는 재밌는 베이킹거리가 넘치기 때문이다. 굽고 싶은 케이크도 한둘이 아니다. 딸기를 잔뜩 넣은 케이크, 묵직한 다크초콜릿으로 만든 마틸다 케이크, 크림치즈를 샌딩한 레드벨벳 케이크... 연말 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에게 산타 모양, 루돌프 모양의 버터쿠키를 선물하기도 하고, 색색의 크림을 올린 크리스마스 머핀을 만들다 보면 한 달이 후루룩 지나간다.
추운 겨울이 오면 묵직한 디저트가 먹고 싶다. 1월은 당근케이크를 굽기 좋은 시기다. 촉촉한 당근케이크보다 아주 묵직해서 포크가 꾸덕하게 들어가는 당근케이크가 더 좋다. 팥이나 인절미, 흑임자처럼 할매입맛 디저트들도 겨울이 딱이다. 시나몬롤이나 모카번처럼 따뜻한 향이 올라오는 빵도 1월이 적기다.
2월은 발렌타인이 있는 사랑의 계절이다. 평소에는 찾지 않는 초콜렛으로 브라우니도 구워보고, 쫀득한 갸또도, 초콜렛을 예쁘게 코팅한 마들렌도 굽는다. 초콜렛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선물 받는 사람의 행복한 웃음을 보면 나도 덩달아 행복해진다. 그래서 열심히 과자를 굽는 2월.
이렇게 나는 시간의 흐름에 나를 맡겨 한 해를 보낸다. 주어진 시간, 주어진 이벤트, 주어진 제철 재료에 맞추어 일년살이를 하다 보면 올해도 잘 누렸구나 하는 뿌듯한 마음이 든다. 거창한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어도, 기억에 남는 큰 업은 없었더라도 마음이 참 풍요로워지는... 나만의 시간을 만끽하는 방법. 참 마음에 든다.